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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서의 역사 - 나의 서양사 편력기 대우휴먼사이언스 18
이영석 지음 / 아카넷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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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작고한 역사학자 이영석이 학자로서 자신의 생애를 정리한 자기-기술지이다. 한 사람의 생애는 그가 만난 사람의 총합일 수도 있고, 그가 한 행동의 총합일 수도 있겠으나, 학자의 삶은 단연 그가 읽고 쓴 것의 총합이다. 나 자신이 ‘탐구하는 삶’에 대해 높은 가치를 두는 유형의 사람이다 보니 ‘학자의 삶’에 대해서는 매번 유난히 깊이 몰입하게 된다. 비슷한 책으로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도 떠오른다. 두 권 역시 무척 감동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김경만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도 떠올릴 수 있다.

이영석은 자신이 영국 산업혁명을 연구하기 시작한 계기가 상당 부분 우연에 의한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한국의 근대화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에 ‘근대화’의 전범 격인 영국의 산업혁명을 연구함으로써 바람직한 조국 근대화의 방향을 모색해보기 위함이라는 ‘공식적인’ 이유 이외에, 그가 영국사를 연구하게 된 것은 단지 동양사나 국사를 담당한 교수들보다 서양사 담당 교수들의 강의가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와 영어에 대한 상대적 익숙함 때문이었다. 보다 내밀하게는 종교적이었던 집안 분위기로부터의 도피도 한 이유였다.

자신의 지적 기원으로 그는 70년대 대학가의 진보적인 독서운동과 함께 ‘모리스 돕 – 에드워드 톰슨 – 에릭 홉스봄’ 등의 대표적인 사회경제사가들의 저작을 꼽는다. 그는 이러한 사회사적 문제의식을 토대로 산업혁명을 연구한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 사료를 수집하고, 저자에겐 낯설었던 통계기법까지 활용해가며 학위논문을 완성해가는 과정에 대한 회고는 역사연구의 실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가늠하게 해준다. 사회사적인 관심으로부터 출발했지만 학위논문 작성과정에서 계량경제사 분야의 논문을 섭렵하고, 이후 정치사, 포스트 모더니즘, 스코틀랜드 지성사, 지구사 및 제국사를 종횡 무진한 저자의 지적 ‘근면 성실함’은 학자적 삶의 한 모범을 보여준다.

저자는 (자신은 끝내 무고한 것으로 종결된)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한 친구에 대한 부채의식과, ‘서양사연구자협의회’에서의 진보적 학술운동의 좌절을 아프게 회고한다. 그의 지적 근면 성실함은 어느 정도 자신의 ‘참여적 삶에서의 좌절’로부터 기인한 것이기도 한 셈이다. 돈키호테적 삶과 햄릿적 삶 사이의 긴장에 대해 언급하지 않더라도, 참여하는 삶과 성찰하는 삶은 참으로 뒤섞이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느 쪽인가?)

저자는 지방 사립대의 교양학부 교수였다. 연구여건은 열악했으며 전공강의나 대학원 세미나도 담당하지 못했다. 그런 자기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규정하면서, 저자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 여건의 맞춰 자신을 개조해 나가는’ 상황적 지혜를 제안한다. 한 성실한 ‘비주류’ 학자가 자신의 한 평생을 돌아본 다음 남기는 조언에는 남다른 묵직함이 있는 법이다. 그는 사회와 불화하는 것에서 오는 고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저자가 후기에 남긴 젊은 연구자들에 대한 격려는, 독자로 하여금 기꺼이 아웃사이더적 삶을 살아갈 용기를 준다. 늦었지만 그의 삶에 경의를 바친다.

