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
기타노 다케시 지음, 김영희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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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타노 다케시. 그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기타노 다케시가 메가폰을 잡고 주연을 맡았던 영화 ‘소나티네’의 마지막 장면이다. 모든 감정이 배제된 아니 모든 감정이 소멸된 듯한 표정으로 다른 야쿠자들을 향해 총을 난사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갖다 대고 마치 탄창이 비어 있는 권총을 가지고 장난이라도 치는 듯한 표정으로 방아쇠를 당기던 바로 그 장면. 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은 그의 영화 소나티네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장난인 듯, 총알이 없는 총의 방아쇠를 당기듯 독자들을 향해 장난스럽게 총구를 들이대었지만 실상은 실탄이 장전된 총으로 난사하고 있다. 위협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는 장난이나 농담이 아닌 진담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소나티네와 책 <위험한 일본학>의 차이가 있다면 영화에서는 총알이 장착된 권총으로 난사를 가했다면 <위험한 일본학>은 언어를 총알 삼아 권총 대신 책을 통해 독설을 난사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의견들을 모두 폄하하거나 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일정 부분 공감하기도 했고 공통의 관심사가 발견되기도 했으니까. 이를테면 미국의 행태를 일본 야쿠자의 행태에 비유하면서 애초에 미국과 일본은 동등하고 독자적인 외교가 불가능한 구조임을 비판하는 대목이 그러했다. 또한 일본인이 불행한 원인 중 하나를 제대로 된 국회의원이 없기 때문이라는 조소에서도 피식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도 더 이상 설자리가 없는 가여운 아버지들의 대한 근심, 땅바닥으로 떨어진 선생님의 권위, IT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양산되고 있는 경제적 불균형과 양극화, 정보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처지에 대한 염려 등, 일정 부분 공감했고 어느 정도 소통이 되는 부분들이 있었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생각들, 의견들, 독설들을 그저 웃으면서 읽어내려 갈 수만은 없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 않고, 용서되지 않고, 용서하고 싶지 않은 저열하고 편협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사고들에 대해서는 공감할 도리가 없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행위들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는-반성은커녕 히틀러에 비해 한심한 무리로 치부해버리는 연합국에 대한 그의 짤막한 의견 속에서 기타노 다케시가 받아들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 야망에 대한 그의 생각을 가늠해 볼 수 있다-그의 뻔뻔스러움이 놀랍다. 그가 만들어 낸 일명 ‘다케시 내각’의 연설을 잠시 들여다볼까. 중국과 한국이 역사교과서 같은 문제로 항의를 해오면 외교를 끊어버리면 그만이고, 러시아가 북방영토를 반환하지 않으려 하면 대사와 기업을 전부 철수시키면 된다. 모든 나라와 사이좋게 지낼 필요는 없으니 그저 의존할 수 있고 신용할 수 있는 나라와 긴밀하게 사귀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다케시 내각 곧 기타노 다케시의 사고회로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떨어지고 그에 비해 아이들의 위상은 점점 높아져 아이들이 거만해지다 못해 끔찍한 사건을 일으키게 된 것의 근원적인 이유로 전후 민주주의와 남녀평등교육 탓이라는 다케시의 의견에 대해 다시 한 번 실소를 금치 못한다. 기껏 이 의견에 대한 근거로 ‘어머니의 폭주’라는 당치않은 표현과 함께 예로 든 것은 보험금을 타기 위해 친자식을 죽이려다 체포된 한 여성의 사건이다. 개인적으로, 많은 오류들 가운데 가장 위험하고 가장 치졸하다고 생각하는 대표성을 결여한 사례를 근거로 삼고 일반화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기타노 다케시는 즐겨 사용한다. 아직 이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어머니가 지극히 많고도 많다는 사실을 그가 정말 모를까.



