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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일 교섭 30년
와다 하루키 지음, 길윤형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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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균형 블로그

외교협상과 민족주의:

<북일교섭 30년>을 읽고

1. 고이즈미의 방북은 일본 외교의 ‘일탈’이었나

북한위협에 대한 억지를 주목적으로 했던 한미동맹과 달리 미일동맹은 그 출발부터 동북아질서 안정이라는 지역 수준의 전략적 목표 하에서 결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한미동맹이 한국의 국내정치와 정부 별 대북정책 기조에 따라 비교적 탄력적으로 운용되어온 것에 비해 미일동맹은 미국의 대전략에 종속되어 대체로 일관성 있게 운용되어 왔다. 미국 동북아 전략의 중심은 언제나 미일동맹이 차지해왔고, 한미동맹은 그 하위파트너에 불과했다. 미일동맹은 1951년 체결 이후 세 번(1978년, 1997년, 2015년)에 걸쳐 ‘안보 가이드라인(방위협력지침)’ 개정을 거치며 꾸준히 강화되고 발전(확장)해 왔다. 최근의 주목할만한 변화는 ‘아시아-태평양(아태)’에서 ‘인도-태평양(인태)’으로의 변화다. ‘인도-태평양’ 개념은 아베 총리가 먼저(2016년) 제시한 것을 바이든 정부가 수용한 것(2021년)이다. 한국과 중국은 일본이 주도하는 대외전략의 역사수정주의적인 측면에 주목하지만, 서방의 시각에서는 일본 외교의 국제주의적, 보편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미일동맹의 이 같은 전략적 일관성과 보편성을 고려하면, 2000년대 초반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과 북일정상회담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심지어 당시는 9.11 테러 직후 북한이 ‘악의 축’으로 낙인 찍힌 시점이었다. 미일동맹의 위상이나 무게감을 고려하면 일본은 언제나 미국과의 긴밀한 전략적 공조 하에서 일관된 대외노선을 밟았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어떻게 북한과 같은 ‘불량국가’와 단독으로 정상회담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에 국제정치적 요인보다 일본 내 좌우 시민사회의 압력이라는 국내정치적 요소가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2. 북일교섭의 역사적 의미와 청중비용(audience cost)

일본에게 북한은 ‘최후의 전후처리 미달성국’이다. 일본이 북한과 수교하는 것은 일본이 과거 제국주의의 유산을 최종적으로 청산하고 동아시아 평화의 길을 여는 길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작지 않다. 일본의 양심적 시민사회는 그런 측면에 주목하여 80년대부터 북한과의 수교를 추진해왔다. 남한 군사정부와 맺었던 1965년 한일협정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역사문제’(제2조의 해석문제)를 북한과의 협상에서만큼은 제대로 다루어야 했다. 마침 고르바초프 집권(1985년)과 노태우의 7.7선언(1988년)으로 전후 냉전질서 혹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이삼성)’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한국은 공산진영인 중국-소련과, 북한은 서방진영인 미국-일본과 수교하는 것을 ‘교차승인’하는 방안이 한일 양국 정부(전두환-나카소네) 차원에서 합의되었다. 북한 역시 고르바초프의 ‘전선 이탈’에 직면하여 서방 진영과 수교할 필요성이 생긴 참이었다.