“학문후속세대가 줄어들고 이제는 학문 재생산구조 자체가 붕괴되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어느 학회나 젊은 연구자들을 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 숫자가 줄어들었더라도 어느 세대나 진실을 추구하고 탐구 자체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젊은이는 있는 법이다. 그들이 자신의 꿈을 쫓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이런 젊은이들을 주목하고 싶다. 물론 세대가 다르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겠지만, 탐구에 관심을 갖고 과거를 재현하는 데에서 무엇인가 보람과 가치를 찾으려는 젊은이라면, 나의 삶의 경험과 탐구의 여정이 그들의 탐구에 자극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영석, 『삶으로서의 역사』, p.34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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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휴먼 - 장애 운동가 주디스 휴먼 자서전
주디스 휴먼.크리스틴 조이너 지음, 김채원.문영민 옮김 / 사계절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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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국의 장애운동가 주디스 휴먼(Judith Heumann)의 자서전이다. 주디스 휴먼의 삶이 미국 장애운동의 역사와 겹쳐 있는 바, 그녀의 삶의 위대함과 한계는 곧 미국 장애운동의 의의와 한계이기도 하다. 먼저 주디스 휴먼의 삶은 미국 민권운동사의 맥락 속에 장애 운동을 위치 지울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준다. 아무래도 국내에서 ‘장애운동’은 흑인인권, 반전‧평화, 환경 및 여성운동에 비해 덜 알려져 있을 텐데, 주디스 휴먼, 에드 로버츠 같은 장애 당사자 출신 장애운동가들의 이름을 이번 기회에 기억해두면 좋겠다. 주디스 휴먼이 가담한 수많은 투쟁 중에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1977년 재활법 504조 서명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연방 정부 건물 점거 투쟁’ 과정에서 장애인 시위대가 흑인 인권 단체 ‘블랙팬서’와 연대하는 모습은 이 책의 가장 인상적인 대목들 중 하나다. 또한 장애 당사자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위축감과 불안감도 저자의 목소리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휠체어에 태워진 채 타인에 의해 ‘들려지는’ 경험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공포스러운 것인지는 정말로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지점이었다. 여성인 주디스 휴먼이 동료 남성 활동가 에드 로버츠에게 느끼는 미묘한 자격지심도 주목할 대목이다. 그녀에 따르면 같은 장애인 당사자였음에도 에드에 비해 자신은 여성으로서 항상 ‘과격하지 않아야’ 했다. 주디스 휴먼의 삶(몸)은 장애인 정체성과 여성 정체성이 교차하는 처소이기도 한 것.

그러나 주디스 휴먼의 삶은, 미국 특유의 사법 적극주의랄까, 최종적인 판단자로서 ‘법원’ 및 ‘행정 조직’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미국 장애운동의 한계도 동시에 보여준다. 그녀가 교사면허 취득을 위해 소송을 벌이는 과정에서 보였던 법관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나, 결국 그녀가 말년에 세계은행 및 클린턴, 오바마 행정부에서 행정가로서 너무나 ‘흔쾌히’ 일했다는 사실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녀는 또 한 사람의 ‘슈퍼 장애인’이었던 것은 아닌지. 요컨대 그녀의 삶은 위대할지 언정 전혀 ‘불온’하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은 역시 올해 초부터 극심한 논란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연착 시위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읽을 수 없다. 나 역시 이 책을 읽는 내내 전장연 시위를 의식했다. 장애인들의 시위가 일반 시민과의 갈등으로 치닫는 경우, 시위의 방식을 바꿀 수는 없느냐는 항의에 대해 활동가들은 어떤 논리로 대응해야 하는지. 책 속에도 도로 점거 시위로 교통에 불편을 초래했다는 사실이 언급되지만, 그로 인한 일반 시민과의 갈등 문제가 전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전장연이 시민들을 ‘볼모’로 잡아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 달라고 ‘협박’하고 있다거나, 시위에는 ‘적절한 방식’이 있으므로 지하철을 ‘점거’하는 방식은 ‘비문명적’이라는 이준석의 언설. 언론 노출을 즐기는 어느 유명 대학의 (무려 인권을 전공한다는) 사회학과 교수는 여기에 동조하며 이런 주장에 시민권을 부여한다. (물론 그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력 부족으로 인해 그다지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하지만.)

길게 말할 것 없이, 전장연이 말하고자 하는 ‘탈시설’과 ‘이동권 투쟁’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 한다. 지하철 연착 시위를 통해 전장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없는 세상이라면, 일반인들이 일상 속에서 최소한 장애인 인구에 비례하는 정도로 장애인을 자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장애인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저마다 세상 밖으로 나올 경우 지금처럼 지하철이 ‘연착’될 만큼 장애인 이동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장애인들이 모두 ‘시설’에서 거주하며 지역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어 일반인들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장연의 시위로 인한 지하철 연착 현상은 기본적인 이동권조차 보장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지금 당장’ 어우러져서 살아갈 경우 벌어질 일들에 대한 ‘확인’일 뿐이다.

