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죽은 자들의 편을 들어줄까?
누가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고,
그들의 문제에 귀 기울여주고,
그들 무덤의 화초에 물을 줄까?

날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외로움과 환멸에 찌들어 상태가 별로 안 좋은 여자거든요. 

나는 지금 닳디닳아 반들반들해진 진녹색 벤치에 앉아 남편의무덤을 바라보며 성질을 부리고 있다.

난 그가 자신의 묘석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 과정의 한 요소이다." 남편은 생물학자였다.
고마워, 외리안,

난 이곳에 올 때마다 적어도 한 시간씩은 머물다 갔다. 억지로라도 슬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울해질 수 있다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늘 내 곁에 있었던 남편의 존재감과 평범한 일상이다. 

더블베드의 반쪽은 절대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외리안과 함께였을 때는 내가 누군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우린 서로를 규정지어주는 존재였다. 부부라는 관계는 바로 그런데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럼 이제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는 이제 우연히 나를 보게 되는 사람들의 시선에 온전히 맡겨진 여자다.

건강, 도기히 그 여자를 못 견디겠어. 못 견디겠다고!
대체 왜 허구한 날 거기 앉아 있는 거지?

난 어머니 무덤을 손질한 후 그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잠시쉬면서 생각을 가다듬곤 했다. 무언가 매진할 수 있는 일을 찾아마음을 추스른 다음, 하루 이틀 버틸 힘을 얻어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가 앉아 있었다.
유리창 너머에 오랫동안 걸려 있는 빛바랜 컬러사기 같은 모습으로, 상기 검은 금발, 강백한 얼굴, 빛 눈썰과 속눈,
고 바랜 시깔의 , 대부분 하늘색 아니면 테이기색이었다. 그녀는 데이기사 여인이었다. 

☆그녀의 모든 것은 일종의 거만함과도같았다. 약간의 화장과 예쁜 액세서리만으로도 자신이 어떻게보일지,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지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암시할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빛바랜 모습은 이렇게 말하고있는 듯했다. "난 당신의 생각 따위 관심 없어요. 당신이란 존재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요."

벌어진 상처의 가장자리는 다시 아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멈춰 선 시곗바늘은 누군가 다시 작동시켜주기를 바란다.
(언제까지나 1시 30분에 머물러 있는 건 좋지 않으니까!)
하지만 절단된 수족에는 환상통이 존재하는 법.

내가 잘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외리안은 누구하고도 다투는법이 없었다. 그는 상대방이 지쳐서 두 손을 들고 말 때까지 조곤조곤 자신의 관점을 설명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변함없이 온화해주시는 바람에 내 쪽에서 자제력을 잃은 적이 한두 번쯤 있긴 했다. 난 마치 어린아이처럼, 가구를 발로 차고 요란하게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고, 난 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내 꼴만 우스워지고 그가 이겼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 될 테니까.

☆그러다가 문득 우리가 진정한 삶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신문을읽고 있는 동안 진짜 삶이 창문 앞에서 전속력으로 달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언제나 현실그 자지 자이를 안경으로 가로막아놓는 것 같아." 나는 훌쩍거다 그 누구에게도, 실지어는 나 자신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그 있다는 생가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어느 이른 아침 큰 뇌조의 짝짓기를 관찰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섰다가 트럭에 치였다. 사고 당시 그는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새소리를 듣고 있었다. 

난 거창하게 시를 쓸 생각 같은 건 없다. 다만 삶이란 것을 이미지로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뿐이다. 

내겐 거의 매일 메모를 하는 습관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일상을 정돈하기 위해 해야 할일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과 같다. 내가 꾼 꿈을 다른 사람에게이야기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난 누구에게도 내가 쓴 글을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을 파악하기 위한 각자의방법이 있는 거니까.

꽃무늬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만년필 뚜껑을 조심스럽게돌려 열었다. 만년필이라니. 볼펜이 발명된 게 언제인데 아직까지 만년필을 쓰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천천히 꼼꼼하게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의 그런 행동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엄청나게, 무덤 앞에서 메모를 하는 이 여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내가 조합해낸 그 이미지가 너무 웃겨서 난 함박웃음을 지은채 그녀를 바라보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미처 평소의 표정으로 되돌아오기도 전에 그녀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그러면서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게 아닌가 !
뭐야, 이 여자가 그 여자 맞아?
잿빛 무덤 앞에서 창백한 입술을 꼭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던베이지색 여인이 이런 미소를 지을 줄도 알았나?

언뜻 보니 그녀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내 손에 머물러 있었다.
수년간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훈련을 했다. 나는 내손을 주머니 속에 감추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 손가락 벤니, 그게 바로 나요. 가지려면 가지고 아니려면 말아요!"

