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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일 1 - 불멸의 사랑
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가고일’이라는 제목 위에 또렷하게 인쇄되어 있는 ‘불멸의 사랑’이라는 부제를 보고 잠시 망설였다. 두 권 분량의 사랑 이야기 그러니까 결코 짧지 않은 로맨스 소설을 읽기 위해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라는 고민 때문이었다. 게다가 생소하기 그지없는 앤드루 데이비드슨이라는 작가의 이름과 그조차도 성에 차지 않는지 작가의 첫 번째 소설이라는 소개말 앞에서 더더욱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저 저자 데이비드슨이 7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소설 ‘가고일’을 탄생시켰다는 짤막한 멘트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고 책을 덮고 난 지금 그 희망이 헛되지 않았음을, 읽고자 했던 선택이 옳았음을 먼저 고백한다.
술과 마약, 섹스와 허영심에 찌들어 있던 주인공 ‘나’는 교통사고와 함께 재산도 직업도 잘생긴 외모도 심지어 음경마저도 순식간에 잃게 된다. 사고 후에 그가 얻은 것이라곤 끔찍한 화상과 고통, 수차례의 수술과 장애, 철두철미한 자살계획 그리고 척추를 휘감은 채 그를 괴롭히는 뱀 한 마리였다. 마리안네 엥겔이 병실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누가 봐도 제 정신이 아닌 듯한 그녀는 누워 있는 ‘나’를 향해 “이번이 세 번째 화상이야.”라고 중얼거린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렇게 ‘다시’ 시작되었고, 이 만남을 시작으로 ‘나’는 그동안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알지 못했던,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한 우정과 진정한 사랑을 얻게 된다. 그리고 돌 속에 갇혀 있던 모든 가고일이 깨어났을 때, 마리안네의 심장이 온전히 자유로워 졌을 때 ‘나’는 안식의 시간 속으로 마리안네를 떠나보내고, 그녀는 그토록 갈망하던 불멸의 사랑과 성화聖化를 이루게 된다.
주인공 ‘나’가 그러했듯이 나 또한 마리안네의 이야기를 믿기란 쉽지 않았고 동시에 그녀의 이야기에 매료되었으며 끈임 없는 의혹과 회의에 사로잡히다가도 끌려들어가듯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700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한 한 여인의 삶과 사랑 그리고 그녀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는 강렬하지만 처연하고, 아름답지만 서글프고, 역동적이지만 고달프며, 애틋하지만 비극적인 결말로 끝맺는다. 액자식으로 구성된 일명 착한 대장장이, 절벽의 여인, 유리 세공 비구니, 시귀르드르의 선물 이야기 그리고 마리안네와 ‘나’의 700년 전 사랑 이야기와 700년이 지나 다시 만난 그들의 사랑 이야기마저도 모두 하나 같이 아름답지만 그 끝은 결국 ‘죽음’이라는 한 단어로 귀결되고 만다. 마리안네는 이러한 죽음들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절대법칙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물체corpus든 의식일반mens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불사不死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때론 불멸不滅하는 것들이 있다. 마리안네에게 있어서 그것은 사랑. 설령 죽음이라 할지라도 사랑이라는 형언할 수 없는 그 자각만큼은 결코 멸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아마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보다. 마치 돌 속에 품어 둔 가고일처럼 700년간 가슴 속에 담아 놓았던 불멸하는 사랑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