나 역시 3호선과 4호선을 거의 매일 타고 다니다 보니 지하철 연착으로 인한 불편을 실제로 경험해봤다. 불편으로 인한 짜증은 감정적 진실이지만, 논리적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또 일반 시민은 짜증낼 수 있지만,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그 주관적인 짜증을 객관적 논거가 되는 것처럼 승인해주는 것은 잘못이다. 마치 자신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듯이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는 이들이 몹시 가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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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의 탄생 - 포스트-포스트 시대의 지식 생산과 글쓰기
김성익 외 지음 / 돌베개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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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80년대에 출생했고, 90년대에 10대를 보낸, 2000년대 학번의, (이 책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안은별이 개념화한 바 있는 ‘IMF 키즈’ 세대에 속한 10명의 ‘인문학 연구자’들의 자기기술지(Auto-ethnography)로 기획된 책이다. 최근 대학에서는 분과별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인데, 이른바 ‘MZ 세대’인 내가 학교에서 마주할(하고 있는) ‘새로 부임한 젊은 교수’들이 대략 이 세대의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방금 MZ 세대를 검색해보니 ‘MZ세대’는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출생집단을 통칭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 교수님, 우리 같은 세대였어요!)

‘연구노동자의 자기기술지’에 가까운 글도 있었고 자신들의 연구관심에 대한 시론(試論)을 전개한 글도 있었다. 주목해야할 것은 양자 간의 연결고리이다. 생애의 어떤 국면이 이들을 ‘연구자’로 거듭나도록 했으며, 이들의 학술적 관심사가 각자의 유년기 및 청년기 경험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가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연구자’와 ‘연구대상’의 관계는 분리가능한 것인가? ‘연구’ 내지 ‘공부’가 단순히 직업을 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식론적 실천이자 매혹적인 사회비판’(오혜진)이거나, ‘재미라는 종교’(김신식)일 수 있다면, 그것은 연구자의 공적, 사적 생애경로와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은 대학의 ‘연구 행위’에 대한 나의 낭만적인 망상일 뿐이고, 가능하면 ‘전도유망하며’, ‘논문양산이 손쉽고’, ‘국가와 사회로부터의 수요가 상존하는’, ‘돈이 되는’ 분야를 선택하는 것이 연구’노동자’의 보다 합리적이고 영리한 판단인 것인가?

페미니즘(오혜진, 윤보라, 배주연), 경제인류학(이승철), 정치학(양명지), 영문학(김성익), 사회학(김정환)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는 이들의 연구주제는 넓은 의미의 ‘문화연구’에 포함시킬 수 있는 성격의 것들이다. 이들의 연구는 ‘데이터를 가공해서 통계를 돌리는 식’이 아니라, 문헌을 일일이 ‘읽어내며’ 한 땀 한 땀 ‘썰을 푸는’ 유형의 연구다. 그러니까 이들의 연구는 대량으로 ‘양산’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들이 생산해내는 지식이 국가나 사회에 ‘당장의’ ‘즉물적인’ 효용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들은 자본주의 대학에서 가장 손쉽게 ‘구조조정’ 당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한 취약한 존재이며, 자신들의 연구가 어떤 ‘효용’을 갖는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대한민국에서 인문학 연구자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물어보게 된다. (단, 공저자 중 이승철과 양명지는 각각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와 하와이대학교 사회학과의 전임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젊은 연구자들답게 이들의 문제의식은 첨예하고 시의적이라서 이 책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연구주제들의 ‘아카이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미셸 푸코의 통치성 논의를 금융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 거버넌스 분석에 접목시킨 이승철의 글과, 첨단 (자연)과학의 발전이 야기한 ‘물질적 세계로의 이행’으로 인해 ‘세계의 텍스트성’이 의심받기 시작한 상황 자체를 인문학이 처한 문제상황인 것으로 규정한 김성익의 글은 두고 두고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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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볼테르 - 계몽의 시인, 관용의 투사
니컬러스 크롱크 지음, 김민철 옮김 / 후마니타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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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1694~1778)는 프랑스혁명이 있기 10여년 전에 죽었으나, 혁명 이후 팡테옹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볼테르가 귀족들과 잘 어울렸고 계몽 군주들과의 서신 교환에 열심이었으며 광신적 열정을 혐오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가 오늘날 혁명의 상징이 된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볼테르는 일평생 자기 자신의 삶을 연출하여 ‘대중’ 앞에 내 보이는 ‘공연 같은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이런 ‘오해’를 싫어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생전에도 ‘항상 자신이 무대 위에 있다는 자각 속에서 살았다’. 이것은 볼테르가 일생에 걸쳐 남긴 방대한 저술의 장르적 다양성만큼이나 후대인들로 하여금 그가 정확히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기 어렵게 한다. 저자는 볼테르의 다면적인 생애를 중심으로 볼테르와 그가 살았던 18세기 지성사에 대한 개괄을 시도한다.

