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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영화 <머드>를 보고 왓챠 한 줄 평으로 이렇게 썼다. "성장은 사랑을 잃고 나서 시작한다."
『보라색 히비스커스』에서 '잃음'을 인정하고 그 값을 온전히 책임진 사람은 자자다. 캄빌리가 자자와 눈으로 읽는 대화를 하지 못한 건 어쩌면 교도소 면회에서가 아니라, 은수카에서부터 일지도 모른다. 자자가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발견하고, 자기 삶의 터전에 그 뿌리를 내리게 하고, 건강하도록 애쓰며 가꾸던 그때 말이다. 그때부터 자자는 '잃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조금씩 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자자는 보라색 히비스커스에 집착한 걸까. 붉은색 히비스커스가 정원을 점령하고 있는 아버지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정원을 불태우는 기름이 필요한 게 아니다. 높은 담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쇠 파이프가 아니다. 자자가 생각한 혁명은 세계의 구성원으로 들어와 점진적으로 세계를 변모시키는 것이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혁명인 셈이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발견한 자자는 붉은색 히비스커스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이것을 더 넓게 퍼뜨리고 가꾸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은수카에서 정원 가꾸는 것에 몰두한 그의 모습에서 이러한 생각을 얼핏 엿볼 수 있다.
그에게 보라색 히비스커스 한 줄기는 구체적인 희망의 상징이다. 흙에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현실적인 혁명의 방안이다.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고모의 영향으로 자자와 캄빌리에 비해 성숙하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넓은 아마카나 오비오라의 이상적이고 무책임한 말과는 대조적이다. 결국 이러쿵저러쿵 말만 많지, 아마카와 오비오라는 나이지리아를 떠날 수 있는 지식인 엄마의 품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잃음'이 부재한 성장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한계가 있다.
이와 반대로 자자는 자신이 누리던 것을 잃을 각오를 하고 아버지 유진에게 반기를 든다. 허상의 말만 하지 않고 실행 가능한 계획을 세운다. 약해진 아버지의 틈을 노리고 의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계획을 도와준다. 그리곤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온전히 자신이 짊어지고, 어머니와 여동생의 삶에 구원의 빛을 선사한다. 마치 예수의 희생처럼.
"… 웃음소리가 내 머리 위를 떠다녔다. 대개 대답을 구하지도 않고 얻지도 못하는 말들이 모두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우리 집에서는, 특히 우리 집 식탁에서는 항상 목적 있는 말만 했지만 사촌들은 그냥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는 것 같았다."
이에 반해 캄빌리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성장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캄빌리는 아버지 유진을 극복하지 못했고, 새로운 정신적 아버지인 아마디 신부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든다. 캄빌리에게 또 하나의 규율이 생긴 것이다. 때문에 처음으로 오빠랑 함께 은수카와 미국에 가고 싶다는 자기 선택적 발언을 하는 마지막의 모습조차, 이페오마 고모의 발자국을 똑같이 밟아가려 애쓰는 과거의 그녀 모습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정신적 성장은 부재한 채, 육체적 성장만 하여 곁의 어머니가 기댈 수 있는 어깨를 제공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캄빌리의 시선에서 말하는, 일인칭 소설이지만 캄빌리는 이야기에서 철저하게 관찰자 입장이다. 그녀는 시종일관 인물들의 말을 듣기만 하고, 그 말을 자신이 해서 다른 누군가를 기쁘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아마카의 얄미운 행동들에 '그러지 말지'라는 말을 속으로 되뇔 뿐, 절대 적극적으로 대화에 개입하거나 사건에 휘말리지 않는다. 어쩌면 아다치에 작가가 주인공을 캄빌리로 정했지만, 자신을 직접 투영시킨 인물은 자자일 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내가 읽은 소설과 영화를 통틀어 가장 입체적인 인물은 아버지 유진이다. 가족을 학대할 때는 강압적인 가부장의 모습이 보이다가도, 학대가 끝나면 갑자기 눈물을 쏟으며 진심 어린 연민을 표하고 가족의 고통에 공감하기 시작한다. 그순간 그가 선택하는 해결책은 하느님 아버지의 전지전능한 힘이다. 뺨에 난 자국도, 발에 난 화상도, 비틀린 손가락도 모두 하느님의 힘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눈물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악어의 눈물로 치부하기에 그는 진심으로 슬퍼해서 독자를 난감하게 만든다.
이렇게만 보면 이중인격의 삶인데, 아다치에 작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진보 신문지 <스탠더드>의 발행인으로서, 정부 고위직들의 부정부패를 신문사 직원들이 거리낌 없이 까발리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그러니까 그는 정치적으로 진보적 스탠스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자본주의로 벌어들인 재물을 사회주의식 분배로 동네 이웃들뿐만 아니라, 친척과 고향 사람들까지 도움을 준다. 그는 팍팍한 나이지리아 땅에 내려온 하느님의 심부름꾼인 걸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세 명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참고 견뎌야 하는 고행이 아닐까.
마치 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속 지하실에서 홀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소녀의 희생 위에 건설된 지상낙원 오멜라스처럼 말이다. 고향 어른들이 자자와 캄빌리에게 "그런 아버지 밑에 태어나다니 너희는 정말 운이 좋은 거야."라는 말을 읽자마자 이 무슨 개떡같은(?) 저주인가 싶지만, 그 어른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진심이니, 누구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한 번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몇 번 시도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민주 정치를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마치 오늘날의 민주 국가들은 처음부터 잘했던 것처럼. 그것은 걸음마를 떼려다 엉덩방아를 찧는 아기에게 가만있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치 그 아기를 앞질러 가는 어른들은 기어 다녔던 시절이 없는 것처럼."
부딪치고 넘어지고 상처가 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고 삶을 옥죄던 거대한 누군가로부터 벗어날 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작은 우리에 비해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성장도 사람의 성장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보통의 평범한 우리가 국가 성장까지 생각하기에는, 그럴 능력도 여유도 없다.
다만,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정도는 과거에 잃었던 것들에 작별 인사를 하며 보낼 수 있는 현재의 용기다. 그리고 그러한 잃음을 통해 나와 같이 성장한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잃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성장할 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 곧 내릴 새로운 비를 맞이할 수 있다.
그것은 건축가가 성당이 아니라 주거용 건물을 설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처럼 생긴 집이었다. - P43
그런 아버지 밑에 태어나다니 너희는 정말 운이 좋은 거야. - P133
"캄빌리, 음식이 입에 안 맞니?" 이페오마 고모가 이렇게 물어서 깜짝 놀랐다. 그 자리에 내가 없는 것처럼, 그저 아무 때나 누구한테나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식탁, 자기가 원하는 만큼 숨 쉴 수 있는 식탁을 내가 관찰 중이라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53
"저건 히비스커스죠, 고모?" 오빠가 철조망에서 가까운 나무를 쳐다보며 물었다.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있는지 몰랐어요."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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