얼마 전 기사에서 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을 두고 제목을 <위험한 다케시>로 지었어야 맞다는 기사를 보았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위험한 일본학>의 서두에서 다케시는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은 언제나 다양한 얼굴을 한 ‘불행’이며, ‘행복’은 언제나 아주 먼 과거에만 있는 것이란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영화 소나티네와 그의 저서 <위험한 일본학>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 채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이러한 관념과 사고들은 결국 스스로에게서 행복을 저 멀리 떼어놓는 결과를 낳고 있으니까. 이 책의 제목은 <위험한 다케시>보다는 <불행한 다케시> 내지는 <불쌍한 다케시>라고 지었어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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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생활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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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에 득실거리던 도둑고양이들은 씨가 말랐다. 이북 사내들이 그물과 덫으로 도둑고양이들을 잡아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이라든가 동네 공터 등에서 껍질을 벗기고 구워서 술안주로 삼았기 때문이다.(…)그들이 그러고 있는 광경이 어느 가위 눌림보다 괴로웠기 때문이다.(…)다만 그 어른들의 면면과 취향이 다소 바뀐 것뿐인데 이남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난 자화상에 언제나 그랬듯 오리발을 내밀고는 역겨운 엄살들을 떨었다. (76-77쪽)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통일되었다. 혹은 남조선과 북조선이 통일되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주체사상, 북한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남은 건 허망함과 분노, 모멸감으로 가득한 북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을 증오하고 무시하는 남한 사람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챙기려 드는 사람들과 더 이상 생각이라는 걸 거부하게 된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 의해 흡수 통일된 한반도’라는 설정 아래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응준이 그려내고 있는 통일 한반도, 통일 대한민국은 바로 디스토피아(dystopia)의 세계. 조지 오웰이 그려낸 <1984년>보다 잔인하고 끔찍하고 참담하며 헉슬리가 그려낸 <멋진 신세계>보다 차갑고 쓸쓸하고 현실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남다른 의미이자 여타의 디스토피아 소설과 차이를 둘 수 있는 것은 바로 통일 한반도라는 배경 아래 설정된 남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間隙의 리얼함이다.



