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수첩 - 진실의 목격자들
PD수첩 제작진.지승호 지음 / 북폴리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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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의 캐치프레이즈는 ‘이 시대의 정직한 목격자’이다.(…)발로 뛰면서 정직하게 만들고 어떤 압력이 있더라도 우리가 보고 들은 그대로를 말하겠다는 의미다.(…)사실 정직하다는 게 간단한 말은 아니다. 어렵고 무거운 말이다. “정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감당할 만한 큰 용기가 있어야 된다. 또 우리 스스로 도덕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138쪽)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 볼 수 있는 용기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실 앞에서 진실 그 자체를 온전히 바라봐야 하는 용기와 함께 그것이 진실임을 밝히고 그 진실을 알려야 하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언론이며 언론인이다. 언론은 거짓을 밝혀야 하는 의무가 있고, 진실을 알려야 하는 사명과 책임이 있다. 그러한 언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곳, 언론이 언론이고자 노력하는 곳, 그 중 한 곳을 꼽는다면 그건 아마도 ‘PD수첩’일 것이다.

대중들의 잘못된 환상을 깨줄 의무도 가지고 있다. 황우석 박사 같은 경우도 미디어가 만든 잘못된 환상이 아니었나. 대단히 고통스런 각성이지만, ‘진실은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역할도 우리가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탐사저널리즘에 종사하는 이들에겐 남다른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15쪽)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005년이 저물어가고 2006년이 밝아오던 그때, 대한민국에 두 번째 노벨상을 가져다 줄 학자이자 영웅이며 어쩌면 인류의 구원자가 될 황우석 박사에 대한 PD수첩의 천인공노할 보도. 당시 방송을 보면서 생각했다. 잘못된 보도이기를, 거짓이기를. 아마 당시의 대다수 국민들 역시 이와 비슷한 심정으로 방송을 지켜보았을 것이고 PD수첩은 말 그대로 역적이 되었다. 심지어 그 보도가 진실임이 밝혀졌을 때조차 국치를 안겨준 죄인처럼 매도당했다. 그런데 만약, 그 진실이 더 오랜 시간 그대로 묻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거짓은 물리적 시간과 결합하여 눈덩이처럼 점점 더 크게 불어났을 것이고, 더 무시무시한 거짓이 되어 누군가는 더 크게 상처 입히고 누군가는 더 깊은 상처를 받고 종국에는 치유될 수 없는,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겨지지 않았을까. 송일준 PD의 말처럼 잘못된 거짓의 탑이라면 더더욱 빨리 허물어트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당장은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건 균형감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항상 역지사지해야 한다. 소수자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아야 한다. 당파성이나 정치성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그런 것을 초월해야 한다.(…)방송 프로그램을 만들 때는 항상 “방송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럴 만한 문제가 있는가” 오로지 그런 기준에 입각해서 판단을 해야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198쪽)  

미선이 효순이의 안타까운 죽음, 만민중앙교회 비리 문제, 삼성 무노조 문제 제기, 대한민국 검찰의 도덕성에 대한 의혹 제기,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 전교조 해직 교사들의 이야기, 다문화 가정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 광우병과 미국산 쇠고기 검증 문제, 장애인들의 고통과 삶 등등 ‘PD수첩’은 사회 곳곳에 산적해 있는 난제들에 대해 접근하고 진실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노력은 ‘방송할 가치’가 있는 방송을 만들어 냈고 그 보도들을 통해 모든 진실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반드시 직시해야 하는 진실들에 대해 무지하거나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을 수 있었다. PD수첩을 최초로 기획한 김윤영 PD의 말처럼 PD수첩은 사람끼리의 소통 곧 커뮤니케이션이 목표이고, 언론이 가장 외경스럽게 생각하고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대상은 방송사 간부나 사장, 정부 관료나 힘 있는 사람들이 아닌 시청자 곧 국민들이다. 진실은 때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분노하게 하지만 결국 우리를 건강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 바로 ‘진실’이며 이러한 진실들을 보도하고 공유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진실된 언론인들의 노고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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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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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인간의 고뇌에 대하여

