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카메라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진을 찍지 않으면 자신이 보는 것들을 즐기지 못하는 듯했다.

난 그녀가 예쁜지 못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녀가 지금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주기만 한다면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난 계속 이렇게기낼 수 있기를 바랐다. 매일 한 가지씩 견디면서 지내는 법을배우면 되니까.

난 단순하고 간결한 것,
극도로 절제된 형태, 은은한 색들을 좋아한다.
꽃이 만발한 여름날의 목장은
내겐 언제나 과도해 보인다.

그의 집의 실내장식에 관해선 어떤의견도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이 집에서 내 몫을주장한다는 의미가 될 터였다. 행여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은 문제였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난 물 위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오래된 학급 사진 속에서는 이름조차 희미해졌다.
내 금귀고리들은 국가에 귀속되겠지.

난 다만 서로를 좀더 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뿐인데. 살라미와 술라미트의 이야기에서처럼 우리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별들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뿐인데, 우리를 이어줄 황금빛 별들을.
허둥지둥 농장을 나서는 순간 눈물이 솟구쳤다. 내 진심을 이토록 오해하다니!

다음 날은 건화를 받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벤니의 전화일까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가 아닐까봐 더 두려웠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어느 순간에 어른이 되었는지를 분명하게안다고 한다. 

난, 아버지를 찾아갔던 그 사흘 동안 어른이 되었다.

어머니의 머릿속은 마치 끊임없이 잘못 걸려오는 전화에 응대하는고장 난 전화 교환대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문득, 부모님 중 누구와 더 가까운지 묻는 설문지에 대답해야 한다면 그냥 빈칸으로 남겨둘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기 위해 침대칸에서 나왔다가 문을 잘못 열어 기차 밖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계속 잘 굴러갈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물론 이렇게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 자신의 별에서,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로, 그러다 목덜미에서 고독의 숨결이 느껴질 때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한것일까?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넘었던 것이다. 하루하루를 잘 지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맺은 암묵적인 협약이었다. 그것을 깨뜨리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했다.

게임의 목적은, 곳곳에 함정이 숨어 있는 방들을 통과해 보물을 찾아낸 다음 자정에 종이 열두 번 울리기 전까지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난 천장에서 내려오는 칼과 괴물, 바닥이 안보이는 깊은 구덩이와 독거미를 피해 가야 했다. 하지만 비밀 통로와 마법의 음료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계속 빈방‘ 카드를 뽑은 덕분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한 칸씩 전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나 혼자만 살아남았다. 

"그런 게 아니야." 그녀는 몹시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게임이 마치 내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 그래, 빈방뿐인 삶,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카즘 기운을 되찾은 우리는 예건처럼 숲 속을 마음껏 누비고얼음이 녹은 것에 기뻐하며 개울에서 고기를 잡겠지요.
거로에게 온기를 불어넣어주며 겨울을 잘 이겨낸 우리는이게 곧 봄이 우리의 고통을 떨쳐내게 해줄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우린 어떻게든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만큼은 바깥세상이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농장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한번은 도로에서 농장 쪽으로다가오는 자동차 불빛이 보이자, 부엌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서로 꼭 껴안은 채 숨죽이고 있기도 했다. 누군가 수차례 문을 두드렸지만 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깥세상에 미세한 틈만 보여도 불운을 가져오는 사악한 기운이 바람에 실려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훗날 홀로 묘지 벤치에 앉아 생각하곤 했다. 우리 관계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 건 비올레트와 벵트 예란이 음식을 가지고 들이닥쳤을 때였을까, 아니면 내 생일날이었을까. 데시레와의 만남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지만 마치 산소가 희박해져가는 느낌이었다.

수면 부족과 허기, 그것이 그날 저녁에 벌어진 모든 일의 발단이었다.

내가 당신 눈에 뿌려준 마법의 금가루는햇빛이 비추자 시든 이파리로 변하고 말았어요..
그러자 당신은 놀란 얼굴이 되어 초조해하는 나를 바라보았지요.