이와 같이 우호적인 국제환경에서 1990년 가네마루-다나베 방북을 기점으로 북일교섭이 시작되었다.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북일관계의 원점이 되어야 한다는 지식인들과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사회당을 통해 일본 정부 입장에 반영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 국민들 또한 처음에는 대체로 ‘사죄로 시작된 북일교섭을 받아들였다’. 일본의 좌파 시민사회가 추진했던 ‘진보적 북일수교’의 흐름은 무라야마 도미이치 같은 유력 정치인이나 대북외교를 전담한 외교관 다나카 히토시 등을 통해 꾸준히 이어졌으며, 일본의 식민지배 사죄를 포함한 ‘평양선언(2002)’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일본 내 우익 진영이 주도한 혐북의 흐름 또한 8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특히 90년대에 일본인 납북자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면서 우익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커졌다. KAL기 테러리스트 김현희의 증언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확인되어오던 납치자 문제가 김정일의 입을 통해 실제 있었던 일인 것으로 확인되자 일본 내 우익 진영(사토 가쓰미의 ‘현대 코리아’ 그룹 등)과 정치인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여 대북 강경론과 압박론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진보적 북일수교’를 주장하던 와다 하루키 등 지식인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대북 비밀교섭을 이끌었던 다나카 히토시 역시 주요 공격대상이었다(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서브컬쳐에서 외교문제가 다루어지는 방식이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울트라 달러>는 다나카 히토시에 대한 음모론적 음해를 소재로 한 정치 장르소설로, 다나카에 대한 우익 진영의 ‘문필린치’였다. 그런데 러시아와의 북방영토(쿠릴열도) 반환 협상을 주도했던, 이 책에도 잠시 언급되는 외교관 사토 마사루를 주인공으로 한 이토 준지의 만화 <우국의 라스푸틴>은 사토를 ‘일본의 국익을 위해 헌신했던 우국지사’로 묘사한다. 저자인 와다는 사토 마사루 등 대러외교 그룹이 배임죄로 체포되었을 때 이들을 변호했다고 한다. 일본에게 러시아 문제는 좌우 시민사회에서 각각 어떻게 인식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고이즈미 총리의 정확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는 이 책을 읽어도 알 수 없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고이즈미 총리는 정말로 북한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총리는 ‘개인외교’ 차원에서 미국에도 알리지 않은 채 다나카의 비밀교섭을 지지했지만, 그렇다고 아베 등 내각 내 강경파를 제대로 통제한 것도 아니었다. 방북 후 기자회담에서는 납치자 문제만 언급하고 나머지 문제에 대해 침묵해버렸다. 결국 고이즈미 총리 자신은 ‘무사상(無思想)’이었고, 그는 국내의 좌우 시민사회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역사적 사죄 대 납치자 문제 해결) 형성한 북일교섭의 동력에 ‘휘둘려’ 별 생각 없이 대북외교에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본은 납북자 일시귀국 후 북한과의 약속파기, 요코타 메구미 유골 DNA 감정 스캔들 등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북한과 계속해서 실랑이를 벌였고, 북일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저자는 북일수교의 중심 의제가 좌파 시민사회운동에서 제기한 ‘역사적 반성’으로부터 우파 포퓰리스트들이 중시하는 ‘납치자 문제’로 넘어가버린 것을 아프게 회고한다. 아베 총리는 집권 후 납치문제에 대한 비타협적 강경책인 ‘아베 3원칙’을 천명했고, 북한 역시 2차 핵실험(2009)을 통해 9.19 합의를 파기해버리면서 북일수교의 모멘텀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민주당 정부에서도 북일협상은 지지부진했고, 아베 2기 내각에서의 스톡홀름 합의(2014) 역시 이후 협상 진행과정을 보면 아베의 국내정치 용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 사죄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3. 북일 국교정상화는 가능한 일이었나

그렇지만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문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로드맵을 가지고 협상에 임했어도 북일수교가 저자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먼저 국제정치의 구조적 요인이 있다. 정상회담까지는 미국 몰래 성사시켰지만, 북핵문제가 끼어 있는 상황에서 일본이 북한과 마음대로 수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는 다나카 히토시가 정상회담 후 6자회담의 진전을 거쳐 북일수교로 이행하는 단계적 구상을 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북일수교만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이를 통한 동북아시아 정세의 ‘현상변경’이 가능했을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2000년대 세계질서가 그러한 외교적 상상력이 통하는 시공간이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본 내 우익 진영의 목소리가 일본 내에서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 사죄하라’는 국내 진보파에 더해 90년대 이후로는 민주화된 남한정부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를 요구해오는 상황에서 일본 우익은 극심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악명높은 ‘새역모’(96년)도 그러한 맥락에서 시작된 반동이었다.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 문제에 대한 강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런 국내 여론을 무릅쓰고 북일교섭에서 역사문제를 전면화하고 납치자 문제를 사소하게 다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는 스스로가 참여했던 진보적 북일교섭운동의 흐름을 주된 서사로 제시하지만, 일본의 주류에게 중심서사는 납치자 문제로 대변되는 ‘피해자 서사’가 아니었을까? 장기 지속하는 동아시아 냉전질서와 일본 국내정치의 우경화 흐름을 고려하면, 단지 ‘납치자 문제가 과도하게 부각된 것’만이 북일교섭을 가로막았다고 보는 것은 일본 시민사회의 서사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4. 외교협상과 민족주의

