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메리카나』 속 인물들이 고향을 떠나간 곳은 제각각이지만, 떠난 이유는 비슷하다.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기 위해서. 방점은 '드림'에 찍혀 있으니, 갈 곳이 굳이 '아메리카'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드림은, 꿈은 대체 무엇일까. 왜 그들은 이곳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그곳에서의 삶을 동경하는 것일까.

… 나중에 그 자리를 떠나며 이페멜루는 디케를 생각했다. 디케가 대학에 가면 ASA(아프리카인 학생협회)에 참석할까, BSU(흑인 학생회)에 참석할까. 남들은 그를 미국계 아프리카인으로 생각할까,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생각할까 궁금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되레 남들이 그가 누구인지를 선택해 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한 『아메리카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소설이다. 인간이 어떤 색깔의 피부를 가지든, 어느 나라에서 왔든, 어떤 언어를 쓰든 간에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한 인간이 과연 정체성을 스스로 소유하고 있느냐는 것 말이다. 정체성이 있는 인간과 없는 인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외력에 견디는 내력의 유무일 것 같다. 그러니까 외력이 가해질 때(그것이 개인이든, 사회이든, 국가이든), 개인의 내부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내력이 있는 인간은 흔들릴 수는 있어도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주저앉기는 하더라도 그게 끝은 아닐 것이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은 내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페멜루에게 정체성은 헤어스타일일 수도 있고, 남들이 발음하기 힘들어하는 이름일 수도 있고, 자기 언어로 하나하나 써 내려간 블로그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것은 아마도 사랑일 것 같다. 이페멜루는 사랑의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쌓아갔다. 쌓인 정체성이 때로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장벽의 역할을 하며 방해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다. 결국 아다치에 작가가 생각한 정체성은 외부에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온전한 내부에서 시작하여, 내부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이 타향이라면,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건 흔들리더라도 버틸 수 있는 내력일 것이다.

… 이페멜루는 훗날 알게 될 것이다. 킴벌리의 눈에 빈민들은 죄가 없다는 것을. 가난은 빛나는 것이었다. 가난이 빈민들을 성스럽게 만들어 줬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을 사악하거나 더럽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성인은 외국인 빈민들이었다.

『보라색 히비스커스』에서의 성장을 『아메리카나』에서도 할 수 있을까. 성장통이 성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그러므로 아픔의 값만큼 성장의 값이 결정된다는 말이라면, 이페멜루에게 우리는 함부로 성장통이라는 말 할 수 없다. 이페멜루가 미국에서 겪었던 고통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겪은 그녀를 위로한답시고, 그 덕에 네가 이렇게 성장하지 않았냐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고통을 가하는 구조를 탓하지 못하는 비겁함이다. 고통의 가해는 외면한 채, 고통의 피해만 신성시하는 모순이다. 마치 킴벌리처럼.

… "제 생각에 이 나라의 계급은 사람들이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것 같아요. 모두가 자기 위치를 알죠. 심지어 계급 사회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어떤 식으로든 자기 위치를 받아들이고 있어요."

미국으로 갔던 이페멜루는 결국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자신의 악센트를 쓰며, 공들인 땋은 머리를 하고, 자신의 이름을 간직한 채 말이다. '나이지리안'으로 미국으로 간, 이페멜루는 '아메리카나'가 되어 미국에서 왔다. 낯선 것이 익숙해졌고, 익숙했던 것이 낯설어졌다. 이페멜루는 아직도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녀가 문을 열고 타인을 맞아들이는 결말은 지독히도 흔들렸던 수많은 사실들을 독자들이 알기에, 깊은 의미가 있다. 비록 영화 <프란시스 하>에서의 프란시스의 접힌 이름이 주는 뭉클함은 덜하지만. 숨 쉬는 공기처럼 당연한 것들에 당연하지 않다고 분노하며 부딪쳐 온 이페멜루이기에, 우리는 함부로 그녀를 비난할 수 없다. 현실에 안주했다고 지적할 수 없다. 결국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그저 그런 나이지리아 여성의 삶을 사는 것 아니냐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페멜루'가 돌아왔으니까 말이다(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을 차용했다).


