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고바야시선생님을 만나고 싶다

창가의 토토 - 개정판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김난주 옮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1월

손가락의 개수가 내 나이를 뛰어넘던 시절 나는 동화책을 읽으며 사랑을 얻는 공주님이 되기도 하고 승리를 쟁취한 멋진 영웅이 되어보기도 했다. 상상을 타고 흘러 내려가면 끊임없이 펼쳐지는 가능성의 평원에 내가 하고싶은 것들과 꿈을 마음껏 그릴 수 있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수험생 생활을 얼마 앞두지 않은 지금 어린시절 제약없이 펼쳐두었던 상상은 허망한 망상이 되어버렸고 무엇이든 그릴 수 있었던 가능성의 평원은 사각의 교실처럼 깎이고 침식되어 수학공식과 영어단어만이 서로 비좁은 자리를 넘볼새라 높게 높게 버티고 있다. 시간표 숙제 단어시험 모의고사 성적표. 이제 나의 생활을 둘러싸고 나의 모든 가능성을 결정짓는것은 이런 것들이다.

'지겨워.' 습관처럼 하루에도 수십번을 그렇게 말하지만 이미 나는 그 틀 안에서만 안심하고 숨을 쉴 수 있게 되어버렸다. 언제나 엷은 이끼같이 온몸을 휘두르고 있는 답답함을 느끼지만 나에게는 이제 목을 약간 간지럽히는 먼지섞인 공기와 같을뿐이다. 투명한 쇠창살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이 공기같이 익숙해진 느낌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도 특별히 벗어나고싶은 바램없이 막연한 동경으로만 창살 밖을 바라보는 것은 오랫동안 새장 안에 갇혀 있어서 나는법을 잊어버린 새와 같은 심정일까?

'안전한' 새장 안에서 때가 되면 먹이를 먹고 천적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본능이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채 창공을 그저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그런 새..

나는 이 안전한 창살 안에서 '몇년 베테랑'이라고 믿음직스럽게 말씀하시는 선생님들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한 걸음이라도 빗겨 나가면 낙오된다는 사실을 명심한채. 가끔 내가 가는 길이 혼란스러울때면 학교근처의 길 어디에서나 교통표지판처럼 붙어있는 현수막을 보면 된다. 서울대 몇명 합격이라는 교리같은 그 어구를 우러러 보고있는 사람들의 하나같은 눈빛을 보면 내가 가야할, 아니 우리 모두가 가야할 '바른길'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능력있다고 인정받는 선생님들은 말한다. '난 베테랑이야. 내가 하라는대로만 하면 돼. 친구들의 머릴 밟고 올라서도록해.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중간고사 마지막 날 저녁 두눈이 퉁퉁 붓도록 운건 내 성적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가 아니다. 둘도 없는 친구까지도 밟고 올라서야할 '적'의 시선으로 바라본 나의 추한 눈에 대한 지독한 혐오감에서였다. 물끄러미 바라본 거울 속엔 공주님이 되고 영웅이 되었던 어릴적의 나는 없고 꿈을 잃은.. '바른길'을 향해서라면 철저하게 이기적일 수 있게된 철장안의 내가 비춰졌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백번씩 책상을 여닫고 서슴없이 분뇨에도 뛰어드는 토토가 만약 고바야시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열여덟살이 되었을때 나처럼 거울 속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보고 서글퍼졌을까? 만약 내가 어린시절 토토처럼 행동했을때 그런 나에게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단지 '원래대로 해두거라'라고만 말씀하신 고바야시선생님같은 분이 나타났더라면 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혐오스럽게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을까?

토토의 행동에는 나도 어린시절에 겪었던 그럴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어떤 행위에 대한 수많은 가능성에 대해 자신에게 있어 가장 매력적인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고바야시선생님의 교육방법은 어린이의 그 무수한 가능성을 가로막지 않고 그대로 펼칠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다. 만약 다른 어른들이었다면 아이들이 매료되어 선택한 방법과 결과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꿈많은 선택을 '올바른길'이란 이름으로 똑같이 가르쳤을 것이다. 결국 아이들을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오로지 하나의 길로만 몰아놓고 모두를 경쟁자로 여기게 하겠지..

가끔 5,6교시 쉬는 시간에 졸음에 밀리고 피곤에 지친 반 아이들이 모두 잠들어 버릴때 침묵에 휩싸인 묘지같은 교실에서 사치스런 고독을 느낀다. 지금의 나는 낙오될 '용기'도 없이 계속해서 바른길을 나아가야하겠지만 언젠가 태어날 내 아이들은 바른길이 아닌 '나의길'을 향한 나아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갈증해소-2% 부족할때..

탐정은 웃지 않는다 1
모리 모토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0년 7월

와우!
오랜만에 정말 마음에 드는 만화책을 본 것같다. 요즘 만화들은 내가 처음 만화를 읽었을 때보다 지나치게 가벼워지고 획일화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좀 괜찮다 싶으면 왠지 요즘 유행에 너무 휩쓸린것 같고.. 어쨌든 내 마음에 맞고 정말 괜찮다싶은 만화책을 찾기 힘들었었다.

그런데.. 이 만화는 좀 거창한것 같지만 정말 재밌고 깔끔한 만화를 향한 오랜 나의 목마름에 대한 한 줄기의 물과도 같았다. 갈증이 깨끗하게 해소되고도 남을 정도로의 재미를 느낀 만화인 것이다. 먼저 순정만화에서는 독특하다 할 만한 소재.