저자의 납치자 문제에 대한 인식은, 한국인 독자가 봐도 서늘해 질만큼 냉철하기 이를 데 없다. 저자는 처절한 외교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로서, 죽은 납치자를 살려내라는 식의,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적인 주장에 얽매이는 것은 역사적 화해와 국가 간 신뢰구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역자는 옮긴이 후기에서 와다가 철저한 지한파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의 위안부 합의파기에 반대한 것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일본 내 납치자 문제의 제기와 확산 과정을 몸소 경험한 와다는 위안부 문제도 적정선에서 봉합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한일화해의 걸림돌로 남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예감한 것이다. 위안부 합의가 아베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수용할 수 있는 최대치의 양보를 한 것이라는 점에서 와다는 합의를 준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위안부 문제와 납치문제를 대등하게 이해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위안부는 제국주의 시대에 국가 단위에서 이루어진 전시 성범죄였고, 일본인 납치는 준실패국가인 북한의 일탈적 테러행위였다. 일본사회가 납치자 문제에 대해 보여야 하는 절제와 자제를, 한국사회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보여야 한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외교주의적인 태도다. 인권문제를 숫자로 따질 것은 아니지만, 숫자로 봐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납북 일본인의 규모는 17명에 불과하여 전시 위안부의 규모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납치자나 북한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사회가 유난히 감정적이고 격앙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는 실제로 납치자 문제가 일본 내 우익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방식(혐북과 음모론)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여성인권단체인 정의기억연대가 최초로 제기한 것으로서 (한국적인 맥락에서 다소 왜곡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보편적 여성인권운동의 측면이 강했다. 우리는 적어도 혐일과 음모론으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고 있지 않다. 국내정치에서 민족주의가 부상할 경우 협상의 윈셋이 축소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를 외교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것은 부적절하다지만, 위안부 문제는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적 의제가 아닌 것이다. 일본의 납치자 문제야말로 ‘민족주의적’이고 감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본인들이 납치자 문제에 대해서 보이는 격앙된 태도도 이해할 만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21세기적인 맥락에서는 역사적 화해와 국가간 협상을 이유로 보편적 인권의 문제가 도외시되어서도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의 맥락에서 보자면, 가령 북한인권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을 위해 한국정부가 북한인권 문제에 대해 ‘자제’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 역시 ‘역사적 사죄와 반성’을 위해 자국민에 대한 타국의 테러행위를 외면할 수 없는 국내정치의 구조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은 그 자체로 이해할 만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외교에서 과거사나 인권문제를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영역으로 설정하는 것은 대화의 여지를 지나치게 좁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는 되새길만 하다. 국가 간 외교협상에서 어디까지가 유연성을 발휘하여 협상할 수 있는 영역이고, 어디부터가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역린이 되는 것일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는 사회적 합의의 문제다. 이때 국내정치적으로 민족주의나 애국주의 혹은 (상대국의) 인권문제가 부상할 경우 외교적 자율성은 크게 훼손된다. 인권문제와 같은 보편적 의제를 협상테이블에 절대로 올리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구 공산권 국가들은 서구로부터의 인권문제 제기를 존재론적 안보위협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문제다(국제법상 내정불간섭 원칙과 국제인권규범은 서로 딜레마 관계다).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전이 정부와 민간의 정보 비대칭을 감소시킨 것 역시 민주주의 국가의 외교적 자율성 훼손에 일조하였다. 협상을 하려면 서로 조금씩 양보를 하는 수밖에 없는데, 백주 대낮에 지도자가 자국의 이익이나 인권문제를 ‘통 크게 양보’하는 것을 용서할 국내정치 행위자는 없다. 사방팔방이 백주 대낮이 되어버린 디지털 사회에서 국가 간 ‘밀실합의’나 지도자들 간 ‘흉금을 터놓고 하는 대화’의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었다. 과감한 외교적 상상력이 작동할 수 없도록 하는 이런 제약 때문에 국가들을 진공상태의 합리적 행위자로 바라보는 게임이론을 외교문제에 적용하는 것이 일정한 타당성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외교사의 디테일을 공부해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협상의 디테일에 주목하자면 실무 외교관의 비망록이나 최종적으로 합의한 ‘선언문’만큼 흥미진진한 것도 없다. 어느 때보다도 국가 간 협상의 기술이 필요한 오늘날, 데탕트 시대의 ‘해빙외교’와 한국 북방정책의 구체적 메커니즘에 다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소련과의 국교정상화는 고르바초프의 일방적인 양보로 가능했기 때문에 오히려 특수한 사례였다. 일소수교(1956), 중일수교(1972), 미중수교(1979), 한중수교(1992), 그리고 북일교섭 및 북미수교의 시도에서 무엇이 쟁점이었고 서로 어떤 양해를 했던 것인지, 또 당시 주변국들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다시 북일수교 이야기로 돌아오면, 고이즈미의 방북은 일본의 국내정치와 동북아 국제질서가 부딪혀서 후자가 전자를 압도했던 외교적 사건이었던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때 일본의 국내정치가 동북아 냉전질서를 둘러싼 외교적 상상력을 복돋웠던 것인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제약했던 것인지가 정치학적 쟁점이 되겠다. 북일교섭사는 대내적 시민정치와 대외적 베스트팔렌 질서의 역학관계에 대한 중요한 사례다.