<리골레토>는죄의식과 순수함, 절대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음악이 공존하는 처절하고 감동적인 오페라가 아닌가. 

 이렇게 계속할 수는 없었다. 이건 애초부터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서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안간힘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이끌린다는 사실, 어쩌면 그것은점성술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현재우리의 상태인 것 같았다. 

엉망이 돼버린 내 생일날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건 마치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장애물을 쌓아가는 것과도 같았다. 

축제는 가장 즐거운 순간에 떠나야 한다. 서로 더 많은 눈물을 흘리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상대에게 그 사실을설득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난 데시레가 가정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내겐 불을 지필 수 있는 나무 막대기 하나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휘어버린 한 움큼의 나사와 펜치 하나뿐.

그녀는 자신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명료한가!

 가엾은 데시레, 그녀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서는 내가 강해져야만 했다.

릴에 감긴 줄을 조심스럽게 풀그그물로 건져 올려서비늘을 벗기고 화를 발라난 다음맛있게 먹을 수도 있었는데,
그 망할 사랑이란 높은어느새 저 멀리 달아나고 없었다.

우린 각자의 삶 속에 파묻힌 채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낭떠러지 위로 다리를 놓으려는 노력은커녕 서로를 그 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린둘 다 기적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난 그가 자신에게도영혼이란 게 있음을 인정하기를 바랐고, 그는 밤새 내 배 위에서앞치마가 자라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그러면서 우린치열한 싸움을 계속해나갔다. 

여전히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리고있었으므로 자칫 블랙홀 속으로 빠져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우린 지금까지 그 누구와 그랬던것보다 더 신랄하게 언쟁을 계속했다.

더이상함께 좋은 시간을 보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우린 끊임없이 각자의 바리케이드를 높이 쳐올려야 했다.

모든 건 시각했던 곳에서 끝이 났다. 묘기에서,

벤니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언젠가 당신과 내가 같은 곳에 묻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는 골똘한 표정으로 외리안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난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난 잠시 후에야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더이상우리를 믿지 않았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가슴 한쪽이 저려왔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데시레를 만나기 전에 느꼈던 무기력 상태에 빠지지 않았다. 내 생각이 마치 하나의 논리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내 삶에서 가장 근사한 것을 포기했다. 바로 이것을 위해. 그래서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없었던 것이다. 내 모든 것을 던져야 했다.

마치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플 때 아스피린 두 알을 삼킨 느낌이었다. 극심했던 고통이 견딜 만한 만성 통증으로 변해갔다.
3주가 지나자 아니타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치어진 직후, 가끔씩 밤에 전화벨이 울릴 때가 있었다. 누군지알기만 건화를 받기는 않았다. 자칫하면 또다시 덫에 걸려들고 말게 편하니까.

시간을 1분 1분 잘게 나누어쓴 알약처럼 삼킨다.
내 앞에 남아 있는 수많은 시간들을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우리는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것으로 자신의 지옥을 만든다.


난 내가 저지른 잘못들과 놓쳐버린 모든 기회를 영화 속 장면들처럼 하나하나 떠올리며 나만의 지옥을 만들어냈다.

난 꽥꽥거리며 세상만사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동하는 알밑고 거만한 도널드 덕을 닮아 있었다. 각자‘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서로에게 맞춰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그가 나한테 맞야 한다고 생각하는 도널드 덕. 

희생은 벤니가 하야 한다는 전제하에 온갖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궁리했던도널드 덕, 내가 생각이란 걸 했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난 언제나 그가 나를 더 원하고, 따라서 선택권은 언제나 내게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엄청난 딜레마에피겨 있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감내할 수 있을지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 아무것도 포기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순간에는 벤니에게 마구 화가 났다. 그 역시 자신의 삶은아주 작은 부분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자신의 집에서 살라고했고, 내 일도 거의 포기하라고 했으며, 아이도 비올레트에게 맡기라고 했다. 그가 유일하게 양보한 것이라면 아마 방을 다시 꾸미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것조차 내 의견은 묻지도 않았다. 고집불통 독불장군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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