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한줄]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살았다. 하지만 이번 기회는 놓쳐보기로 했다. 비열해질 기회까지 잡을 필요는 없다고, 놓쳐도 되는 기회도 있다고 일부러 볼넷을 던지는 사람이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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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모두가 노력해 만든 무대 위에서 예측 불가능한 짜릿한 노력의 맛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고있던 경기가 마지막 9회말에 만루홈런 한방으로 역전을 꿈꾸는 것처럼 우리도 인생의 한방을 한번쯤 고대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안다. 저 선수들이 한 순간에 만든 우연이나 운이 아니라는 것을. 9회말 만루홈런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력과 땀방울이 만들어낸 기회인지.
우리도 삶 속에서 수많은 마운드 위에 올라선다. 완벽한 투구폼을 가진 혁오는 타고난 것도 있지만 수많은 연습으로 성장해온 야구선수다. 그의 삶은 늘 탄탄대로일 것이라 생각한 준삼의 시선과는 다르게 혁오의 삶은 트라우마로 그 벽을 넘지 못한다. 하지만 볼넷이라는 오명도, 승부조작이라며 조여오는 주변의 시선도 그의 완벽하게 순수한 야구에 대한 마음을 꺽어내진 못한다.
불펜은 야구시합 중 구원투수가 경기에 나가기 전 준비운동을 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선발주자가 아니라 마지막 도약을 위한 공간, 우리는 모두 선발투수를 꿈꾸면서도 마지막 만루홈런을 쳐낼 구원투수가 되길 희망한다. 우리는 모두 패배자이기 보단 승리자가 되길 원하지. 그렇지만 삶에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갈리는 적이 얼마나 있을 것이며, 사실 실패한들 뭐 어떻겠나. 오늘이 실패하면 내일은 우승이 올 수도 있고, 누군가는 과거의 명예를 지고 앞으로 나가기도 누군가는 다가올 미래를 위해 묵묵히 다져가기도 하니까.
특별한 아이를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와 그저 그런 삶을 타고난 평범한 아들은 유일하게 야구장에 만큼은 마음을 같이했다. 그 기억을 기억을 바탕으로 기대에 부응하는 아들이고 싶었지만, 평범한 삶 속에서 평범한 회사원이 된 준삼 역시 계속 평범을 꿈꾼다. 평범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잔혹한 의미를 가졌는가. 쉬운 듯 쉽지 않고, 모나지 않은 듯 모가 난 이 말은 편안함에 안주하는가 평온안에 살아가는가의 큰 갈림길 속에 가장 큰 고민의 줄기가 된다.
우리는 모두 특별한 한 때를 꿈꾼다. 어쩌면 내 삶은 지금 가장 멋진 MVP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모두 현재 선발투수는 아니지만 묵묵히 경기의 흐름을 바꾸길 원하는 구원투수로 자신만의 불펜에 서서 몸을 풀어나간다. 물론, 내가 오늘의 경기 흐름을 극적으로 바꿀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불펜 안에서 나는 최선을 다 할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결과가 어찌 나오건 받아들일 것이라는 준비를 하고 나간다.
야구를 잘해서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쳐 기자의 길로 들어선 기현 역시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던 마운드 위의 투수였다. 지금 내 손에 쥔 것이 공이건 펜이건 상관없이 정확한 방향과 힘으로 힘껏 제구한다면, 그래 그것으로 됐다.
나는, 야구를 잘 모르지만 야구라는 스포츠가 주는 묘미는 조금 알 것 같다. 지금 불펜 위에 서있는 선수가 새로운 흐름으로 경기를 이끌어 나갈 수있다는 짜릿한 상상. 어느 위치에서건 어떤 상황에서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은 결과가 어찌되었건 박수를 받고 내려와도 된다는 것임을. 그리고, 그 경기 안에 한 방의 홈런을 날리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의 성과가 아닌 마운드 위의 모든 선수들이 함께 그 시간 속에서 노력하고 힘을 보태야 하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