 

5. 보론: 미일동맹은 한미동맹이 따라야 할 모범인가?

미일동맹과 비교할 때 두드러지는 한미동맹의 유연성은 한국외교의 자산일까 부채일까? 보수 우파적인 안보관을 가진 이들은 미일동맹의 전략적 일관성과 확실성을 부러워하며 한미동맹을 미일동맹과 대등한 수준의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격상시키고자 한다. 반면 민주당 계열은 한미동맹의 상대적 유연성을 최대한 활용해서 미중 사이에서, 혹은 대북정책에 있어 한국정부의 외교적 자율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지난 해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를 기점으로 무게추는 전자 쪽으로 기울었다. 한미일 협력의 틀 속에서 한국은 기존의 ‘미일동맹의 하위 파트너’에서 나아가 보다 ‘글로벌한’ 역할을 수행하는 ‘중추’ 국가로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이를 두고 진보적 전략가들은 ‘연루의 위험’을 우려한다. 주한미군의 역할이 북한 억지에 한정되지 않고 ‘글로벌한’ 수준으로 확대될 경우, 가령 중국이 대만침공에 앞서 주한미군의 기동성을 무력화하기 위해 (북한을 통해) 남한을 선제타격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섬뜩한 시나리오도 등장한다.

언제까지고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고수하다가는 최종적으로 양쪽 모두로부터 ‘방기’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한국 정부의 정체성 자체가 중국식 권위주의보다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적 가치’나 ‘규칙 기반 질서’와 친화적일 수밖에 없음을 고려하면, 윤석열 정부의 ‘전략적 확실성’ 노선은 불가피했던 측면도 있다. 하지만 외교안보정책의 입안자들이 절대적으로 고수해야 하는 제1의 원칙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이나 유사사태를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을 따르자면 한반도, 특히 북핵문제가 미중 전략경쟁에 직접적으로 연루되는 일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만큼 중요한 외교적 목표는 없다. 한미동맹을 미일동맹 수준으로 격상시켜 국격(?)을 높이겠다는 의지가 그 원칙보다 앞서 있는 것으로 보이는 윤석열 정부 외교안보참모들에게는 본말이 전도되어 있는 것 같다. 민주당의 반일민족주의 외교도 문제였지만, ‘우리도 일본처럼 되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이야말로 뒤틀린 민족주의 외교가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 어차피 단기간에 한미동맹이 미일동맹 수준으로 밀착할 수는 없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으로의 합류 속도가 너무 빨랐다거나, 그 과정에서 한중관계를 ‘포기’하는 등 외교적 정교함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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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 스캔들 - 화려한 실패의 지식사회학
이시윤 지음 / 파이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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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하버마스 수용 ‘실패’에 대한 지식사회학적 분석을 담은 (엄청나게 재미있는) 책이다.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인데, 지도교수인 김경만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에서 다소 신경질적(?)으로 제기되었던 문제의식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고 본격화한 것으로 읽힌다. 개인적으로는 무협지 읽듯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현역으로 활동 중인 국내의 철학자‧사회학자들의 실명이 난무하는 뒷부분의 분석도 인상적이지만, 앞부분에 이론적 틀로서 제시된 부르디외의 ‘장 이론’에 대한 명료한 설명도 유익하다.


어째서 한국에는 ‘자생적 이론’이나 ’독자적 학파‧사상’이 없는가? 이 물음에 대해 지금까지 제출되어온 학계 자신의 설명은 내인론과 외인론으로 양분된다. 내인론은 학자들이 한국사회만의 문제에 대한 충분한 고민 없이 서구 이론을 수동적으로 수입해오는데 급급했기 때문에 자생적 이론이 성립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 경우 한국 인문사회과학 분야 후진성의 원인은 ‘불성실하고’ ‘서구-편향적인’ 기성 학자들에게 있다. 외인론은 한국사회 자체가 점차 신자유주의화되면서 대학 내에서 학과의 존립을 위한 정량화된 논문 글쓰기가 강요되어 인문학이 점차 (한국)사회의 현실로부터 유리되었기 때문에 이른바 ‘한국적 인문학’이 충분히 성숙할 수 없었다는 진단이다. 외인론에 따르면 ‘인문학의 본성에 맞지 않는’ ‘한국연구재단 등재지 제도(‘학진체제’)’야말로 문제의 원인이며, 학자들은 이에 맞서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열심히 사회 및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