6. 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초겨울 평양. 육본 파견대 정치정보부에서는 6. 25전쟁 발발 직전, 평양에서 일어났던 열네 명 목사들의 긴급체포와 집단 처형이라는 사건 경위를 조사하게 된다. 이 사건을 담당하게 된 장대령과 이대위 그리고 처형 현장 가운데서 살아남은 신목사. 그 하나의 사건을 두고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시선으로, 각자의 관점으로 진실을 향해 혹은 진실을 외면한 채 소설 <순교자>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열두 명의 순교자들은 위대한 상징이야. 그들은 고난받는 교인들의 상징이자 궁극적인 정신적 승리의 상징이지. 그 순교자들은 결코 싼 값에 팔아 넘겨선 안 돼. 빨갱이들에 대한 그 순교자들의 정신적 승리를 모든 사람이 목격하도록 해야 한단 말야.”(75쪽)
이 사건의 총책임을 맡게 된 장대령에게 사실과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장대령에게 있어서 그 목사들은 단지, 남한 정권의 선전을 위한 주요한 소재이자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장대령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닌, 북한 정권에 의해 죽음에 이른 목사들 곧 ‘순교자’들이 정권 선전을 위한 매우 적당한 소재이며 훌륭한 도구이고 성스러운 상징물이 되어준다는 이용가치에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진실이야.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이야말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고, 자네들은 그걸 줘야 하는 거야.”(213쪽)
장대령의 명령 하에, 이 사건을 일선에서 담당하게 된 이대위는 진실이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져야 하고 알려져야 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선전 목적에 맞추기 위해 진실을 비틀 수는 없는 것이며 진실이 비틀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대위에게 있어서 진실은 그것이 추악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저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져야 마땅한 것이다. 

 

“목사님의 신이건 그 어떤 신이건 세상의 모든 신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슨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은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지도 않을뿐더러 인간의 비참, 살육, 굶주린 백성들, 그 많은 전쟁, 그리고 그 밖의 끔찍한 일들과는 애당초 아무 상관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253쪽)
이대위의 이러한 의구심과 회의는 무릇 이대위 개인에게만 머물러 있는 괴로움이 아닌,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과 고난 속에 처해 있는 여타의 무수한 인간들이 품고 있는 번민이며 고뇌이다. 이대위의 실존적인 이 질문 앞에 과연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255쪽)
목사들의 죽음을 단지 선전 도구로, 이용 수단으로 여겼던 장대령조차도 숙연케 만든 신목사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다. 소설은 신목사가 가장 성스러운 존재가 되려는 순간 마치 연극에서의 암전처럼 신목사의 성스러움을 암전시킨다, 잠시 동안.

 