"내가 볼 때 너는 지금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같아." 이페멜루는 고개를 저으며 차창 쪽으로 돌렸다. 우울증이란 모든 것을 병으로 돌림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미국인들에게만 있는 것이었다. - P267

그는 나이지라아에 가지 않은 지 오래됐기 때문에 그런 온라인 그룹의 위로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들 사이에서는 사소한 의견도 금방 가열되어 비난으로 돌변하는가 하면 인신공격이 오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페멜루는 글쓴이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미국의 허름한 집에 살면서, 일만 하며 죽은 듯이 사는 나이지리아인들. 그들은 열심히 모은 저금을 간직했다가 12월에 일주일 동안 고향에 돌아갈 때 쓰는데 그때 신발과 옷과 싸구려 손목시계로 가득한 여행 가방을 몇 개씩 들고 도착하면 친척들의 눈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인터넷에서 고국에 대한 속설을 놓고 다른 사람들과 설전을 벌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에게 고국은 이곳도 저곳도 아닌 흐릿한 추상적 공간이 되었고 적어도 인터넷상에서는 자신이 하찮은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1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외력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내력을 쌓아가는 인간은 사랑의 힘이 있기에 외롭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머드>를 보고 왓챠 한 줄 평으로 이렇게 썼다. "성장은 사랑을 잃고 나서 시작한다."

『보라색 히비스커스』에서 '잃음'을 인정하고 그 값을 온전히 책임진 사람은 자자다. 캄빌리가 자자와 눈으로 읽는 대화를 하지 못한 건 어쩌면 교도소 면회에서가 아니라, 은수카에서부터 일지도 모른다. 자자가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발견하고, 자기 삶의 터전에 그 뿌리를 내리게 하고, 건강하도록 애쓰며 가꾸던 그때 말이다. 그때부터 자자는 '잃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조금씩 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자자는 보라색 히비스커스에 집착한 걸까. 붉은색 히비스커스가 정원을 점령하고 있는 아버지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정원을 불태우는 기름이 필요한 게 아니다. 높은 담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쇠 파이프가 아니다. 자자가 생각한 혁명은 세계의 구성원으로 들어와 점진적으로 세계를 변모시키는 것이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혁명인 셈이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발견한 자자는 붉은색 히비스커스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이것을 더 넓게 퍼뜨리고 가꾸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은수카에서 정원 가꾸는 것에 몰두한 그의 모습에서 이러한 생각을 얼핏 엿볼 수 있다. 


그에게 보라색 히비스커스 한 줄기는 구체적인 희망의 상징이다. 흙에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현실적인 혁명의 방안이다.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고모의 영향으로 자자와 캄빌리에 비해 성숙하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넓은 아마카나 오비오라의 이상적이고 무책임한 말과는 대조적이다. 결국 이러쿵저러쿵 말만 많지, 아마카와 오비오라는 나이지리아를 떠날 수 있는 지식인 엄마의 품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잃음'이 부재한 성장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한계가 있다.


이와 반대로 자자는 자신이 누리던 것을 잃을 각오를 하고 아버지 유진에게 반기를 든다. 허상의 말만 하지 않고 실행 가능한 계획을 세운다. 약해진 아버지의 틈을 노리고 의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계획을 도와준다. 그리곤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온전히 자신이 짊어지고, 어머니와 여동생의 삶에 구원의 빛을 선사한다. 마치 예수의 희생처럼.


"… 웃음소리가 내 머리 위를 떠다녔다. 대개 대답을 구하지도 않고 얻지도 못하는 말들이 모두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우리 집에서는, 특히 우리 집 식탁에서는 항상 목적 있는 말만 했지만 사촌들은 그냥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는 것 같았다."


