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신저, 파리
패신저 편집팀 지음, 박재연 옮김 / Pensel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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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신저, 파리 (The Passenger: Paris)



파리지앵이 들려주는 낭만적이고 근사한 파리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인 줄만 알았다.

책에 대한 설명을 허투루 보았던 것인지, 제목으로부터 그저 혼자만의 상상을 통해 그 내용을 유추했던 탓인지, '패신저, 파리'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그 의외성의 커다란 크기 만큼이나 책은 새롭고도 놀라우며 또 흥미로운 파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세계 속 예술과 문화, 패션과 미식의 중심, 수많은 랜드마크와 세련된 파리지앵, 마리안느들이 살고있는 '빛의 도시', 언제나 최고의 여행지로 모두가 꿈꾸는 낭만에 가득 찬 파리이지만, '패신저, 파리'는 파리에서 쭉 살아왔거나 타국이나 도시에서 어떤 연유에서든 파리로 흘러 들어오게 된 여러 저자들의 글을 수집하여 파리의 화려한 빛이 닿지 못하는 다방면의 그늘진 곳을 조명한다. 그 이면은 아주 오랜 세월 당연한 듯 볕이 들지 않았던 곳들이기도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부분들이기도 하다.

'The Passenger' 편집팀은 장문의 에세이, 탐사 보도문, 보도자료나 기록 문학, 시각적 서사문 등 다양한 글들을 모아 그를 통해 독자가 어떤 장소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문화와 정체성, 공적담론, 국민정서, 핫이슈 등 다양한 희노애락을 마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더 패신저'시리즈는 본서인 파리를 비롯하여 나폴리, 지중해, 멕시코, 나이지리아, 바르셀로나, 아일랜드, 로마 등 여러권이 해외에 출간되어 있으며, 특히나 올해는 '서울' 편도 출간되어 어떤 글이 실려 있을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원서 'The Passenger: Paris'의 표지는 테라스에서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을 담고 있는 국내판의 그것과는 달리, 꽉 쥔 왼주먹을 번쩍 들고 있는 한 파리지앵의 모습을 담고 있다. 책의 내용에 비한다면 원서의 표지가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파리에 대한 꽤 정형화된 동경심을 가진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저 평화로워만 보이는 국내판의 표지가 책의 내용을 더욱 부각시켜주는 것 같기도 하다.




프랑스처럼 수도에 권력과 문화가 심하게 편중된 곳은 없다. 그리고 그 수도인 파리는 럭셔리, 패션, 오트쿠튀르(수작업으로 제작된 고급 맞춤 의류)의 세계적인 수도이기도 하며, 유네스코의 본부가 위치해 있고, 박물관, 공연장, 각종 문화 행사가 집중된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파리 외의 프랑스 모든 지역이 '지방'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러한 수준의 편중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러 저자들은 숨겨진 수도의 속살을 한꺼풀 한꺼풀 드러내 보여준다.

행복한 영혼이 죽은 후에 가는 엘리시온 들판으로 불리우던 아름다운 샹젤리제는 사회적 특권을 누리는 자들의 갑질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노란 조끼 시위대의 분노에 가득 찬 폭력성과 쾌감이 공존하는 봉기와 폭동의 공간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랜드마크인 퐁피두 센터는 선출직 대통령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의 기념비인 동시에,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 사람들이 몇 시간씩 줄을 서는 경쟁적인 전시 풍조를 불러 일으키고 건물들이 앞다투어 요란스러운 주목을 요구하고 상품성만을 과시하는 질병과도 같은 유행을 만들어 낸 '보부르 효과'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새로운 비스트로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 프랑스 부르주아 식단에 오르지 않던 내장을 자랑스럽게 요리하고, 재발견된 농사의 가치를 인정하듯 진흙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채소를 조달하고, 그렇게 준비된 요리답게 전통적인 격식에서 벗어난 편한 차림과 외모의 웨이터, 웨이트리스들이 이를 제공된다. 이런 식당들에 대한 '진짜' 맛집 가이드인 '르 푸딩 Le Fooding'은 권위적이고 전통에 얽메인 '미슐랭 가이드'의 지위를 위협한다. 이슬람 반유대주의로 인한 두 건의 유대인 노파 살인사건에 대한 해결되지 않는 논쟁은 프랑스 공화국의 자기모순과 함께 인종차별과 인종주의적 폭력의 존재를 보여준다.

이 이외에도 책 속에 그려지는 여러 그늘진 이면과 전통적 가치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수도의 주민들은 모든 것이 손에 닿는 곳에 있다는 자부심과 오만함에 길들여져 관광객이든 수도권 바깥 '지방'의 주민이든 외부인에게 관대하지 않기로 악명이 높다. 프랑스어를 구사하지 못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무시당한다는 한 관광객의 기사에 공감이 간다. 십여년 전 프랑스 여행 중에 영어로 했던 말에 들은 척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던 몇 얼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파리에 대해 가진 이상적 이미지와 실제 도시 사이의 이런 큰 격차로 인해 일부 방문객, 특히 일본 관광객이 '파리 증후군'이라는 증상을 겪는다고 한다. 우스운 일이다. 아마도 이 신드롬은 파리지앵이 가장 먼저 경험했을 것이라는 글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월은 흐르고 사람이든 도시든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파리라는 도시는 그저 존재해 왔고 자연스럽게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시대의 흐름과 요구에 따라 계속해서 변모해 갈 것이다.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

긍정적인 면은 찾아보기 힘든 내용들만을 담고 있지만, 적어도 이 책을 통해 책 속의 그림 같기만 했던 도시인 파리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파리도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훌륭한 사진과 세련된 삽화를 더한 너무도 인상깊고 유익한 경험이었던 탓에 The Passenger의 다른 편들도 빨리 속속 출간되어 여러권 만나 볼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파리는 늘 파리를 정의해왔던 생각,

즉 파리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신념을 버리면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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