그러나 두 설명은 한국의 ‘학술-장’이 충분히 자율적이지 않다는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부르디외가 강조한 ‘학술-장의 자율성’이란 장 바깥의 효용이나 필요와 무관한, 고도로 전문화된 ‘좁고 깊은’ 관심을 공유하는 구성원들끼리 ‘그들 만의 게임’에 몰입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부르디외에게 객관적 지식(진리)이란, 학자들이 ‘진리의 상아탑’에 갇힌 채 자신들이 탐구하는 주제가 가치 있다는 ‘집단적 오인(일루지오)’에 빠져 장 내에서 상징자본(동료의 인정 등)을 쟁취하기 위한 ‘상징투쟁’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간주관적’으로 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친밀한 적대자 공동체’의 존재다. 이들은 서로의 협애한 학문적 관심사가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며 서로의 주제 탐구에 대해 진지하고 성실한 관심을 보인다는 점에서 ‘친밀’하지만, 동시에 서로에 대한 가장 엄격하고 냉정한 비판자이며 장 내에서 상징자본의 분배를 두고 투쟁하는 당사자라는 점에서 ‘적대적’이다. 한국 학계가 자생적 이론을 낳지 못한 것의 일차적인 원인은 바로 이 ‘친밀한 적대자 공동체’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친밀한 적대자 공동체의 형성을 방해하는 두 지배적 경향은 ‘학술적 도구주의’와 ‘딜레탕티즘’이다. 사회 변혁과 같은, 장 바깥의 실용적 필요를 위해서 학문을 도구화 할 경우, 학문적 탐구의 대상은 시류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므로 학술장은 충분히 자율적이라고 할 수 없다. 급변하는 한국사회의 요청에 그때 그때 응답하자면, ‘좁고 깊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친밀한 적대자 공동체는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딜레탕티즘은 이미 중심부에 자리를 잡은 주류 제도권 학자들이 ‘좁고 깊은’ 탐구를 그만두고 ‘교양 교육자’ 혹은 ‘경륜가’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개론서나 교양서를 집필하며 ‘넓고 얕은’ 지식을 재생산하거나 언론 노출을 통해 사회에 훈수를 두는 것으로 자신의 이력 후반부를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두 경향을 지양하며 외산 이론을 성공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학술장의 자율성을 이룩한 드문 사례로 부르디외는 68혁명 시기 프랑스 학술장을 분석한다. 구조주의 사조 자체의 문제성을 차치한다면, 레비스트로스가 소쉬르 언어학과 영미 인류학을 결합하여 ‘구조주의 인류학’을 도입하고, 이를 이어받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전문주의적 아비투스에 의해 프랑스 학술장이 갱신되었던 것은, 외국 이론을 성공적으로 ‘토착화’하여 자생적인 이론을 산출한 모범 사례가 된다. (이 대목에 대한 부르디외의 정교한 분석은 감탄스럽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하버마스 수용은, 거칠게 요약하면, 그 출발부터 학술적 도구주의의 경향이 짙었으며(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우회로), 90년대를 통과하면서는 주요 연구자들이 모두 기성 주류 학자들을 따라 딜레탕티즘으로 선회하면서 실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구체적으로 윤평중-이진우-한상진으로 대표되는 90년대의 ‘신진 하버마스 연구그룹’에게 귀책사유가 있다고 본다. 이전 세대 한국 학자들의 딜레탕티즘은 당시 국내에 ‘학술-장’ 자체가 부재했기 때문이므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지만, 90년대에는 하버마스 방한(96년)을 전후로 하여 국내에도 일정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장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고, 신진 연구그룹의 학술적 역량 또한 자율적인 학술장을 생산해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긴 하지만, 이 책의 분석은 비단 하버마스나 이론사회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저자는 한국의 하버마스 수용 ‘실패’ 사례를 통해 궁극적으로 독립된 ‘학술-장’ 자체가 한국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한국 지성계의 문제는 서구종속이나 이론편향에 있지 않고, 정반대로 ‘서구’-‘이론’을 한 번도 제대로 수용해본 경험이 없다는 데에 있다는 진단은 꽤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적인 학술장은 사회로부터 충분히 ‘고립된 채’, 좁고 전문적인 문제에 골몰함으로써 자율성을 쟁취해야 하고, 장 내부에서의 상징투쟁을 거쳐야 비로소 ‘발전’할 수 있다는 (나아가 객관적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부르디외적인 방향설정은 대체로 동의할 만한 것이다.

