사생활의 역사 - 중세부터 현재까지 혼자의 시간을 지키려는 노력들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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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을 작성한 글입니다.


사생활의 역사 - 데이비드 빈센트

2025.02.14.~2025.02.27.(256P)

 

사생활

방해받지 않는 삶

혼자의 시간

 

책의 표지에 쓰여 있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해석이다. 지친 일상을 재충전하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으로써 사생활의 역사라는 제목은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다만 원제인 ‘PRIVACY : A Short History'와는 달리, 길고 복잡하고 방대한 분야에 걸친 사생활의 역사가 책 속에 담겨 있다.

 

작가인 데이비드 빈센트는 사회역사학을 연구하는 영국 오픈대학교(개방대학, OPEN University)의 명예교수이자 킬대학교(Keele University)의 객원교수이다. 주된 연구 분야는 노동계급의 자서전과 영국과 유럽의 문해력 그리고 비밀과 사생활의 문화적, 정치적 역사이다. 저자는 또한 영국 및 아일랜드 역사 연구 그룹과 지역화 감정 연구 그룹의 멤버로도 활동하고 있다.

 

1341년 런던의 방해죄 재판소에 제기되었던 소송으로부터 대두된 프라이버시의 문제는 주택 설계와 가족 형태의 변화, 인쇄술의 발전, 종교 개혁과 경건주의의 부상, 서신이라는 사적 교류의 발달과 그에 따른 문해력의 확대 등 수많은 변화와 함께 그 의미를 발전시키고 확장해 왔다. 초기의 프라이버시는 가족과 가족의 공간을 보호하고 이웃에게 전달될 수 있는 정보의 경계를 어떻게 보호하느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서신 등 소통 기술이 발달하고 읽고 쓰는 능력이 보편화 되며 프라이버시는 사적 정보의 노출이라는 문제를 넘어 혼자가 되어 새로운 사적영역의 창조하고자 하는 부분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또한 우체국 법이 통과되고 3년 후에는 서신의 비밀을 보장하는 포고령이 발표되며 국가 기관이 가정의 문지방 안으로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법률의 토대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인 보호는 우체부과 우체국장 개인의 행위에만 적용될 뿐,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에 대한 우편 검열 영장의 발부 권한은 그대로 유지하는 이중접근법 아래에 있었고 그 접근법은 일부 수정을 거쳤으나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특히, 1790년대 프랑스 혁명시기에는 편지의 봉인은 물론 현관문, 집안의 비밀에 이르기까지 모든 프라이버시가 국가원수의 재량권에 침해당했다.

 

19세기에는 직업의 변화와 도시화로 노동계급의 도시로의 이동이 늘어났고 전신이 사용되고 전화가 발명되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의 주택은 목적에 따라 방을 분리고 가족의 독립된 공간을 두기 시작했다. 과거처럼 집 안에서 생계를 위한 일을 하지 않아 실내는 조용했고 가족 간에는 필요한 만큼의 소통을 유지했다. 가정은 하인만을 제외한다면 사적인 정보를 공유하는 하나의 세계로 사회나 정치권력도 이 세계를 침범할 수 없었다. 반면 황색언론은 개인정보를 폭로하거나 폭로하지 않는 조건으로 수익을 얻거나, 확인되지 않는 뒷담화를 활자화 하여 돈을 벌었다. 하물며 지역 신문에 제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웃에게 돈을 뜯어내는 경우도 있었다. 폭로가 협박으로 변질되어 가며 언론인들이 법정에 서게 되자 가정의 비밀을 보호하기 위해 법이 개정된다. 이렇게 가십으로 채워진 언론에 의해 사생활과 가정의 신성한 영역을 보호하는데 문제가 생긴 개인들은 세상으로부터 일정 떨어져 있기를 원하게 되었고 19세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고독과 프라이버시는 개인에게 더욱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20세기 초부터 프라이버시는 공식적으로 정의되고 장려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비공식적인 열망에서 기본적인 기대로 바뀌어 누구도 프라이버시를 무단으로 침해 받지 않아야하고 모든 사람의 사생활과 가정생활, 사정과 서신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선언되었다. 1950년대에는 주택의 질이 향상되고 실질소득이 증가하는 한편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기술의 혁신이 일어나, 여가 신간을 누구와 어떻게, 어떤 오락거리와 함께 보낼지에 대한 선택지가 늘어났다. 자동차가 보급되어 프라이버시의 대안이자 연장선이 되었고, 텔레비전 소유가 증가하여 시청자의 정신적 세계를 확대했다.

 

1970년대의 프라이버시는 가족의 신성한 영역이라는 부담스러운 개념을 벗어나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개념으로 재정의되고 있었다. 1972년의 프라이버시 위원회 보고서는 프라이버시의 권리를 (1) 자기 자신과 가정, 가족과 연애에 대한 침해로부터의 자유 (2) 정보의 프라이버시, 즉 자기 자신에 관한 정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얼마나 전달되는가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로 나누고 있다. 사회문화 전반에 거쳐 외적 형식에서 내적 목적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고,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줄어들면서 자신의 사생활은 직접 경로를 정하게 되었다.

 

20세기에는 프라이버시가 일종의 인권으로 부상하여 사생활의 보호라는 인식은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또한 디지털 혁명으로 개인정보 관리라는 의미를 데이터 보호라는 개념으로 연장하여 국제적이고 포괄적인 조치를 취하고자 하였다.

 

현대 사회에서 프라이버시와 국가의 관계는 주로 대립각이었다.

20세기 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국가는 국민을 관리하고 감시하기 시작했다. 전시 상황과 전후 희소한 자원을 배분하고 배급 위한 국가의 감독에는 대체로 모두가 동의하였으나, 그런 곤란한 사정이 사라지자 더 이상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주민등록제도와 같은 국가의 감시는 사라졌다. 이는 개인의 사생활 보장과 국가의 복지 혜택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후의 냉전시기 동안의 프라이버시는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와 적국과의 갈등의 소용돌이 중심에 놓여 있었다. 냉전시대가 끝나고 국제 테러의 시대가 이어지자 안보를 위한 감시의 필요성이 대두됨과 동시에 데이터 보호의 연장선에서 프라이버시 보호의 틀을 만들고자 했다.

 

어느 시대, 어느 계층에서도 완벽한 프라이버시의 유지는 불가능했다. 소셜네트워크가 성장하고 과도하게 개방된 소셜미디어가 난립한 현대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프라이버시의 보장을 위한 고독이란 중세 말기의 비밀 기도까지 거슬러 올라갈 고유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프라이버시의 침해란 프라이버시의 파괴라기보다 교환되는 정보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고 왜곡하는 쪽에 더 가깝다. 중세와 근대에도 엿듣는 사람과 잡담의 진짜 위험성은 내밀한 관계에 대한 폭로가 아닌 오해에 있었다고 보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결국 시간이 지나 사회, 문화, 기술적인 발전이 있다고 하더라도 프라이버시, 사생활의 근본적인 의미와 가치는 변함없이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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