추리만화라고 하기엔 빈약한 면이 많지만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명탐정 코난>처럼 지나치게 억지스러운 설정과 두뇌싸움을 요하는게 아니고 적당히 사랑을 논하면서 어느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이 마음에 든다. 또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생생히 살아있다. 지나치게 착하다거나 지나치게 악하다거나 지나치게 정의롭다거나.. 어쨌든 그런 현실감없는 캐릭터가 아닌 것도 마음에 든다. 20대 후반인 지금도 아직 키가 자라고있는 초미소년 동안의 검사출신의 천재 탐정. 왠지 순정만화답지만 마음에 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아픔을 간직한 게이도 마음에 든다. 물론 정의감에 넘치는 다른사람의 아픔에 같이 동조하고 아파할 줄 아는 여주인공도 너무너무 좋다. 오랜만에 정말 마음에 드는 만화를 만났다. 정말 다른 사람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만화..

봉신연의

봉신연의 1
후지사키 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9년 12월

엄청난 찬사와 친구들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뭔가 미심쩍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를 읽게되었다. 1,2권을 읽고.. 도저히 더 이상은 읽을 맘이 생기지 않아서 친구들에게 '이게 모야! 너덜은 나를 실망케 했어'라고 했더니 걔네들은 하나같이 '4권까지만 참고 읽어봐.. 너 또 돈 모은다고 난리칠껄? 그 만화 산다구..'라고 말했다. 그래서 기대기대 왕기대하면서 무려 8권까지 읽게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말하고픈 결론은 기대 이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만화 읽는 것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써 내가 무쟈게 재밌게 읽은책을 다른 누군가가 '별루야..'라고 말한다면 '그 재미를 도대체 왜 모를까!'하며 답답해하고 열도 받겠지만 솔직히 나는 그랬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가벼운것 같고 악의 화신인 달기의 행동도 별로 설득력이 없어보이고..

단순히 '내 취향이 아니다'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이 만화를 향한 뜨거운 찬사들과 이 책을 권해준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친구들의 반응이 너무 심상치 않다. 그들이 느낀 그 짜릿한 재미를 나도 한번 느껴보고 싶은데.. 누구 가르쳐줄 사람?

재밌는 책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1 (무선) ㅣ 해리 포터 시리즈
조앤 K. 롤링 지음, 김혜원 옮김 / 문학수첩 / 1999년 11월

책방 아줌마가 이 책을 권해주었을 때 '이런 애들이 읽는 책을 어떻게 읽어요!'라고 대답했었다. 이 책에 푹 빠진 지금.. 환타지 소설을 즐겨읽는 친구한테 이것을 읽으라고 해보니까 똑같은 말을 하더라.. 어찌 어찌해서 해리포터 시리즈 중 4권인 '해리포터와 불의 잔'을 맨 처음 읽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중간부터 읽을 때의 '당혹감' 같은 건 별로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잘 모르고 읽어도 꽤 재미쓴ㄴ데 첨부터 읽으면 얼마나 재밌을까?' 하는 마음에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펼쳐들게 되었다. 결론부터 내리자면 '진짜 재밌다'이다. '책이 출간될때마다 무단 결석으로 몸살을 앓는 학교'라는 비웃음을 흘리게 했던 이 책 뒤의 선전문구가 200% 이해가 갔다.

1권의 상을 다 읽고나니 '5권은 내년에나 나온댔는데'하는 걱정부터가 나던 것이다. 마법과 마법사라는 소재를 다루는데 그런 '황당무계'함에 익숙치 않은 나 인데도 전혀 거부감 없이 읽히는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미스테리 형식으로 이야기가 풀리는 것도 재미있다. 스네이프 교수는 여전히 나쁜사람이지만 그가 범인이 아니었다니! 기숙사를 배정해 주는 모자라던가 움직이는 사진들. 초상화속의 여인 등 너무 흥미로운 양념들이 많다. 글구 해리가 머글에서 호그와트 마법사 학교로 입학하는 과정이 내가 평범한 일상에서 이 책의 매력적인 그 세계로 빠져드는 것과 맵치가 되서 재밌다. 앞으로 해리포터가 '악의 무리' 볼드모트를 어떻게 물리칠지 어린애처럼 마구 마구 기대가 되는건 내가 너무 순수해서 그런가?^^;

카리스마 총 집결!

폐쇄자 the Closer 1
유시진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0년 7월

이 만화를 읽을때 성냥에 불이 붙듯 그렇게 단번에 빠져들지는 않는다. 또 쉽게 타오르지만 그만큼 빨리 사그라드는 열정 같이 뜨겁지도 않다. 긴장의 선이 끊어지지 않게 유유히 흐르며 점차 그 사슬에 걸려들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그렇게 깊게 들어가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그녀의 카리스마!! 그녀의 작품은 늘 그랬다. 맨 처음 빠져들었던 <쿨 핫>부터 아직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신명기>와 숨이 멈출 정도로 강렬한 <폐쇄자>까지.. 그 카리스마라는 것이 잘은 모르지만 특이하다고 해서.. 무겁고 심오하다고 해서 쉽게 느껴지는게 아니지 않는가..

참 굉장한 반전을 느꼈고 '사랑한다면..?'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했다. 사랑한다면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가? 사랑한다면 무슨 짓을 하던 용서가 되는 것인가? 그 상황에서 나라면.. 그를 너무도 사랑하는 나라면 과연 어떻게 해야만 했을까. 처음 읽었을때는 반전에 어리벙벙해하며 쿤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지만 윙크에서 그 책을 소개하는 어느 기자가 한 말처럼 더 많이 읽으니까 히이사에 대한 연민 같은게 느껴졌다. 쿤의 고통과 키퍼로써의 그 막중한 책임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생명. 자신에 대한 기억마져도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며 쿤을 사랑한 히이사. 그의 그 사랑에 대해 '너무하다'가 아닌 '굉장하다'라고 느끼는 건 내가 너무 감상적이라 그런가? 어쨌든 몇 번을 읽어도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는 정말 '굉장한'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