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지낸 사람 중 가장 뛰어나고 현명한 친구인 셜록 홈즈와 함께하는 특권을 누렸던 이번 모험과 관련된 사건은 1895년에 발생했다.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노트에 그 사건을 기록했던 당시에는, 세상 사람들이 사건의 전모를 듣기까지 오랜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1918년에 갈등의 연기가 다 사라지자, 나는 이 이야기를 비밀로 묶어두는 요인들이 더는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면서도 내안의 무엇인가가 아직은 이 비망록을 출간할 적절한 때가 아니라고 연신 속삭였다. 

따라서나는 이 이야기를 셜록 홈즈가 다룬사건 중 아직 출간되지 않은 다른 많은 사건과 함께 수많은 여행으로 찌그러지고 닳아빠진, 주석으로 된 공문서 송달함에 넣어채링 크로스의 ‘콕스 앤드 컴퍼니(Cox & Co)‘의 금고에 보관했다.

나는 내가 죽고 나서 50년이 지난 후에, 이 특별한 연극무대에올랐던 모든 배우가 다 세상을 떠나고 한참 후에야 헨차우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세상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질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의학박사 존 H. 왓슨
1919년 5월 6일, 런던

"왓슨, 인간이 이런저런 힘을 행사하고 있지만, 시간과 계절의 변화에 대해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네. 그것들은 쉬질 않는법이니까. 우리 인간들은 어쩌면 셰익스피어가 말한 대로 ‘동물들의 귀감‘ 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여전히 시간의 노예라네."

홈즈는 큰 소리로 웃었다.
"의뢰인인 모양인데, 친구? 저 방문객이 따분한 구덩이를 빠져나오게 해주는 사다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잽트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제가 워낙 심각하고 미묘한지라 세상에 알려지면 엘프베르크 가(家)에 불명예와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서요. 자, 두 분께서 이게 필사적인 문제라는 걸 정확히 아시도록 하기 위해 먼저 3년 전쯤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블랙 미하엘을 뺀 모든 사람이겠죠."
"맞습니다. 미하엘과 그의 공범인 ‘헨차우의 루퍼트‘는 제외해야겠군요."

홈즈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조롱하는 듯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냉정한 이성을 높게 보는 반면, 취약한 감정을 아주 싫어하는 홈즈로서는 잽트가 말하는 사랑 타령이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짜증나는 일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을 게 분명했다.

"좋습니다. 지금까지 떠들어댔던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면서 루리타니아 왕국의 모든 미래를 대재앙 직전까지 몰고 간 최근의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홈즈는 의자에 몸을 파묻고 파이프를 뻐끔뻐끔 피우며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흥분한 채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걸 드러내는 신호들 반짝반짝 빛나는 눈, 가볍게 오므린 입술,
찌푸린 눈썹 - 이 빤히 보였다.

루퍼트는 귀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하엘이 어리석게도 물려줬던 젠다 성을 차지했습니다. 루퍼트가 청색당을지회하고 있는 곳이 바로 그 성입니다. 루퍼트는 이직 폐하께 해가 되는 행동을 직접적으로 취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음울하고 불길한 위협입니다. 

"말씀대롭니다. 홈즈 씨. 루돌프 라센딜이 사라졌습니다!"

"제 경험으로 미뤄볼 때,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주중요한 것일 때가 자주 있더군요. 판단은 제게 맡겨주시죠."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선생은 제게 아직 모든 걸 다 잃은 게아니라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대령, 이 사건은 수심이 깊은 시커먼 물과 같은데, 우린 아직바닥까지 들여다보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나를 화나게 하는 홈즈의 성격 중 하나는 극히 중요한 정보를밝혀도 좋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즉 가장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밝히지 않는 것이었다. 정말 짜증이 나서 나도 모르게 불끈 성질이 나곤 했다.

어쨌거나 지난 경험으로 미뤄봐서 지금 이 문제를 가지고 따지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홈즈가 조개가되고 싶다면 그것을 비틀어 열 방법이 없었다.

"모피어스(Morpheus,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꿈의 신)의 품 안에서 푹 잠들었나 본데?"

"경보를 울려 경찰에 알리면 우릴 잡고 늘어져서 우리의 수사를 심각하게 방해만 할 걸세." 홈즈가 설명했다.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탐정과 함께하는 생활이 결코 따분할 리가 없었지만, 홈즈와 함께 사건 수사에 뛰어들 때면 나는때론 마치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간 것처럼 감각들이 고조되는 경험을 하곤 했다. 그때는 아주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모든 두려움이 싹 사라지고 모든 신경이 한층 더 민감해지고두뇌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작동됐다. 

친구와 함께한 수많은 모험을 기록하면서 이런 느낌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험들을 전달하는 데는 털끝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홈즈가 다룬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발표한 내 문학 작품을 홈즈 자신이 조롱하고 폄하하는 가장 큰 이유는 홈즈의 말대로 하자면, 바로 이 로맨틱한 분위기였다

한 번은 홈즈가 이 점을 혹평했다.
"자넨 일련의 강의가 돼야 했던 것들을 이야기 나부랭이로 전락시켰어. 모든 사물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유일하게 중요한 특징인, 원인에서 결과까지의 엄격한 추론을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했어야 하는데, 모든 문장에 일일이 색채와 생명을 불어넣는실수를 저지른 걸세."