“함경도에서는 결혼식 날 신부 집에서 신랑 밥 속에 삶은 계란을 묻어 둡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그 삶은 계란을 남겨 주는 양을 보고 신랑이 신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짐작하는 거죠. 신랑 집에서도 그래요. 신부 밥 속에 삶은 계란을 넣어 두고 신부가 식사를 마쳤을 때 그 계란의 남은 모양을 확인한 다음에야 신랑이 식사를 시작해요.”
(…)이북 사람들과 이남 사람들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서로가 서로의 신랑과 신부가 됐더라면 이런 나라이진 않을 텐데. 돈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음만은 분단이 되지 않았을 텐데. (203-204쪽)
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 2009년 5월 23일 대한민국에서는 너무나 참담한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는 비통함에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누군가는 쾌재를 불렀을 것이며, 누군가는 무관심으로 일관했을 것이다. 문제는, 나라의 큰 어르신이 스스로 목숨을 거두어 국민장을 치루고 있는 이때에 한민족임을 자처하는 그들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발사하는 모습을 보며 과연 서로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처럼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회의 더불어 분노하고 있는 나 스스로의 모습이다. 그네들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던 서방과 우리나라의 경제 제재행태를 두고 비윤리적, 반인권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이토록 황망한 때에 동해 바다를 향해 미사일을 쏘아대는 그들 역시 비도덕적, 반사회적이라고 비난하고 싶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삶은 계란을 남겨 주는 함경도의 신랑과 신부처럼...너무나 난해하고 멀고도 험난한 문제이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변화 그 자체였다.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 존재가 강하고 아름다워진다는 이야기였다. 작은 알이 거대한 물고기가 됐다가 또 거대한 새가 되는 변화. 거대한 새란 자기를 초월해 위대한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자다. (212쪽)
혁명, 폭동, 전쟁...저자 이응준은 주인공 ‘리강’의 입을 빌려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해악한 것이며 부질없는지를 설명한다. 『폭동의 본질은 동기가 아니라 증오의 폭발 그 자쳅니다. 심지어는 국가와 국가끼리의 전쟁도 그래요. 전쟁 전에는 명분을 들먹이지만 전쟁이 진행되다 보면 명분 따윈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깨닫죠. 그냥 작동되는 겁니다. 폭력이라는 게 원래 그래요.』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다. 폭동이나 전쟁이 아닌 사소하고 작은 것으로부터의 변화.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다급하게 재촉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러한 때에 자중해 줄 수 있는 그들의 변화를 바란다. 다섯 살 아이가 밝힌 촛불을 범법 행위로 몰아붙이고 스스로 끄게 만드는 편협하고 옹졸한 마음이 아닌 그 아이를 목마 태웠던 부모에게 길을 열어주는 따뜻하고 넓은 마음으로의 변화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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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기행 1
후지와라 신야 지음,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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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신야의 여행관은 독특하고 남다르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즐거움보다는 깊은 사색과 구도를, 화려하고 정돈된 관광지보다는 뒷골목의 거친 손과 주름진 얼굴에 더 관심이 많다. 그렇다고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처럼 고상하지도 목가적이지도 않은, 오히려 각 나라마다의 윤락가를 찾아 헤매며 창녀들의 사진을 찍어대고, 환락가에서의 일화를 거침없이 소개하는 다분히 세속적인 여행자다. 신야의 여행 에세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 속에 자리한 섬세한 구도의 자세를 발견하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후지와라 신야의 <동양기행>은 성(聖)과 속(俗)이 극단적으로 양분화 되어 있다고 표현할 수 있겠으며 아마도 이러한 성과 속의 양분화적 태도가 동양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더 나아가서 동서양을 막론한 모든 인간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모습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마리의 발정난 곤충이었다’라며 서슴없이 마초적 발언을 내뱉으면서, 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나비의 시체가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여행지가 바뀌고만다는 이 여행자를 덮어 놓고 미워할 수가 없다. 한국의 뒷골목 윤락가에서 벌어졌던 창녀들과의 일화를 몇 페이지에 걸쳐 주절거리는 이 일본인에게 적지 않은 분노를 느끼면서도 우리도 잘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판소리를 듣고 감동하고, 서울의 겨울 거리를 ‘영혼’이라고 표현하는 이 일본인 여행자를 더러운 왜놈이라고 치부해버리지만도 못하겠다.



14년 전쯤 그러니까 대략 중학생이었을 때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 방랑>이라는 책을 접했을 때의 신선함과 충격이 되살아난다. 요즘에야 서점에만 가면 눈에 밟히는 책이 여행 관련서적이고 그 종류도 다양하고, 그 나라도 다양하고, 각각의 여행가들마다의 글을 쓰는 스타일도 가지각색이고, 사진도 화려하고 세련되지만 그 때만해도 여행서적이라 하면 제목이 <미국>, <중국> 등의 나라 이름들이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는 두터운 책자에 도표화 되어 있는 열차시간표, 호텔 전화번호, 관광지의 약도와 간략한 설명, 증명사진만한 크기의 청흑백 사진과 그림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렇듯 무미건조한 여행관련 서적들 사이에서 신야의 인도 방랑은 단연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사실전달과 도표, 통계에 치우치기보다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담아 여행지에서의 생생함과 동시에 아련함을 활자 안에 고스란히 채워 넣었다. 아, 여행책자를 이렇게도 쓸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감탄과 감동에 사로잡혔지만 사실 당시에 신야의 글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성인이 되고 매 해 쏟아져 나오는 세련되고 독특한 여타의 여행서적들에 익숙해지면서 신야가 주었던 감동과 놀라움은 잊혀졌다. 그리고 14년 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신야의 <동양기행>은 그의 독특한 여행관과 유려한 글솜씨, 마음으로 담아 낸 사진들-그가 사진을 다루는 솜씨는 실로 대단하다-로 인하여 다시 한 번 그 시절의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공중의 떠도는 새의 무리를 세어본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시작하려는 인간의 수를 세어보는 것만큼이나 무모하다...새들은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났고, 둘은 하나가 되고, 셋은 다섯이 되고, 다섯은 무無가 되고, 무에서 다시 하나가 나타나고, 그 하나가 둘로 나뉘었다. 내 눈은 24마리로 세었고, 다시 32마리로 세었고, 때로는 18마리로 세었다. 그러다가 문득 환영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하다고 생각했다. (후지와라 신야의 동양기행 1권 중 p.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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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 - 22년간의 도보여행, 17년간의 침묵여행
존 프란시스 지음, 안진이 옮김 / 살림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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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7일 서해안 태안군은 지옥으로 변했다. 태안 앞바다에서 유조선 허베이스피릿호와 해상 크레인이 충돌하여 대량의 기름이 유출되었고 이는 종전까지 한국 해상의 기름유출 사고 가운데 최대 규모로 알려진 시프린스호 사건보다 3배 많은 기름이었다. 유출된 기름으로 형성된 시커먼 기름띠는 사고 당일 만리포와 모항 등으로 유입되었고 사흘 후에는 가로림만 입구와 천수만 입구까지 확산되었으며 기름띠는 안면도까지 유입되었다. 기름이 굳어버린 덩어리 일명 타르 볼은 대한민국 해안 전역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고 한 해을 넘긴 2008년 1월에는 전라남도 진도와 해남 그리고 제주도 해안까지 퍼진 것으로 보고되었다. 태안과 서산, 당진군 등 6개 지역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고 60만 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들은 태안으로 향했다. 그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고, 어떤 것을 느꼈었는가. 그리고 내 삶은 과연 이 엄청난 재앙 앞에서 생각하고 반성하고 변화했는가. 아니,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현장에서의 엄청난 기름 냄새와 추위와 분노와 짜증으로 점철되었던 기억은 지금의 내 자신을 변화시키지도, 고무시키지도 못했다. 부끄럽게도. 