볼테르는 자신의 이력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연극인으로서 시작하였다. 그는 <오이디푸스>로 24살에 출세했고, <탕크레드>, <자이르> 등의 연극을 흥행시키며 배우이자 작가로서 무대 안팎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전적인 형식 속에 근대적인 주제의식을 담아내는 것이 그의 특기였는데, 이것은 당대의 ‘고대파와 근대파 논쟁’ 구도 속에서 그가 근대파적 신념을 지지하면서도 문예적으로는 고대파적인 입장을 고수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다. 요컨대 그는 ‘고대파가 됨으로써 근대파가 되고자’ 하였다. 이러한 면모는 그의 초기 걸작인 <앙리아드>(1723)에도 반영되었다. <앙리아드>는 부르봉 왕조를 개창한 앙리 4세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프랑스의 ‘국민적 서사시’로 기획되었는데, 볼테르는 여기서 고전적 형식미를 지키면서도 ‘종교적 관용’을 중요하게 다루며 고전적 서사시를 주제적으로 혁신하였다. 한편, 볼테르가 쓴 운문 시에는 그가 호라티우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에피쿠로스주의로부터 받은 사상적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가상디는 에피쿠로스주의를 이신론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하였는데, 초기 볼테르는 바로 이 에피쿠로스주의의 합리주의적 유물론과 反형이상학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볼테르는 1726년부터 2년간 영국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 쓴 <영국인에 관한 편지>(프랑스에서 1733년 <철학편지>로 출간)는 여행기의 외관을 한 볼테르의 정치적‧사상적 선언문으로, 그가 에피쿠로스주의에서 근대 영국철학으로, 종교철학(이신론)에서 실용주의(정치경제)로, 그리고 운문에서 산문으로 이행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편지>의 볼테르는 기본적으로 영국 찬양자(Anglophile)로, 영국의 근대정신과 종교적 관용에 준거하여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단순한 이항대립을 설정하여 오늘날까지 익숙한 철학사적 구도 – 영국의 경험주의와 대륙의 합리주의 – 를 만들어낸다. 그는 자신의 이신론적 입장을 뉴턴, 로크, 베이컨의 경험주의와 유비하고, 프랑스의 종교적 권위주의와 절대주의를 데카르트와 유비하며 영국과 프랑스를 대치시켰다. (이 과정에서 데카르트는 부당하게 단순화되었고 프랑스의 고유한 경험주의 전통(가상디)도 무시되었다.) 한편, 볼테르는 <편지>에서 영국의 왕립거래소를 묘사하면서 종교적 관용을 ‘상업적 교류’와 연결시켰는데, 이것은 18세기에 이르러 상업이 정치사상의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된 것을 반영한다. 이 맥락에서 종교적 관용이 국제적 상호교류를 증진하고, 궁극적으로 ‘모두를 행복하고 평화롭게’ 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묘사는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대담한 정치적 성명’이 된다. 문체의 측면에서 <편지>는 간결하고 재치 넘치는 영어 산문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볼테르는 <편지>를 통해 유장하고 현학적인 프랑스어 문체에서 탈피하여 특유의 반어적이면서 비유적인 산문 문체를 통해 ‘대중적인’ 글쓰기 스타일을 개척했다(‘뉴턴의 사과’ 이야기도 <편지>에 처음 등장한 것이다!). 볼테르가 ‘나는 영국인처럼 생각하고 쓴다’고 했을 때, 그것은 영국에 대한 단순한 예찬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적‧문체적 전환에 대한 선언이었던 셈이다.