이에 반해 캄빌리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성장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캄빌리는 아버지 유진을 극복하지 못했고, 새로운 정신적 아버지인 아마디 신부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든다. 캄빌리에게 또 하나의 규율이 생긴 것이다. 때문에 처음으로 오빠랑 함께 은수카와 미국에 가고 싶다는 자기 선택적 발언을 하는 마지막의 모습조차, 이페오마 고모의 발자국을 똑같이 밟아가려 애쓰는 과거의 그녀 모습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정신적 성장은 부재한 채, 육체적 성장만 하여 곁의 어머니가 기댈 수 있는 어깨를 제공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캄빌리의 시선에서 말하는, 일인칭 소설이지만 캄빌리는 이야기에서 철저하게 관찰자 입장이다. 그녀는 시종일관 인물들의 말을 듣기만 하고, 그 말을 자신이 해서 다른 누군가를 기쁘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아마카의 얄미운 행동들에 '그러지 말지'라는 말을 속으로 되뇔 뿐, 절대 적극적으로 대화에 개입하거나 사건에 휘말리지 않는다. 어쩌면 아다치에 작가가 주인공을 캄빌리로 정했지만, 자신을 직접 투영시킨 인물은 자자일 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내가 읽은 소설과 영화를 통틀어 가장 입체적인 인물은 아버지 유진이다. 가족을 학대할 때는 강압적인 가부장의 모습이 보이다가도, 학대가 끝나면 갑자기 눈물을 쏟으며 진심 어린 연민을 표하고 가족의 고통에 공감하기 시작한다. 그순간 그가 선택하는 해결책은 하느님 아버지의 전지전능한 힘이다. 뺨에 난 자국도, 발에 난 화상도, 비틀린 손가락도 모두 하느님의 힘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눈물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악어의 눈물로 치부하기에 그는 진심으로 슬퍼해서 독자를 난감하게 만든다.


이렇게만 보면 이중인격의 삶인데, 아다치에 작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진보 신문지 <스탠더드>의 발행인으로서, 정부 고위직들의 부정부패를 신문사 직원들이 거리낌 없이 까발리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그러니까 그는 정치적으로 진보적 스탠스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자본주의로 벌어들인 재물을 사회주의식 분배로 동네 이웃들뿐만 아니라, 친척과 고향 사람들까지 도움을 준다. 그는 팍팍한 나이지리아 땅에 내려온 하느님의 심부름꾼인 걸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세 명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참고 견뎌야 하는 고행이 아닐까. 


마치 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속 지하실에서 홀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소녀의 희생 위에 건설된 지상낙원 오멜라스처럼 말이다. 고향 어른들이 자자와 캄빌리에게 "그런 아버지 밑에 태어나다니 너희는 정말 운이 좋은 거야."라는 말을 읽자마자 이 무슨 개떡같은(?) 저주인가 싶지만, 그 어른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진심이니, 누구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한 번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몇 번 시도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민주 정치를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마치 오늘날의 민주 국가들은 처음부터 잘했던 것처럼. 그것은 걸음마를 떼려다 엉덩방아를 찧는 아기에게 가만있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치 그 아기를 앞질러 가는 어른들은 기어 다녔던 시절이 없는 것처럼."


부딪치고 넘어지고 상처가 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고 삶을 옥죄던 거대한 누군가로부터 벗어날 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작은 우리에 비해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성장도 사람의 성장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보통의 평범한 우리가 국가 성장까지 생각하기에는, 그럴 능력도 여유도 없다. 


다만,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정도는 과거에 잃었던 것들에 작별 인사를 하며 보낼 수 있는 현재의 용기다. 그리고 그러한 잃음을 통해 나와 같이 성장한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잃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성장할 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 곧 내릴 새로운 비를 맞이할 수 있다.



그것은 건축가가 성당이 아니라 주거용 건물을 설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처럼 생긴 집이었다. - P43

그런 아버지 밑에 태어나다니 너희는 정말 운이 좋은 거야. - P133

"캄빌리, 음식이 입에 안 맞니?" 이페오마 고모가 이렇게 물어서 깜짝 놀랐다. 그 자리에 내가 없는 것처럼, 그저 아무 때나 누구한테나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식탁, 자기가 원하는 만큼 숨 쉴 수 있는 식탁을 내가 관찰 중이라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53

"저건 히비스커스죠, 고모?" 오빠가 철조망에서 가까운 나무를 쳐다보며 물었다.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있는지 몰랐어요." - P16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잃은 것들에 작별 인사를 하는 순간,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세 살의 여름
이윤희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게 열세 살은 축구와 동방신기와 NRG와 <풀하우스>와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시리즈가 전부다.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재밌게 본 것도 있지만, 내 기억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유는 <반지의 제왕> 캐릭터 중에 하나인 김리라는 난쟁이 때문이다. 『열세 살의 여름』 속 우진이처럼, 열세 살의 나도 같은 반 친구를 좋아했었고, 그 친구에게 김리라는 별명을 붙이며 놀렸었다. 이유는 단지, 그 친구 머리가 붉은색이고 키가 나보다 작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초등학교에서 놀림당하는 친구의 대부분이 그럴 것인데, 놀림의 리액션이 좋은 사람들이 있다. 김리도 그랬다. 사소한 장난에 화들짝 놀래고, 늘 웃으면서 내게 반격하고, 무엇보다도 대화 코드가 나와 잘 맞았었다.

