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이007
헛간을 태우다.049
춤추는 난쟁이081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121
세 가지의 독일 환상171

반딧불이
이 기숙사의 유일한 문제점은 -문제점이라고 할지 어떨지는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운영자가 어느 극우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정체불명의 
재단법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기숙사의 하루는 장엄한 국기 게양과 함께 시작된다. 물론 국가도 흐른다. 국기 게양과 국가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이것은 스포츠뉴스와 행진곡의 관계 같은 것이다. 국기 게양대는 안마당한가운데 있어 어느 기숙사 동에서나 보이게 되어 있었다.

내 룸메이트가 병적일 정도로 청결한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모든 청소는그가 했다. 빨래까지 해주었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내가 캔맥주를 다 마시고 빈 깡통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면즉시 쓰레기통으로 사라지는 식이었다.

내 룸메이트는 지리를 전공했다.
"나는 지, 지, 지도 공부를 하고 있어." 그는 처음에 만났을 때이렇게 말했다.

"지도를 좋아해?" 나는 물어보았다.
"응, 졸업하면 국토지리원에 들어가서 말이야, 지, 지도를 만들 거야."
세상에는 실로 다양한 종류의 희망이 있구나, 나는 생각했다.

"넌 뭘 전공하니?" 그가 물었다.
"연극." 나는 대답했다.
"연극이면 연기를 하겠네?"

"아냐, 연기는 하지 않아. 희곡을 읽고 연구할 뿐이야. 라신이라든지 이오네스코라든지 셰익스피어라든지."
"셰익스피어 말고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네." 그는 말했다.
나 역시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강의 요강에 그렇게 적혀 있었을 뿐이다.


"아무튼 그런 걸 좋아하는구나?" 그가 물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나는 대답했다.
그는 혼란스러워했다. 혼란스러워하자 말을 더 심하게 더듬었다. 나는 무척 나쁜 짓을 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룸메이트와 그의 라디오 체조 얘기를 하자 그녀는 쿡쿡웃었다. 웃기려고 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나중에 나도 따라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은 - 아주 짧은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오래전에 그녀가 그 옷을 입은 걸 본 적 있는 것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냥 막연한 느낌인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기억이 가물거리기만 했다. 모든 것이 아득하게 먼 옛날에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잘 표현을 못하겠어." 그녀는 말했다. "요즘 계속 그래. 정말말을 잘 못하겠어. 무슨 얘길하려고 하면 항상 엉뚱한 말만 떠올라. 엉뚱하거나, 완전히 반대거나. 그래서 그걸 고치려고 하면이상하게 더 혼란스러워져서 엉뚱한 말이 나오는 거야. 

그러다보면 처음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조차 잊어버려, 마치내 몸이 두 개로 나뉘어 술래잡기를 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야. 한가운데 아주 굵은 전신주가 서 있고, 그 주변을 빙글빙글돌면서 술래잡기를 하는 거야. 제대로 된 말은 언제나 또 하나의내가 갖고 있고, 나는 절대로 쫓아가질 못해."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봄이었다. 그녀도 동갑이었고 기독교 재단의 명문 여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를 소개해준 사람은 내 친한 친구로, 그와 그녀는 연인 사이였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소꿉친구로, 집도 20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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