프랑스로 돌아온 볼테르는 연인이었던 여성 과학자 샤틀레 부인과 함께 1730년대~1740년대 이른바 ‘뉴턴 전쟁’에 가담, 뉴턴을 옹호하며 데카르트주의에 맞섰는데, 저자는 이것이 사상적 대결이었다기보다 프랑스 과학한림원 지배층과의 권력 대결이었다고 평가한다. 볼테르는 <뉴턴 철학의 요소들>(1738)을 통해 뉴턴을 유럽에 상세히 소개했고, 이것에 대한 당대 지성계의 반응에 수차례 재응답하며 유럽에서의 과학논쟁을 선도했다. 18세기 중반 프랑스 과학한림원에서 데카르트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뉴턴과 로크의 경험주의와 과학적 방법론을 중시한 볼테르의 노선은 결과적으로 역사적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볼테르는 프랑스의 구체제 속에서 귀족들과 가까이 지내며 언제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갈구하였다. 이것은 그가 루이 15세의 궁정사관으로서 왕실을 예찬한 일이나, 이후 계몽군주였던 프리드리히 2세, 예카테리나 2세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왕의 철학적 고문 역할을 하고자 한 것에서 드러난다. 동시에 볼테르에게서는 지식인으로서 유지한 궁정과의 일정한 긴장관계도 관찰되는데, 이는 역사가로서 볼테르의 주저인 <루이 14세의 세기>(1751)와 <민족들의 습속과 정신에 관한 고찰(습속론)>(1756)에 잘 드러난다. 볼테르는 루이15세의 궁정사관이었음에도 <세기>에서 선대 왕이었던 루이 14세를 위대한 왕으로 칭송하며 강렬한 서사를 통해 오늘날까지 익숙한 ‘태양왕 신화’를 창조했다. <습속론>에서는 유럽과 기독교 문명을 상대화하여 기독교주의적 보편사 기획(보쉬에)에 맞서 새로운 ‘인류 전체의 문화사’를 쓰고자 했다.

1750년대 중반 이후 볼테르에게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다. 그는 제네바에 정착하여 출판업자 크라메르와 함께 자신의 전집을 발간하던 중 리스본 대지진(1755)에 대한 신학자들의 반응(“리스본 사람들의 죄악에 대한 신의 징벌이다”)에 분개, 그것에 대한 문학적 대응으로서 <리스본의 재앙에 관한 시>(1756)와 <캉디드>(1759)를 내놓았다. 여기서 그는 라이프니츠의 낙관론, 혹은 모든 형태의 교조적 신념체계를 조롱하며 자신의 이신론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1760년대가 되면 볼테르는 거의 사회운동가로 변모하게 된다. 페르네에 정착한 볼테르는 당시 가톨릭 세력에 의해 부당하게 잔혹한 처형을 당한 말라그리다와 장 칼라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엄청난 양의 출판물과 편지를 통해 전 유럽을 상대로 대대적인 여론전을 펼친 끝에 두 일화를 ‘공적인 사건’의 수준으로 격상시켜 유럽에서 최초로 ‘사건을 발명’했다. 이때의 문제의식을 확장하여 가톨릭의 광신주의를 비판하고, 불관용의 역사를 파헤쳐 ‘관용’을 보편적 원칙으로서 받아들이고자 한 2부작이 바로 <관용론>(1763)과 <철학사전>(1764)이다. 특히 <관용론>에는 의미심장하게도 이러한 맥락에서 ‘인권’(le droit humain) 개념이 등장하기도 한다.


말년의 볼테르는 무엇보다 대중과 여론의 속성을 파악하고 다양한 매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줄 아는 당대의 ‘인기인(셀러브리티)’이었다. 그가 하버마스가 정의한 ‘공론장’보다 훨씬 광범위한 영역에서 무차별적인 ‘대중’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는 유명인이었다는 사실은, 계몽사상의 계보에서 볼테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의 문제와 직결된다. 볼테르의 ‘계몽철학’이 단선적으로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을 이룬다고 보거나(다니엘 모르네(Daniel Mornet)), 볼테르의 이신론적 입장을 ‘온건 계몽주의’로 분류하고, 이것과 대비되는, 스피노자적 유물론으로부터 연원 하는 무신론적 ‘급진 계몽주의’를 중시(조너선 이즈리얼(Jonathan Israel))하는 입장에 서면 볼테르의 진정한 급진성을 파악할 수 없다. 볼테르의 진정한 급진성은 그의 ‘실용주의적 사고’와 ‘행동을 위한 글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가 데니스 라스무센(Dennis Rasmussen)이 계몽사상을 ‘실용적 계몽사상’과 ‘추상적 계몽사상’으로 분류한 것이 이즈리얼의 ‘무신론 대 이신론’ 구도보다 더 적절한 것임을 강조한다. 어쩌면 볼테르가 전개한 사유의 ‘내용’보다도, 그가 지니고 있었던 언론인적 감각과 산문 작가로서의 재치야말로 ‘계몽적 정신’에 더 부합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볼테르의 가장 널리 알려진 저작이, 그의 역사적‧철학적 ‘주저’들이 아니라 후기에 ‘공적 지식인’으로서 내놓은 풍자물(<캉디드>)이라는 사실이 볼테르의 입장에서 유감인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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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붐 - 왜 중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가
훙호펑 지음, 하남석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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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평

중국 정치경제 관련서 중 가장 종합적이다. 1부는 비교 역사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중국 자본주의의 기원을 거시적으로 조망하고, 2부는 이코노미스트적인 감각으로 중국 경제의 미래를 전망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자는 중국식 성장모델이 세계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미국에 맞서 새로운 ‘보편’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신화를 공박하고자 한다.