비가 오지 않아야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남자 애들은 비 오는 날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비 맞으면서 축구하는 것을 더 좋아했지만, 비 오는 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면 수위 아저씨에게 엄청 혼났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는 것도 좋아했지만, 비가 와서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날에도 내심 좋았었다. 그날은 김리랑 김리 친구들이랑 같이 수다를 떠는 날이었으니까. 김리는 동방신기 멤버 중에 영웅재중을 좋아했었던 것 같은데, 반복되는 나의 놀림 레퍼토리 중 하나가 바로 영웅재중이 뭐가 잘생겼냐는 것이었다(제가 뭐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했을까요. 카시오페아 여러분들, 죄송합니다). 그러면 김리는 대번에 화를 내며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김리의 화난 표정이 재밌었고, 이내 내가 놀리고 있는 걸 알고 웃으면서 대화를 이어 가는 김리의 성격이 좋았다.

1년 내내 그렇게 재밌게 지냈으면 참 좋은 추억만이 남았을 텐데, 어리석게도 나는 2학기 학예회 연습하던 날, 사고를 쳤다. 당시에 나는 난타를 연습 중이었는데, 연습실이 1층에 있었다. 월요일 아침 조회 시간 전에 미리 모여 난타를 한참 연습하고 있었는데, 남자 애들끼리 있을 때 나타나는 특유의 자존심 싸움이 발동되었다. 내가 김리를 좋아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밝히자,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이 고백을 안 하면, 남자도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면서 분위기를 몰았다. 어리석은데, 자존심만 셌던 당시의 나는 연습실 창문을 열고, 아침 조회를 위해 운동장에 모이는 학생들 중에서(아마도 전교생이 모이는 것 같았는데) 김리를 발견하고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

"000, 사랑한다고!"

그 이후에 벌어진 무안하고 민망하고 어색한 상황은 상상에 맡기겠다. 그 후로 졸업식까지 김리와는 말도 안 하고 어색하게 헤어졌다. 그게 김리와의 마지막이었다.

만화책을 읽고 나서 감상평을 써야 하는데, 나의 재미없는 추억을 주저리주저리 떠든 이유는 뭘까. 왜 책을 읽고 나서 책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걸까. 주책맞게 벌써 나이가 먹은 걸까. 그래, 그때 그랬지. 참, 좋은 시절이었어, 뭐 이런 거? 아니, 그렇다기보다 『열세 살의 여름』 이 독자에게 주는 묘한 기운이 있는 것 같다. 새로 나온 영화가 있는지, 다음 만화책이 반납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들락거리던 비디오 가게와 피아노는 여자만 치는 거라고 생각하며 배우지는 않았지만 친구를 기다린다고 갔었던 피아노 학원과 이상한 것들이 잔뜩 들어 있던 책상 서랍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우리에게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르니까.

안타깝게도 나는 해원이나 산호처럼 열세 살의 여름 방학 때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우리 집은 가게를 했으니까 어디 놀러 가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그 더운 시간을 무얼 하며 보냈을까. 그래서 해원이와 산호가 부럽다. 열세 살만 할 수 있는 사랑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열세 살의 여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부질없는 말일 테지만, 나의 열세 살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그토록 싫었던 일기를 아주 꼼꼼히 쓰고 싶다. 날씨는 당연하고, 무얼 먹었고, 엄마 기분은 어땠는지, 아빠는 몇 시에 가게를 나갔는지, 동생은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했는지, 어떤 친구를 좋아했는지를 모두 기록하고 싶다. 단지 그거면 된다. 그리고 스물여덟 살의 내가, 열세 살의 나에게 묻고 싶다. "그곳의 여름은 안녕하신가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마음속을 괴롭히는 게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마. 그 마음하고 막 싸우고 왜 그런지 물어보고 따져 보고. 그래야 네가 거기서 배우게 될 거야." - P340

중학교에 올라가면 다들 헤어지게 되겠지? - P357

그날은 내가 피아노 학원을 마지막으로 간 날. 그리고 산호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 P4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