홈즈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는 ‘엄격한 추론‘이 너무높게 설정되어 있어 자신이 벌인 수사의 극적인 결과를 인식하지 못할 때도 가끔 있었다. 내가 그 사건들에 ‘색채와 생명‘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셜록 홈즈는 지적인동물이고, 수사를 벌이면서 자극받는 건 그의 정신이었다. 일단게임이 시작되면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새삼 알게 해주는 그런 감정을 홈즈는 느끼지 못했다. 

"정말 딱 그대로였소, 홈즈 씨. 도대체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있는 겁니까?"
"이미 획득한 자료에 근거를 둔 일련의 추리와 관찰을 통해서죠.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날 찾아온 녀석이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작은 셰룻(필터 없는 궐련)을 필 때 내놓은 담배 케이스에H.H.‘ 라는 이니셜이 찍혀 있는 걸 봤습니다."

칼던 클럽 Caritor dub, 영국 보수당 본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디오게네스 클럽의 입구가 있었다. 이곳은 런던에서 가장 기묘한 클렇으로, 사교성이 전혀 없는 신사들의 편의를 위해 운영되는 곳이었다. 델라스 사건의 수사를 시작하면서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홈즈는 그 점을 이렇게 설명했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이곳 런던에는 숫기가 전혀 없다든가 혹은태생적으로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지. 그러면서도 안락한 의자와 최신의 정기간행물을 싫어하는 건 아니란 말이야. 디오게네스 클럽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시작된 곳이라네. 

회원은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게 허용되지 않아.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외부인 접객실‘에서는 예외가 인정되지만, 회원들끼리 말을 하다가 운영위원회의 지적을 세 번 받으면 탈퇴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네. 형은 이곳 창립회원 중의 한 명이었고, 나도 한 번 가보니까 분위기가 아주 편안하고 좋더군."

"넌 정말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구나, 셜록." 마침내 마이크로프트가 즐거움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위태로운 정치적 음모에 스스로 뛰어드는 걸 보면......."
내 친구가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친애하는 마이크로프트, 이번에는 정치적 음모라는 놈이 내집 문을 두드렸다오."
"언제는 그렇지 않았더냐? 그건 그렇다고 해도, 네가 그런 문제들을 처리한다고 덤벼들기만 하면 내 책상 위로 문제가 날아들더구나."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바로 네가 그 사람일 것으로확신한다."
"고마워, 형." 홈즈는 조용한 목소리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믿을 수 있는 왓슨도 함께 가는 것이겠지?"

나의 보즈웰 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형도 잘 알잖아?

※ 보즈웰(James Boswell)은 17세기 이후의 영국 시인 52명의 전기와 작품론을 정리한 10권의 영국시인전>으로 유명한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새뮤얼 존슨의 전기 작가인데, 홈즈의 숭배자이자 동료인닥터 왓슨과 마찬가지로 존슨의 일거수일투족을 일기로 남겼다.

홈즈는 홀슈타인의 주머니로 손을 뻗어 담배케이스를 꺼냈다. 테이프를 떼어내자 그가 이미 예측했던 대로 ‘HH‘라는 각인된 이니셜이 드러났다.
"테이프가 비록 이니셜은 가렸지만, 이곳에 있는 문장(紋章)은덮지 못했네." 홈즈는 왕홀(王勞) 위에 앉은 독수리 문양이 찍혀있는 반대편 모서리를 가리켰다.
"홀슈타인 가문의 문장일세."

"사실일세. 굉장히 오만한 녀석이라, 감히 이런 세세한 것들까지 관찰해서 연역적인 추론으로 그 뜻을 해석하고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도 않았던 것이네."

 ‘사악한 친구들의 사랑은 두려움으로 변질된다‘ 라는 셰익스피어의 말(희곡 <리처드 2세>에 등장하는 대사)이 이런 상황에 딱 들어맞을 것이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다 말해주지 않을 겁니까? 전 이유도모른 채 행동하는 건 딱 질색입니다."
"때가 되면 다 말해드리죠.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시오. 내 생각은 아직 머릿속에서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고, 그곳을 정찰한후 결과에 따라 어느 정도 조정할 필요가 있거든요. 필요 이상오랜 시간 맹목적으로 행동하게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약속드리리다."

"사람들 속에 자리 잡은 오만이라는 게 본질적으로 취약한 것이라서 절 늘 웃게 만들어서 말입니다."

‘루돌프 왕‘은 장갑을 끼면서 흥분한 기색이 번득이는 눈길로날 지그시 쳐다봤다.
"준비됐나, 왓슨? 이제 게임이 시작됐네."

루퍼트는 조롱이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폐하께서도 분명히 알고 계실 텐데……. ‘싸우다가 도망친자는 살아남아 다음날 다시 싸울 수 있다‘는 말이오."

"자네가 느리다면, 나는 아예 기어가고 있었던 셈이군."
‘아, 그렇긴 하지만, 자네가 관찰한 걸 추리의 대상물로 변화시키는 데 항상 어려움을 겪는 편이라고 하는 게 더 공정하겠지.
나야 그런 일로 먹고사는 사람 아닌가."

홈즈의 설명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함께지냈지만 홈즈가 추측한다는 걸 인정한 건 그때가 유일했다. 그리고 그 추측은 딱 들어맞았다. 이러니 셜록 홈즈는 어림짐작조차도 예술로 승화시킨다고 믿을 수밖에.

"왓슨, 자넨 여전히 로맨티시스트로구먼." 홈즈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불길을 뚫어지라 노려봤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자네가 옳을 거라고 믿고 있네,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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