 

2. 중국에서 자본의 장기적 부상

중국 경제사 서술이 흔히 마오 집권기의 사회주의적 계획경제(1949~1978)와 덩샤오핑 집권기의 자본주의적 전환(1978~) 사이에 극적인 단절을 설정하는 것에 반하여, 저자의 비교 역사사회학은 두 시기가 거시적으로 ‘자본의 장기적 부상’이라는 측면에서 연속적임을 보여준다. 17-18세기 중국의 상업적 번영이 19세기 유럽과 같은 자본주의로의 이행과 산업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중국의 정치제도와 계급 동학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한 경제가 자본주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농업 부문의 잉여를 축적‧집약하여 산업 발전의 동력으로 이전할 도시 기반의 엘리트 계급(자본가)이 있어야 하는데, 청나라 말기의 문화적 인습과 정치 제도는 이 계층을 재생산하는데 실패했다. 부를 축적한 상인 집단의 자녀들은 주로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향신‧국가 엘리트화 되었기 때문에 중국에는 계층으로서의 ‘상인 집단’이 형성되지 못했다. 또한 유럽에서 ‘국가’가 체계적으로 노동을 규율함으로써 각종 노동소요(아래로부터의 저항)로부터 자본가 계급을 보호한 것에 반해, 중국의 ‘가부장적 국가’는 노동자를 소작농과 같은 온정적 보호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적극적으로 노동을 규율하지 않아 자본가 계급을 보호하는데 실패했다. 계급 재생산을 제약당한 중국 연해 지역의 상인 엘리트들은 중국 밖으로 나가서 자본을 축적했으니, 이들이 바로 후일 동아시아 근대화에 자금을 대게 되는 화교 자본가들이다. 청나라 말기로 가면 종교 기반의 각종 내란(백련교도의 난, 태평천국 운동)으로 인해 지방에 군벌 엘리트(군사-약탈 엘리트)가 형성되었고, 국가능력 자체가 쇠퇴하면서 독일‧일본‧러시아 같은 후발 근대화 모델(국가 자율성을 통한 자본의 시초축적)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신해혁명을 전후로 하여 엘리트 집단이 뒤늦게 자본주의적 산업화 방안을 모색했지만, 강력한 국가기구가 부재한 상황에서 이는 불가능한 이상이었다.

중국에서 농촌의 잉여를 산업성장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은 공산당이 집권 이후 인민공사를 통해 주도한 ‘농촌집단화’를 통해서였다. 1958년~1961년의 ‘대약진 운동’은 농촌의 잉여를 폭력적으로 착취하여 포집, 이를 도시의 공업화에 사용함으로써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촉진했다. 공산당은 농민의 도시로의 이주를 제한하는 대신 인민공사를 통해 농촌에 각종 사회기반 시설을 건립함으로써 거대한 규모의 ‘산업 예비군’(예비 노동력)을 조성하였고, 농촌을 쥐어짠 덕분에 라틴 아메리카 등 다른 개도국들과 달리 대외채무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마오의 유산’은 이후 중국이 빠르게 자본주의로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마오 집권기는 ‘계획 경제의 실패 사례’라기보다 ‘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80~90년대 개혁개방의 성격: 동아시아 발전국가 모델과의 3가지 차이점