이 책이 선택하고 있는 이론 틀은 과학사회학자인 니콜라스 멀린스의 ‘이론그룹 발달 모형’에서 단계와 단계 사이의 인과관계 규명이 부재한 것을 부르디외의 장 이론을 통해 보충한 것이다. 왜 한국 학계에 ‘친밀한 적대자 공동체’가 구축될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반화해서 설명하기보다 한국의 하버마스 연구그룹이 실제로 어떤 지적 경로를 취했는지를 추적하는 것으로 갈음하고 있다. 독자인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어째서 한국의 학자들은 좁고 깊은 전문적 관심사를 충분히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이것은 곧, ‘왜 유독 한국의 학계에는 ‘딜레탕티즘’과 ‘학술적 도구주의’라는 원심력이 (다른 학계보다 더) 강한가?’라는 비교정치학적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암시되고 있는 대답은 우선 그것이 80년대 한국의 ‘정세’가 남긴 상흔의 일부라는 것이다. 80년대적인 현실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학술 이론’이 아니라 ‘과학’이자 ‘종교’였다. 이 책에서도 분석하고 있듯이 소련 붕괴 이후에도 (학생)이론가 그룹은 각자의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거나 되살리고자 고군분투하거나, 아예 시민사회 운동에 헌신(김동춘-조희연-유팔무)하는 등 이른바 ‘지사형’ 지식인이 되고자 했다. 한국의 ‘학계’가 서구의 그것만큼 자율적이어야 하며 학술적 도구주의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이는 일종의 ‘문화지체’로까지 보여지는데, 당사자들에게는 민주화 이후에도 사회변혁적 요청이 학문적 자율성 획득보다 시급했을 정도로 80년대의 무게감이 남달랐던 것으로 풀이된다. 부르디외가 분석하는 68혁명기 프랑스와 비교할 때, 한국사회의 80년대는 ‘아카데미즘’이나 ‘객관성’을 논하기에 (‘광주’로 대변되는) 엄숙주의와 실천 지향의 당위론이 너무나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80년대가 문제였다면 앞으로의 전망은 비교적 밝다고 할 수 있다. 2020년대 이후 새롭게 부임하고 있는 국내 대학의 교수진은 대체로 2000년대~2010년대 초반 학번일 텐데, 이들은 80년대적인 ‘부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우며, 학문적 공정함이나 중립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실천을 우위에 둘 ‘아비투스’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의 연구자들에 의해 재구성될 학술장은 이 책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전문화된 아카데미즘’에 근접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한국만의 ‘자생적’ 학파의 탄생은 앞으로(!) 기대해 볼만 하다.

다만 새로운 세대의 연구자들에게도 딜레탕티즘의 유혹은 중대한 도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자율적인 ‘학술-장’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 학자들은 자신이 속한 영역 바깥에서 상징자본을 충당하고자 한다. 그것이 학계나 대학사회 바깥으로부터 사회적 명망이나 위신을 얻기 위해 방송에 출연해서 ‘넓고 얕은’ 지식의 전달을 반복하거나(대중화), 지식인이랍시고 사회‧정치 현안에 대한 어설픈 조언을 건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좁고 깊은’ 관심사의 지속은 어려워진다. 젊고 혈기 넘치는 내가 보기에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자기 영역 바깥의 일에 대해 훈수를 두거나 되도 않는 청소년 교양서나 집필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 일이다. 특히 대학교수가 언론 노출을 즐기는 것은 참으로 괴이한 취향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경향이 우리나라에서 유독 심한 것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만약 그렇다면 그 원인은 결국 유교적인 출세관에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우리나라는 ‘출세하려고’ 공부해온 역사가 깊은 나라다(입신양명! - 9수를 해서라도 검사가 되고자 하는 나라). ‘지금 당장’ 상징자본을 충당할 수 있는 자생적 학술장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 연구자들이 딜레탕티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면 90년대에 벌어졌던 것과 같은 ‘네트워크의 와해’를 반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분석하고 있는 90년대가 바로 지금과 같은 ‘기회’였다고 할 수 있는데, 주요 연구자들이 딜레탕티즘에 투항해 버림으로써 독자적인 ‘(하버마스)학파’의 형성을 한 세대 뒤로 미루게 된 셈이 되었다.