 

 

1971년 1월 1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발생한 기름유출 사고는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플래닛 워커>의 저자 존 프란시스는 해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기름과 입과 폐로 타르를 들이마신 채 시커멓게 죽어가는 새와 물고기와 바다표범의 모습을 보면서 끔찍하네, 조심해야겠다, 바보 같은 인간들을 운운하며 분노한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기름을 사용해야 하는 자동차를 타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그것도 아메리카라는 그 엄청나게 넓은 땅덩어리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자동차를 타지 않겠다는 것은 아, 자동차를 타지 않는군요가 아니라 일종의 사회와의 단절을 뜻하는 것이며 철저한 비주류의 길이자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이고 좋게 표현하면 은둔자가 되는 것이고 실질적으로 표현하자면 외톨이, 낙오자 혹은 사회로부터 등한시되는 외골수의 고집스러운 사회운동가가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실제로, 차를 타지 않는 그에게 조롱과 비난의 화살이 꽂혔고-아마, 나 역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남들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냐는 비난을 받아야했다. 그는 사람들과의 논쟁이 무의미함을 느꼈고 그의 입마저 닫아버리게 된다. 프란시스는 17년을 그렇게 오로지 도보와 침묵으로 사는 삶을 선택했다. 도대체 이러한 삶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 지향점이 어디란 말인가. 그저 한 사람이 차를 타지 않고 침묵한다는 행위가 무엇을 그다지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인가.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신의 삶이 달라졌다고. 도보와 침묵의 삶을 선택한 순간 자신은 순례자가 되었고, 자신의 이러한 행위가 환경에 대한 일말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자연과 생태계와 이 대지를 돌보고자 하는 인간의 책무를 깨닫게 하고자 자신의 신념대로 노력한 것이라고 말이다. 나 혼자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가 아니라 나 혼자만이라도 인간이 만들어 낸 병폐를 고쳐보고자 노력하는 해결책으로써 선택한 행위였고, 잃어버린 것을 찾아 뒤로 되돌아가는 동시에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그렇게 미국 전역의 해안과 도시와 사막과 평원을 순례한다. 밴조를 연주하면서. 

