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휴먼 - 장애 운동가 주디스 휴먼 자서전
주디스 휴먼.크리스틴 조이너 지음, 김채원.문영민 옮김 / 사계절 / 2022년 3월
평점 :
장기균형 블로그
이 책은 미국의 장애운동가 주디스 휴먼(Judith Heumann)의 자서전이다. 주디스 휴먼의 삶이 미국 장애운동의 역사와 겹쳐 있는 바, 그녀의 삶의 위대함과 한계는 곧 미국 장애운동의 의의와 한계이기도 하다. 먼저 주디스 휴먼의 삶은 미국 민권운동사의 맥락 속에 장애 운동을 위치 지울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준다. 아무래도 국내에서 ‘장애운동’은 흑인인권, 반전‧평화, 환경 및 여성운동에 비해 덜 알려져 있을 텐데, 주디스 휴먼, 에드 로버츠 같은 장애 당사자 출신 장애운동가들의 이름을 이번 기회에 기억해두면 좋겠다. 주디스 휴먼이 가담한 수많은 투쟁 중에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1977년 재활법 504조 서명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연방 정부 건물 점거 투쟁’ 과정에서 장애인 시위대가 흑인 인권 단체 ‘블랙팬서’와 연대하는 모습은 이 책의 가장 인상적인 대목들 중 하나다. 또한 장애 당사자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위축감과 불안감도 저자의 목소리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휠체어에 태워진 채 타인에 의해 ‘들려지는’ 경험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공포스러운 것인지는 정말로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지점이었다. 여성인 주디스 휴먼이 동료 남성 활동가 에드 로버츠에게 느끼는 미묘한 자격지심도 주목할 대목이다. 그녀에 따르면 같은 장애인 당사자였음에도 에드에 비해 자신은 여성으로서 항상 ‘과격하지 않아야’ 했다. 주디스 휴먼의 삶(몸)은 장애인 정체성과 여성 정체성이 교차하는 처소이기도 한 것.
그러나 주디스 휴먼의 삶은, 미국 특유의 사법 적극주의랄까, 최종적인 판단자로서 ‘법원’ 및 ‘행정 조직’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미국 장애운동의 한계도 동시에 보여준다. 그녀가 교사면허 취득을 위해 소송을 벌이는 과정에서 보였던 법관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나, 결국 그녀가 말년에 세계은행 및 클린턴, 오바마 행정부에서 행정가로서 너무나 ‘흔쾌히’ 일했다는 사실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녀는 또 한 사람의 ‘슈퍼 장애인’이었던 것은 아닌지. 요컨대 그녀의 삶은 위대할지 언정 전혀 ‘불온’하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은 역시 올해 초부터 극심한 논란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연착 시위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읽을 수 없다. 나 역시 이 책을 읽는 내내 전장연 시위를 의식했다. 장애인들의 시위가 일반 시민과의 갈등으로 치닫는 경우, 시위의 방식을 바꿀 수는 없느냐는 항의에 대해 활동가들은 어떤 논리로 대응해야 하는지. 책 속에도 도로 점거 시위로 교통에 불편을 초래했다는 사실이 언급되지만, 그로 인한 일반 시민과의 갈등 문제가 전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전장연이 시민들을 ‘볼모’로 잡아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 달라고 ‘협박’하고 있다거나, 시위에는 ‘적절한 방식’이 있으므로 지하철을 ‘점거’하는 방식은 ‘비문명적’이라는 이준석의 언설. 언론 노출을 즐기는 어느 유명 대학의 (무려 인권을 전공한다는) 사회학과 교수는 여기에 동조하며 이런 주장에 시민권을 부여한다. (물론 그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력 부족으로 인해 그다지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하지만.)
길게 말할 것 없이, 전장연이 말하고자 하는 ‘탈시설’과 ‘이동권 투쟁’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 한다. 지하철 연착 시위를 통해 전장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없는 세상이라면, 일반인들이 일상 속에서 최소한 장애인 인구에 비례하는 정도로 장애인을 자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장애인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저마다 세상 밖으로 나올 경우 지금처럼 지하철이 ‘연착’될 만큼 장애인 이동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장애인들이 모두 ‘시설’에서 거주하며 지역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어 일반인들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장연의 시위로 인한 지하철 연착 현상은 기본적인 이동권조차 보장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지금 당장’ 어우러져서 살아갈 경우 벌어질 일들에 대한 ‘확인’일 뿐이다.
나 역시 3호선과 4호선을 거의 매일 타고 다니다 보니 지하철 연착으로 인한 불편을 실제로 경험해봤다. 불편으로 인한 짜증은 감정적 진실이지만, 논리적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또 일반 시민은 짜증낼 수 있지만,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그 주관적인 짜증을 객관적 논거가 되는 것처럼 승인해주는 것은 잘못이다. 마치 자신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듯이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는 이들이 몹시 가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