“우린 절망에 대항해서 희망을 가져야 하오. 절망에 맞서서 계속 희망해야 하오. 우린 인간이기 때문이오.” (256-257쪽)
그러나 암전 가운데 핀조명이 떨어지듯 신목사야말로 저자 김은국이 진정한 순교자로서 그려지길 원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유다로, 배덕자로, 겁쟁이로 낮추고 희생함으로써 교인들에게 또한 무의미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인간들에게 절망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이 곧 희망임을 드러낸다. 처형 가운데 인간이 희망을 잃었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는지,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지켜보면서 인간이란 희망이 없이는 결코 고난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신목사에게 있어서 진실이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뛰어넘은 그 무엇 곧 절망 가운데 희망이 되어주는 그 무엇이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신목사의 고뇌 앞에서 또한 진정한 순교자의 길을 걸어간 그의 뜨겁고도 처연한 발걸음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인간의 운명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숱한 고난과 고통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줄 용기를 가지시오.”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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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발견 - 사라져가는 모든 사물에 대한 미소
장현웅.장희엽 글.사진 / 나무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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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는 너무나 작고 사소해서 한 번 떨어져 나가면 다시 돌아오기 힘든 존재다.(#.01 ‘단추’ 중에서)
너무나 작고 사소한 것은 사라져도 찾지 않는다. 한 번 떨어져 나가면 그뿐, 아쉬움도 안타까움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너무나 작고 사소한 존재는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이를테면 단추가 그러한 존재. 하지만 한참 길을 걷다 내 옷 여기쯤에 자리 잡고 있어야 단추가 보이지 않을 때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더 이상 작고 사소한 존재,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급히 갈망하게 되는 존재, 그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매순간 단추를 의식하면서, 매순간 너무나 작고 사소한 것들을 의식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가끔은 사소한 존재들과 새삼 마주해 보는, 상기하고 기억해 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변화를 겪을 테고 때론 많은 것을 잃기도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을 잊기도 한다. (#.11 ‘안경’ 중에서) 오래된 것들은 시간에 비례해 사라지게 마련이니까.(#.28 ‘이름표’ 중에서)
누군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은 망각이라고. 망각은 기록의 망각, 사실의 망각이라는 표현보다는 기억의 망각, 감정의 망각이라는 표현과 더 긴밀한 조화를 이룬다. 망각이 불가능한 삶은 참으로 불행할 것이다. 슬픔에 잠겨 끝끝내 헤어 나오지 못하거나 매순간 들끓는 분노에 휩싸인 채 살아야 할 것이다. 천만다행, 시간의 무게와 망각의 밀도는 정비례관계라는 공식으로 인하여 인간이 조금 덜 불행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이 망각은 취사선택이 매우 어렵다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 잃지 않았으면, 잊지 말았으면 하는 기억과 감정, 사람과 추억들마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망각하고 마는 것.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내 앞에 나타난 사소하고도 오래된 몹시도 낡아버린 물건들로 인하여 망각 안에 잠들어 있던 추억의 조각들, 옛 기억의 단상들이 깨어난다. 불행했던 것이든, 행복했던 것이든 혹은 희로애락과는 별개의 것이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잃어버린, 잊어버린 추억들과 사람들, 약속들, 인연들을 떠올리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혹은 순간을 마주한다는 것은 잠시 동안 무언가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이 될 것이다. 찰나의 반짝임일지라도, 돌아서면 또다시 망각의 강물로 흘러가버릴지라도.

 

사람들이 일회용품을 만들게 된 것도 편리함 때문만이 아니라 버리는 데 익숙한 마음가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정작 버려야 할 건 여전히 담아둔 채, 오랫동안 간직해야 할 것들을 일회용으로 치부해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49 ‘종이컵’ 중에서)
버리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삶. 그래서인지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과 집착도 점점 거대해진다. 아니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커졌기 때문에 버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쓴이는 묻는다. 간직해야 할 소중한 것들을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낡은 것, 오래된 것, 평범한 것, 사소한 것 그래서 버려지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돌아봄. 이 사소한 존재들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사소하지만 의미가 있는 것일지도 어쩌면 더 이상 사소한 것이 아닐지도, 특별한 것일지도,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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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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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전공과목보다 비전공과목, 교양과목들이 더 흥미롭고 즐거웠던 건 대체 어찌된 연유일까. 그중에서도 특히 사회학은 대단히 매력적인 학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귀스트 꽁트, 에밀 뒤르켐, 게오르그 짐멜, 앤서니 기든스 등의 이름들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꽤나 좋아했었던 모양이다. 사회학은 사회과학과 사회철학의 교집합적인 학문으로 기억되는데 사회를 이루고 있는 인간, 인간이 이루고 있는 사회를 탐구하고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수디르 벤카테스의 <괴짜 사회학>은 사회학 그중에서도 특정 집단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특수사회학의 일종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벤카테스가 사회학의 연구 대상으로 삼은 특정 집단은 바로 미국 시카고의 빈민가, 로버트 테일러 홈스의 빈민층 곧 이곳의 흑인을 연구 대상으로 설정했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다. 미국의 빈민층이나 흑인을 대상으로 한 특수사회학, 응용사회학에 관한 논문이나 책자는 모르긴 몰라도 수 백, 수 천 부는 넘을 테니 말이다.