그해 가을 동안 파란 수첩에 적어둔 메모를 읽다보면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서전과 판타지소설 속 인물들이 내게 이렇게 물어오는 것 같았다. 
당신은 무엇때문에 살죠?
 이토록 덧없고 짧고 통제 불가능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요?

삶을 채우고 있는 것은 버스 정류장에서의 끝없는 기다림과진눈깨비뿐인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오래된 영수증을 정리하거나, 벽장을 더욱더 비좁게 만드는 데 최적인 이케아 정리함을 사거나, 오래된 슬라이드필름을 분류했다. 작년에 주워 모은 낙엽들만큼이나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사진들이긴 했지만,

라디오에서 쏟아내는 활기찬 목소리들은 아직 어딘가에선 삶이 계속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자기 자신을 납득시킨다는 건 참 힘든 일이야, 그렇지?"
메르타는 시가릴로 너머로 나를 흘끔거리며 담담하게 되물었다.

가끔씩 잡지 같은 데서 사진 속 인물은 기사의 내용과 아무런관련이 없습니다‘라는 문구를 볼 때가 있다. 외리안이 대략 그랬다. 그래서 더이상 그에게 질문을 하지 않게 됐다.

그 역시 내게 별로 궁금한 것이 없어 보였다. 어쩌다 뭘 물어볼 때도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관심 표명하려고 애쓰는 중. 그래서 나도 더이상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것 역시 그에겐 아무런상관이 없는 듯했다.

난 사과나무의 꽃향기를 꿈꾸고
넌 사과가 잔뜩 담긴 바구니를 들고 뒤뚱거리지.
우리 둘 중 누가 사과에 대해 더 잘 알까?

성인이 됐으면서도 가정을 꾸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여성들의 삶에 분란을 일으키는주칫덩어리라도 되는 양.

 내가 점심값을 내려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 고마워요, 사양하지 않을게요. 실은 오늘이 제 생일이거든요. 서른다.
섯번째,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할게요.
그 순간 난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다른 선물은 기대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

딸깍, 하는 느낌과는 좀 달랐다. 그보다는 방심하고 있다가전기 울타리에 감전된 것 같은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는 1층에서는 미키마우스 귀고리와 나비 모양 비누, 그리고보라색 스타킹을 샀다. 2층에서는 반짝이는 빨간 공, 연인의 모습이 그려진 포스터(그들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거대한 조개껍데기를 타고 바다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자기 것처럼 특이하게 생긴 모자를 샀다. 산림조합‘ 이라는 글씨는 물론 없었지만,
마지막 상자 속에는 하모니카가 들어 있었다.

"옆 무덤의 남자를 만났어!"
난 어린 소녀처럼 킥킥거렸다.

"난 벤니예요, 벤니 쇠데르스트륌. 당신 성이 발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옆 무덤에서 그 성을 본 적이 있거든요."
"네."

최고급 브랜드의 운동화와
믿을 만한 나침반이 다 무슨 소용일까?
지도를 똑바로 볼 줄 모른다면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어김없이 문제가발생했다. 꼭 하루 만에 내 안에는 숱한 십자수와 다양한 거름제조 방식만큼의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난 더운물에 몸을 담근 채 보케리니를 틀어놓고 다겐스 뉘헤테르〉를 읽으며 혹사당한 내 몸을 달래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 다음 따뜻한 차를 마시고 새하얀 시트에서 잠들고 싶었다.
내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고독을 맛보며,
잠깐 동안의 정적이 내 혀 위로 녹아들기를 기다린다.
오직 희뿌연 햇살만이 나를 방해할 뿐이다.

☆나는 흰색 목욕 가운을 두른 채 소파에 길게 누워 빈둥거리기를 좋아했고 창문으로 스며들어온 햇살이 방 안에 그려내는 줄무늬를 보는 게 좋았다.

때로는 한 손을 들어 손에 줄무늬를 만들기도 했다. 정적을 깨는 것은 윙윙거리는 냉장고 소음과 늦가을까지 남아 있던 파리가 멍청하게 유리창에 부딪혀대는 소리가 전부였다.

나는 그의 삶 속에 들어가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려 애썼다.
하지만 어떤 그림도 그려지지 않았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가 이어졌고, 난 더이상 스며드는 햇살과 노닥거릴 수 없게 되었다. 회색빛 속에 잠긴 내 아파트는 치과 대기실만큼이나 무미건조해 보였다. 

그토록 좋았던 것이 어떻게 이렇게 나빠질 수 있을까?
벤니 역시 이 시험 단계에서 나와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게분명했다. 그동안 전혀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그 순간, 살라미와 술라미트가 떠올랐다. 사카리아스 토펠리우스의 시 「은하수」에 나오는 두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어렸을적 의미도 잘 모르면서 무척이나 좋아했던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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