80년대와 90년대에는 국유 기업의 자본주의적 전환이 이루어지며 중국에 본격적으로 자본주의가 자리잡기 시작한다. 이때 고용불안정과 (가격개혁으로 인한) 물가 상승이 심각했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관료자본가’ 그룹이 형성되었다. 1989년 천안문 항쟁은 명백히 이러한 전환에 대한 저항이었는데, 덩샤오핑이 이것을 진압하고 1992년에 남순강화를 단행한 것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이를 두고 황야성(Huang Yasheng)은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에서 개혁의 성격과 속도의 측면에서 80년대와 90년대의 단절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 시기 중국의 정치경제는 동 시기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국가(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를 설명하는 ‘발전국가 모델’과 사뭇 다르다. 동아시아 발전국가가 중앙 집권화된 정부의 계획합리성에 기초한 것이었다면, 중국식 발전모델은 ‘분절화된 권위주의’(Lieberthal, 1992) 내지 ‘전도된 연방주의’(Mertha, 2005)라고 불릴 만큼 중앙정부보다 성급 지방정부 단위에 기초해 있었으며, 지방정부끼리의 과도한 경쟁이 조정되지 않은 과잉 생산과 투자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중국식 성장의 핵심 중 하나는 농촌을 고의적으로 파괴하고 침체시켜서 지속적인 이농을 유도, 상시적인 저임금 노동 공급을 가능케 함으로써 도시 노동자의 임금을 통제하고 내수 소비를 억제하는 것이었는데, 이 역시 동아시아 발전국가와 다른 점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냉전 지정학의 영향 하에서 농촌이 급진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농촌의 근대화와 발전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새마을 운동 등). 중국의 연해 도시 위주 발전 정책은 공산당 엘리트들의 출신 성분과도 유관하다. 장쩌민(상하이방)과 시진핑(태자당)은 모두 연해 도시 지역 출신 지도자들이다. 내륙 출신의 후진타오 집권기에 일시적으로 상무위원회에 내륙 지역 출신 구성원이 늘어나면서 농민의 생활수준 증진과 내수 진작이 이루어지며 중국경제의 재조정이 시도되기도 했으나 시진핑 집권 이후 그것은 다시 불투명해졌다.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이 이루었던 ‘기러기 대형’은 일본을 선두로 하여 부가가치가 높은 순서로 위계를 이루어 특정 부문의 최종소비재를 서구 시장에 수출하는 것이었던 반면, 중국의 ‘판다형 원형 체제’는 각종 부품재와 자본재를 주변국으로부터 수입, 최종소비재 생산을 독점하여 서구 시장에 수출하는 ‘중국 중심의 생산 네트워크’이다. 이를 두고 한국을 비롯한 부품재 수출국들은 자국 산업의 공동화를 우려하고,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 같은 원자재 수출국은 자국 경제의 대중국 종속을 우려한다. 남아시아 국가들의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는 대부분 중국 국유은행의 투자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이 이와 같은 주변국의 높은 대중국 경제의존도를 활용해서 외교적인 사안을 놓고 주변국에 ‘경제보복’을 가하며 지역적인 수준에서 패권을 휘두르고 있는 상황은 하마시타 다케시가 제안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설명 틀로써의 ‘조공-무역 체제’로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주변국의 중국에 대한 문화적‧학문적 존경심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 전근대 시대와의 차이점이다.

 

4.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상호의존성: 달러 패권의 영속화

그렇다면 중국은 미국을 대체할 새로운 지구적 패권국가로 부상할 것인가? 훙호펑은 중국이 결코 현상변경국이 아니라는 근거로 중국의 ‘미국 국채 중독’을 들고 있다. 중국의 과잉저축-소비억제형 성장모델은 미국의 (부채주도) 과잉소비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데, 둘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미국 국채이다. 중국이 미국을 상대로 무역흑자를 기록하면(순수출) 달러가 중국에 유입되는데, 중국은 이 달러로 가장 안전한 달러표시 자산인 미국 국채를 대거 구매한다(순자본유출, 자본 수출).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민들은 이 자금으로 다시 중국의 수입재를 구입하거나 자국의 금융자산(부동산)에 투자한다. 미국인들이 없는 돈에 과잉소비를 지속할 수 있도록 중국이 자금을 대주는 셈이다. 한편, 고정환율제 국가인 중국이 통화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무역수지 흑자가 필수적인데, 중국의 대미 무역 흑자는 중국 국유은행 유동성의 중요한 원천이 된다.