시카고 거리에서 본 약동하는 삶에 비하면 세미나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는 어쩐지 차가운 거리감이 느껴졌고 추상적이고 생기 없어 보였다. 연구자들 대부분이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대상인, 살아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특히 내 호기심이 꿈틀거렸다. (괴짜 사회학 중에서, 19쪽)  <괴짜 사회학>가 여타의 사회학 관련 책자와 차이를 둘 수 있는 이유는 저자인 베카테스가 그 특정 집단 속으로 곧 시카고의 빈민가 안으로 직접 뛰어들었다는 점. 심지어 그 빈민가에 속해 있는 갱단 블랙 킹스의 일원이 되어 연구를 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관찰자 입장에서 크게 벗어났다거나 갱단의 일원이 되어 총질을 하고 마약을 판매하고 사람을 죽이는 등의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그곳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일을 맡았다. 단지, 남다른 점이 있다면 두목의 명령(!)이었다는 것. <괴짜 사회학>이라는 본 책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학문을 탐구함에 있어서 그의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태도, 상아탑 속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하는 학자로서의 열린 자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미.

 

난 아프리카계 미국인도 아니야. 깜둥이야.(…)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넥타이를 매고 일해. 우리 깜둥이들은 일자리를 얻을 수조차 없어. (괴짜 사회학 중에서, 35쪽) 이 주택단지에는 두 종류의 갱단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해. 경찰도 하나의 갱단이야. (괴짜 사회학 중에서, 325쪽)
<괴짜 사회학>이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저자의 이러한 태도와 자세를 바탕으로 사회가 방치한 혹은 외면한 소외계층의 가난과 빈곤, 갱단과 범죄, 공권력의 부패와 무법천지 빈민가의 본 모습을 사실적으로, 실질적으로 담아냄으로써 기존의 탁상공론적 사회학 연구에 대한 한계를 비판하고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오류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괴짜 사회학>의 초고가 되었을 벤카테시의 논문 집필이 시작된 건 1989년, 이후 1998년까지 약 10년 간을 시카고 빈민가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논문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이제, 또다시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2009년 현재, 미국의 대통령은 인종적으로 흑인黑人이다. 동시에 갱단의 두목 제이티의 표현대로 하자면 깜둥이가 아닌 넥타이를 매고 일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자,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영화 속에서나 연출되었던 ‘흑인 대통령’이 당선되어 집권하고 있는 오늘날의 미국에서 이 <괴짜 사회학>이라는 책은 과연 무색해졌을까?

 

