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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머즈 하이 1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박정임 옮김 / 함께(바소책)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클라이머즈 하이(Climber's High)
암벽등반을 할 때 흥분상태가 극한까지 달해 공포감마저 마비되어버리는 현상.
그 마비된 공포가 풀려버리는 찰나, 마음 속에 억압되어있는 모든 공포심이 한꺼번에 분출되어 버리고, 더 이상 한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는 진짜 공포가 온다.
★★★★☆
(별의 개수는 평가가 아니라, 감동과 만족감의 정도이다.)
제목이나 표지의 그림만으로는 한번 들춰보고픈 생각은 들지 않는 책이다.
순전히 요코야마 히데오의 전작에 대한 만족감, 그의 다른 작품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 책을 골랐다.
그리고 만족감과 감동은 '사라진 이틀'과 다르지 않다.
그의 이야기는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긴장과 감동을 가져다 준다.
일본의 군마 현.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대도시와 달리, 그저 한적한 지방.
그래서 그 지방의 신문사 역시, 현의 모습과 닮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 날, 520명의 사망자를 낸 비행기 추락 사고가 발생하고, 장소는 바로 가장 험난하다고 알려진 암벽 봉우리, 츠이타테이와이다.
조그만 지방에 날아들어온 전대미문의 큰 사건을 두고 키타칸토 신문사 기자들은 최고, 최대, 최초라는 흥분과 기대, 열의, 사명 의식에 들뜨게 된다.
비행기 추락 사건의 총괄 데스크를 맡게 된 유키.
그에게 패배감과 질투를 느끼는 선후배 기자들.
현장 사건 기자라는 자부심으로 독선적이 되어 버린 후배 기자.
사건 현장의 참혹한 모습에 뒷걸음질치는 신참 기자.
그리고 추락 사건 당일, 유키와 암벽 등반을 계획앴던 안자이의 갑작스런 사고.
이들과 어울려 사건을 기사화하고 신문으로 찍어내는 일련의 과정에는,
사명감, 특종에의 일그러진 욕망, 의협심, 선정적인 자부심이 얽혀 있다.
그리고 그 모두를 관통하는 한 마디는 '내려가기 위해 오른다'는 안자이의 말이다.
오랜 시간 기다려온 등반가로의 복귀를 하루 앞둔 시점,
안자이는 왜 유흥가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는 걸까.
지연성 의식장애, 즉 식물인간이 된 안자이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은 없다.
다만, 여러 들춰지는 사실들을 통해, 그는 전무의 개이길 포기하고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거라는 추측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일견 현학적 혹은 상투적으로 들릴 이 말에 대해 유키는,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네의 여러 이상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모든 사고를 '오르는 것'에 집중하는 험난한 압벽에의 등반처럼, 가열차게 질주해서 정상에 올랐다가도 언젠가는 내려가는, 삶도 마치 인생의 정점에서 멋지게, 혹은 자연스럽고 부끄럽지 않게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라는 깨달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타인을 이해하고 격려하고, 또 연민해야 하는 것이다.
광고부장인 쿠라사카는 비행기 추락 사고 현장을 찾아가 부서진 비행기 파편과 널부러진 시체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파편들을 몰래 주머니에 감춰 넣는다. 말하자면 (비열한) 전리품이다.
사고 현장의 비참함을 가장 처음 목격했던 신참 기자는 그를 코뼈가 부러지도록 이가 나가도록 흠씬 때려눕힌다.
잔인하고 멍청한 놈, 인간의 탈을 쓰고는 그럴 수 없다.
그렇지만 그를 어떻게든 구슬러야 한다. 그래야 신참자의 기자 생명을 구할 수 있다.
그런 마음으로 찾아간 길에, 유키는 놀이터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다 늙은 개의 배변을 도와주고 있는 쿠라사카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 속에서 유키는 혐오와 연민이 뒤섞인 감정을 느낀다.
<쿠라사카는 기자인 척하고 싶었던 것이다. 광고를 따내기 위해, 대화의 소재를 찾기 위해 오수타카산에 올랐던 것이 아니었다. 스폰서에게 자신은 그냥 영업사원이 아니라 기자의 일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계 최대의 사고 현장을 밟았다고 얘기하고 사진과 기체의 파편을 보여줌으로써 '호오!'라고 느끼게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단지 그것을 위해 쿠라사카는 오수타카산에 올랐던 것이다. '기자병.' 편집국을 떠난 기자들이 많이 걸린다.
기자인 척하다가 진짜 기자에게 맞았다.>
인간을 보는 모습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 어느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감정이란 완벽한 하나의 통일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키는 그의 내면을 정확하게 읽었고, 유키가 느낀 대로 쿠라사카는 '사고'로 위장한 채 그 불순하고 혐오스러웠던 순간을 회사에 발설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건 이런 것일 게다. 연민으로 이해하는 것.
아! 하고 맞장구 치는 이런 두근거림의 순간은 이야기의 곳곳에 드러난다.
<저의 아빠와 사촌 오빠의 죽음에 울어주지 않았던 인간들을 위해서 전 울지 않겠습니다. 가령 그것이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사고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도.>
위대한 사람의 죽음, 그렇지 않은 사람의 죽음.
불쌍한 죽음, 그렇지 않은 죽음.
언론의 관심을 받는 죽음과 그렇지 않은 죽음.
이런 불합리함을 원망하는 어느 독자의 투고는, 지금 당장 죽음을 맞닥뜨린 유족들의 슬픔이라는 큰 장애물을 뒤로 하고, 편중되지 않을 권리를 앞세워 신문에 실린다.
유족과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칠 거라는 동료들의 불안과 항의에 대고 유키는 소리친다.
"유족이 소란을 피워? 가족을 잃은 사람이 그 여학생의 기분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랬다.
죽음이란 불가항력에마저 가치가 매겨지는 세상을 혐오하는 데도, 그 혐오에 이의를 제기하는 독자들의 정의감에도, 혐오와 분노를 이해하는 유족들의 안타까움에도 각자의 진실은 있다.
그리고, 이 일을 빌미로 퇴직과 한직을 권고 당하는 시점에서, 가족의 안위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 자존심을 버리고 한직을 선택하는, 그 한직에 정말 만족하는 정년의 나이인 유키에게도,
인생은 똑같이 '(잘) 내려가기 위해 오르는' 험난한,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는 암벽등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