이 책의 분석으로부터 어떤 규범적인 교훈을 도출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사회의 전근대적인 지식인관 자체를 쇄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지식인-대학교수는 매우 국지적이고 한정된 주제에 대한 ‘전문가’이자 ‘직업인’이지, 사회적인 현안에 대해 마땅히 목소리를 내거나 다양한 주제를 두루 ‘섭렵’하고 있는 ‘총체적 지식인’이 더 이상 아니다. 유교적 전통을 따라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 무슨 출세나 입신양명의 수단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요컨대 자생적 학파를 논하기에 앞서 한국사회는 지식인에 대한 개념을 탈주술화해야 한다부르디외가 제시한 바와 같이, 지식인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학술-장이 고도로 전문화되어 충분한 자율성을 확보한 토대 위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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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인찍힌 몸 - 흑인부터 난민까지, 인종화된 몸의 역사
염운옥 지음 / 돌베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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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균형 블로그


작년에는 유독 ‘이민’, ‘정체성’, ‘인종’ 등 문화정치학의 개념어들을 다룰 일이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그것들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대중서로서 인종과 관련된 대중문화 컨텐츠 및 이슈들을 광범위하게 인용하며 ‘인종’이라는 문제적인 범주의 형성, 수행, 재생산의 과정을 추적한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이나 마치 교양강의를 듣는 듯 무척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어(실제로 저자의 대중강연이 책 집필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아주 흥미롭게 읽었고, 표지도 화려해서(?) 퍽 마음에 들었다. 중‧고등학생들을 상대로 이 책을 읽히면서 독서토론 수업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서술은 평이해서 대중교양서의 한 모범을 보여주는 듯하다(최대다수의 독자를 상대로 한 대중서를 쓰려면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아래에는 몇 가지 기억해 둠 직 한 책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다.  

19~20세기 영국의 우생학 운동사를 전공한 저자는 이 책에서 시간적 범위를 넓혀 18세기와 21세기에 재현되고 수행된 개념으로서의 인종주의를 소개한다. 인종주의의 기원은 그 출발부터 과학적인 것이라기보다 미학적인 것이었다. 18세기 린네의 분류학과 캄퍼르, 블루멘바흐의 비교인종분류학은 의외로 19세기 인종주의의 직접적 기원이 아니다. 피부색에 따른 차이를 위계화하고 백인 우월주의적 인종관을 정당화한 것은 차라리 빙켈만의 신고전주의 미학과 사진사 조셉 질리(Joseph T. Zealy)의 다게레오타입 사진들이었다. 빙켈만은 하얗게 빛나는 고대 그리스 조각을 이상적인 미술품으로 여기면서 서구의 유서 깊은 ‘색채공포증’에 미학적 근거를 제공했다. 마틴 버낼이 『블랙 아테나』에서 폭로한 바와 같이 이는 서구문화의 기원을 그리스적인 것으로부터 찾고 이집트‧오리엔트 문명과 단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9세기 인종학자 루이스 아기시(Louis Agassiz)는 사진사 조셉 질리에게 의뢰하여 ‘질리 시리즈(Zealy Series)’라고 불리는 ‘인종 샘플 사진’을 찍게 했다. 이 사진들은 유럽인의 초상화와 대조되는 모욕적인 흑인 나체 사진들로, 시각적으로 인종주의를 수행‧재생산하는 효과를 낳았다.

인종주의는 대서양 노예무역을 거쳐 20세기의 반유대주의와 유대-민족주의, 21세기의 이슬람포비아로 반복 수행된다. 대서양 노예무역 폐지에 대한 유럽의 기념문화는 정작 억압과 착취의 당사자인 흑인 노예들보다 윌버포스(W. Wilberforce) 같은, 노예들을 ‘구원한’ ‘백인’ 노예제 폐지론자에 대한 숭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에릭 윌리엄스는 이를 두고 ‘영국인들은 노예제를 폐지하기 위해 노예제를 연구한다’고 적절하게 비꼰다. 저자는 이에 맞서 사르키 바트만(사라 바트만)을 비롯한 흑인-여성-노예 당사자의 ‘목소리’를 복원하고자 한다(‘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유대인은 20세기의 대단히 문제적인 민족이다. 유럽의 오랜 반유대주의와 나치 독일의 학살을 피해 이스라엘을 건국한 유대인들은 그러나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것으로도 모자라 같은 유대민족 내부의 미즈라힘과 베타 유대인을 인종화 하며 유대-민족주의를 강화한다. 21세기의 인종주의는 ‘이슬람 포비아’로 나타난다. 9.11 테러 이후 이슬람 정체성이 ‘안보화’되어 유럽 내 이슬람 혐오가 확대되었고, 이는 ‘브레이비크 사건’과 같은 혐오범죄로 이어졌다. 이슬람 여성들의 ‘베일’과 관련된 유럽 내의 논란은 ‘몸’에 대한 낙인이 비단 생물학적인 의미의 ‘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끝으로 이 책은 한국의 이주노동자 문제를 언급, 한국도 인종주의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상기하며 마무리된다.