2009년 7월, 저명한 흑인 학자이자 하버드 대학의 교수인 헨리 루이스 게이츠 박사가 자신의 집 현관문이 열리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는데 한 이웃이 그를 도둑으로 오인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출동한 경관이 게이츠 박사의 신분증을 요구하며 집안까지 쫓아 들어왔고, 신분이 확인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체포하게 된다. 물론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경관의 입장도 있었을 것이고, 필요이상으로 격분하고 과민하게 대응한 게이츠 박사의 책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집 현관을 열려고 애쓰고 있었던 사람이 만약 백인이었다면 이 사건은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까. 우스갯소리지만 신고를 했던 그 이웃은 어쩌면 “Hi, May I help you?"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괴짜 사회학>의 틀에서 봤을 때 조금은 한정적인 예이지만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추측하건데 수디르 벤카데시의 <괴짜 사회학>이 화석화된 책이 되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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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견문록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 지식여행자 6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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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다는 것. 이 ‘먹는다’는 행위는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에게 해당되는 가장 본능적인 행위이며 또한 가장 즐거운 행위이다. 언제부터인가 ‘맛집’이라는 신조어와 함께 맛있는 음식점, 소문난 카페 등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즐기는 행위가 유행처럼 번졌고 이제는 보편화되었다. 먹는다는 행위는 더 이상 먹기만을 위한, 배를 채우기 위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이를 즐기는 것이 하나의 놀이로, 여가활동으로 내지는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두고 사회학적, 심리학적 분석은 가능할지 몰라도 삶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나 통찰을 촉발시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견문록>은 오랜 외국 생활과 러시아어 동시통역사라는 직업적 특성, 낯선 문화적 경험들을 바탕으로 먹음의 행위와 음식이라는 소재를 통해 유머러스하지만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가능케 한다. <미식견문록>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챕터를 꼽자면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취하는 태도를 통해서 그 사람의 성향을 가늠하고 추측한 ‘미지의 음식과 성향’이라는 챕터이다. 1985년 러시아의 사회주의 개혁 이데올로기를 칭하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가 시작될 무렵 개혁을 추진하던 진영에서도 가장 보수적이었던 리가초프(실상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대항했던 인물로)는 회나 초밥은 물론 굴이나 조개 심지어 익힌 생선이나 튀김 등 익숙하지 않은 일본 음식은 결코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 반해 러시아의 개혁과 개방, 러시아의 공산 통치 종말의 서막을 알렸던 고르바초프는 회나 초밥에는 거부반응을 보였지만 일본 요리 중 튀기거나 익힌 생선, 샤브샤브나 스키야키는 대단히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개혁과 개방을 넘어 아예 러시아를 붕괴시키는데 일조한 옐친은 회, 초밥, 낫토, 참새구이 심지어 재미로 점점 희한한 음식을 내오던 주최 측이 어이없어할 정도로 어떤 음식이건 흥미롭게 먹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낯선 음식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정치적 측면에서의 성향이 정비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이 이야기가 절대적인 진리이거나 과학적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낯선 음식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통해 그 사람의 본질이 보수적인지 혁신적인지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저자의 상상력과 통찰력은 참으로 흥미로운 발상임에 분명하다.




당장 내일부터 단 한 끼도 쌀밥을 먹게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제부터 김치를 먹지 못하게 된다면? 러시아인들에게 보드카를 금지 시킨다면? 프랑스인들로부터 바게트를 몰수한다면? 감자가 더 이상 재배되지 않는다면? 모르긴 몰라도 사람들은 미치거나 슬퍼하거나 배고프거나 심지어 죽어갈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 먹고 마신다. 따분할 정도의 이 일상적인 행위는 사실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요네하리 마리가 <미식견문록>을 집필하게 된 원동력 그 저변에 있는 것은 바로 ‘그리움’이다. 어린 시절에 대한, 부모님과 가족에 대한 그리고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그녀는 그리움을 원천으로 먹는다는 것이, 음식이라는 것이 육신은 물론 인간 영혼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또한 얼마나 소중한 요소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살이는 사실 이름처럼 하루만 사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성충이 되기까지 애벌레로 약 2년간을 살고 성충이 되고나서는 짧으면 단 몇 시간을, 길면 일주일정도 산다고 하니까. 하지만 대다수의 성충이 된 하루살이는 정말이지 짧은 시간을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루살이의 삶이 짧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단적으로 설명한다면 그것은 바로 성충이 되는 그 순간부터 하루살이의 입이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입이 퇴화되어 버린다는 것. 그래서 더 이상 영양을 섭취할 수 없게 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알을 낳는데 사용하고는 그토록 짧은 하루살이의 삶을 살다가 가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이 때론 곤욕이 되기도 하고 일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먹는다는 것은 몹시 즐거운 행위이며 동시에 참으로 감사해야 하는, 참으로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행위임을 먹음의 매순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미식견문록>의 저자 요네하라 마리는 오랜 타국 생활을 통해 이러한 진리를 몸소 체험했기에 소소한 이야기들 가운데 진정성과 진실한 울림이 묻어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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