[국민소득 항등방정식을 통한 이해]
Y=C+I+G+NX

Y-C-G=I+NX=S
S-I=NX
(S: 저축, I: 투자, NX: 순수출)

이 상황은 20세기 초반 제국주의 식민 모국이 자국의 과소소비(과잉생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식민지에 자본을 수출, 그들을 채무국으로 만들어 무역적자를 감당하도록 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20세기 초의 식민지는 이 적자를 조세나 징발을 통해 감당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오늘날 미국에 공급된 유동성은 대부분 금융과 부동산 투기로 유입되어 세계경제의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두 시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자산가격이 무너지면서 미국의 소비가 급감한 사건이었다). 현재의 ‘글로벌 임밸런스’는 제국주의 시대의 세계 불균형보다 더욱 불안정하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20세기 초의 구도를 오늘날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중국이 미국을 식민통치하고 있는 모양새이나, 상황은 정반대다. 미국의 소비 수요가 위축되는 것은 최대 판매자인 중국에게 해가 되며, 중국은 대부분의 결제를 달러로 하고 있어 달러 본위제 및 미국의 지정학적 패권이 유지되도록 하는 핵심 축이기 때문이다(이 책은 달러패권이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지정학적인 이유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상적으로 설명한다). 인민폐가 국제거래통화로서 달러를 대체하려면 금융자유화를 통한 위안화의 완전태환성이 필요한데, 중국의 금융자유화는 환율 변동으로 인한 엄청난 리스크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인민폐의 달러화 대체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가 쇠퇴하고 중국이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진단은 잘못이다. 미국 국채는 중국의 새로운 아편이다. 니얼 퍼거슨의 ‘차이메리카 테제’를 따라, 중국은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가 지속되도록 하는 주요한 원인이자 배경이지, 도전자가 아니다.

 

5. 세계적 불평등 감소와 국제질서의 재편?

중국의 급성장으로 인해 세계적 수준의 불평등이 경감되었다는 일부 지식인들과 국제기구의 평가에 대해서도 이 책은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 중국 내 불평등은 마오쩌둥 시기에는 당원과 일반 노동자 사이의 ‘권력 불평등’의 형태로 존재해오다가, 80년대 이후 시장개혁을 거치면서 도농 간, 지역 간, 계급 간의 ‘소득 불평등’ 형태로 변화되었다. 중국 경제의 성장을 통한 절대빈곤 인구의 감소는 국가 간의 불평등을 감소시키는데 부분적으로 기여했으나, 그 감소분이 중국의 국내 불평등 증가로 인해 상쇄된다면 세계적 불평등 감소에 대한 중국의 기여는 달리 평가해야 할 것이다. 중국인 전체의 평균 소득이 세계 평균보다 낮을 때에는 중국 경제성장의 불평등 감소 효과가 더 크지만, 중국인의 평균 소득이 세계 평균보다 높아지기 시작하면 중국 내 불평등 증가 효과가 더욱 커져서 중국의 성장은 세계적 불평등 감소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따라서 80년대 이후 현재까지는 중국의 성장이 세계적 불평등 감소에 어느 정도 기여해왔으나, 중국의 성장이 유지되든 둔화되든, 중국의 평균 소득이 세계평균을 넘어서는 시점부터 중국의 성장은 오히려 세계적 불평등 악화를 가속화하게 된다.

중국의 글로벌 리더십 역시 제한적으로만 의미가 있었다. 과거 제3세계 개도국들은 미국 주도의 국제기구와 서구의 다국적 기업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는데, 중국이 제3세계 시장에 진입하면서 제3세계 국가들의 국제적 협상력이 상대적으로 늘어나며 중국은 제1세계와 제3세계 사이의 국제적 권력관계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다. 그러나 중국 역시 제3세계에 대하여 서구와 동일한 자본주의적 이윤창출의 논리에 기반해 접근한다는 점에서, 중국이 이 이상의 세계적 질서 재편을 시도하고 있다는 진단은 과장이다.


6. 정리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할 때, 중국이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근본적으로 변경할 것이라는 진단이나, 나아가 중국식 발전모델을 대안적 발전의 비전으로 평가하려는 시도는 잘못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은 오히려 장기 침체의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지금까지의 발전경로에 대한 고통스러운 재조정 과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 자유화는 이 과정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서문에 밝히고 있듯 홍콩 출신이며, 존스 홉킨스 대학 출신으로서 조반니 아리기의 제자였다는 저자의 배경이 저자의 거시-역사적인 시각을 가능케 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이 지나치게 정치-편향적이거나 경제-편향적인 것에 반하여, 훙호펑은 정치와 경제의 상호 엮임을 거시-역사사회학적으로 조망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다만 이 책은 일종의 논문 모음집이라서 중복되는 내용이 적지 않았다. 서로 다른 맥락에서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다 보니 완결된 단행본이라는 느낌은 잘 들지 않았다. 최근 동일한 역자(하남석 교수)에 의해 번역된 <제국의 충돌>도 조만간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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