 

(쓰다 보니 또 길어지는데) 번외로 한 가지 정리해둘 것은 ‘디아스포라’와 ‘다문화주의’라는 개념어의 문제성에 대한 것이다. 두 개념 모두 얼핏 듣기에 마치 세계 여러 나라의 다종다양한 문화에 대한 존중을 반영한, ‘문화 상대주의’ 정신을 담은 포용적인 개념들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내가 보기에 여기엔 21세기 버전 민족주의의 ‘연성화 된’ 부활이라는 문제적인 맥락이 숨어 있다.

‘디아스포라’는 영토 국가에 국한되지 않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한 탐색이다. ‘우리 민족’이 ‘원래는 모여 있었으나’ 어떤 비극적 계기로 인해 ‘흩어졌으니’ 마땅히 ‘다시 모여야 한다’는 뉘앙스를 상상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셈. 물론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문학 비평에서 쓰일 때에는(‘디아스포라 문학’) 기존의 유럽 중심적인 ‘민족문학’으로부터 벗어나 민족 범주에 묶이지 않는, 목소리를 잃었던 경계선 상의 존재들, 타자들, 이방인들, 소수자들의 서사를 구축해보자는 해방적이고 저항적인 맥락이 있지만 현실에서 수용되는 방식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최근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나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은 ‘타지에 가서 고생하는 우리 한국인들’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국내에서 수용되는 방식은 딱 그 수준인 것으로 보인다). 같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인 조선족이 대중매체에서 묘사되는 방식을 떠올리면 그와 같은 ‘글로벌 핏줄 찾기’의 노력이 배타적 민족주의의 또다른 이름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것이 가장 악마적으로 구현된 사례는 물론 유대인들의 시오니즘 운동과 이스라엘 건국이었을 것이다. 또 최근 중국이 중화민족주의를 내세우며 ‘글로벌 중화민족 찾기(만들기)’에 나선 것도 의미심장하다. 결국 오늘날 현실에서 ‘디아스포라’는 민족의 요건을 완화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을 ‘우리 민족’으로 포섭하려는 국민국가들의 인적 자본 동원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지닌 이들에 대한 호명이, 특정한 맥락에서는 외세에 의해 강제로 흩어져야 했던 민족의 희생자 의식을 자극한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다문화주의는 더욱 명백하게 문제적이다. 다문화주의는 정체성에 대한 ‘문화적 인정(투쟁)’에 기반한 새로운 시민권 모델로, 기존의 자유주의적 시민권 모델에 대한 공동체주의적 대안으로 90년대에 서구사회에서 일찍이 제안되고 시도된 바 있다. 그러나 다문화주의가 유럽에서 잇따라 실패하면서 (논쟁의 여지가 다소 남아있지만) 2000년대 이후 다시 권리와 의무의 체계에 입각한 자유주의적 시민권 모델을 보다 포용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선회하는 추세다. 이러한 경향은 다문화주의가 지닌 정치철학적 난점들 속에 예비된 것이었다. 다문화주의는 ‘문화적 인정’에 집중하는 바람에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의 기조 속에서 ‘계급적 분배’의 문제를 주변화 한다. 가령 이주노동자 문제를 ‘계급 문제’가 아닌 ‘다문화 문제’로 간주하는 것은 이주노동자 문제의 계급정치적 맥락을 은폐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다문화정책’이 (이주노동자의 권리 보장이 아닌)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온정주의적 배려(?) 및 혼혈청소년들의 동화주의적 적응에 초점을 두고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다문화주의 모델 자체의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사실 이주민 이슈를 한국사회의 인구 부족 문제와 연결짓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다 - 결혼이주여성들이 '한국인을 더 만들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한 다문화주의는 문화적 정체성에 기반하여 권리를 승인하고자 하다 보니 권리의 주체인 이주민들을 특정한 문화적‧종족적 정체성에 종속시킬 위험이 있다. 결국 다문화주의 모델은 ‘우리-문화’와 ‘그들-문화’에 대한 본질주의적 구별 짓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드러운’ 버전의 은폐된 민족주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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