 

 

17년간의 침묵의 서약을 끝내면서 프란시스는 이제 환경을 위해 입을 열었다. 비영리교육기관을 열어 순례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환경과 생태계 보전, 평화를 위한 교육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바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플래닛워커’는 이렇게 창설되었다. 그의 행위를 두고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기 이전에 혹은 실용성과 비실용성을 논하기 이전에 프란시스의 순례자의 삶과 침묵의 서약이 지니고 있는 그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자연은 인간 없이는 존재하지만-아니 오히려 인간이 없다면 better! 이라고 외치겠지만-인간은 자연 없이는 존재가 불가능하다. 그의 논문에서처럼 지금 인류의 모습이 어떠하며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에 관한 대답은 이제 전인류의 과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으며 아름다운 지구인이 되기 위해 내 자신 스스로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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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일 1 - 불멸의 사랑
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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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일’이라는 제목 위에 또렷하게 인쇄되어 있는 ‘불멸의 사랑’이라는 부제를 보고 잠시 망설였다. 두 권 분량의 사랑 이야기 그러니까 결코 짧지 않은 로맨스 소설을 읽기 위해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라는 고민 때문이었다. 게다가 생소하기 그지없는 앤드루 데이비드슨이라는 작가의 이름과 그조차도 성에 차지 않는지 작가의 첫 번째 소설이라는 소개말 앞에서 더더욱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저 저자 데이비드슨이 7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소설 ‘가고일’을 탄생시켰다는 짤막한 멘트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고 책을 덮고 난 지금 그 희망이 헛되지 않았음을, 읽고자 했던 선택이 옳았음을 먼저 고백한다. 

 

술과 마약, 섹스와 허영심에 찌들어 있던 주인공 ‘나’는 교통사고와 함께 재산도 직업도 잘생긴 외모도 심지어 음경마저도 순식간에 잃게 된다. 사고 후에 그가 얻은 것이라곤 끔찍한 화상과 고통, 수차례의 수술과 장애, 철두철미한 자살계획 그리고 척추를 휘감은 채 그를 괴롭히는 뱀 한 마리였다. 마리안네 엥겔이 병실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누가 봐도 제 정신이 아닌 듯한 그녀는 누워 있는 ‘나’를 향해 “이번이 세 번째 화상이야.”라고 중얼거린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렇게 ‘다시’ 시작되었고, 이 만남을 시작으로 ‘나’는 그동안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알지 못했던,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한 우정과 진정한 사랑을 얻게 된다. 그리고 돌 속에 갇혀 있던 모든 가고일이 깨어났을 때, 마리안네의 심장이 온전히 자유로워 졌을 때 ‘나’는 안식의 시간 속으로 마리안네를 떠나보내고, 그녀는 그토록 갈망하던 불멸의 사랑과 성화聖化를 이루게 된다. 

 

 

주인공 ‘나’가 그러했듯이 나 또한 마리안네의 이야기를 믿기란 쉽지 않았고 동시에 그녀의 이야기에 매료되었으며 끈임 없는 의혹과 회의에 사로잡히다가도 끌려들어가듯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700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한 한 여인의 삶과 사랑 그리고 그녀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는 강렬하지만 처연하고, 아름답지만 서글프고, 역동적이지만 고달프며, 애틋하지만 비극적인 결말로 끝맺는다. 액자식으로 구성된 일명 착한 대장장이, 절벽의 여인, 유리 세공 비구니, 시귀르드르의 선물 이야기 그리고 마리안네와 ‘나’의 700년 전 사랑 이야기와 700년이 지나 다시 만난 그들의 사랑 이야기마저도 모두 하나 같이 아름답지만 그 끝은 결국 ‘죽음’이라는 한 단어로 귀결되고 만다. 마리안네는 이러한 죽음들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절대법칙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물체corpus든 의식일반mens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불사不死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때론 불멸不滅하는 것들이 있다. 마리안네에게 있어서 그것은 사랑. 설령 죽음이라 할지라도 사랑이라는 형언할 수 없는 그 자각만큼은 결코 멸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아마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보다. 마치 돌 속에 품어 둔 가고일처럼 700년간 가슴 속에 담아 놓았던 불멸하는 사랑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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