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열규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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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거듭되새기는 죽음들

죽음이 타자라는 것이 절망스러운 것이다. 내가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는 것이 최후의 나의 것으로 주어진다는 것, 그건 우리가 경험할 최대의 아이러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나와 별개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한다.

나를 덮어다오, 클로버여
나를 덮어다오, 풀이여.
달콤한 날들은 지나갔으니
이제 지새야 할 밤이다.

내머리 둘레에는 초록의 팔
내 손 위에는 초록의 손가락.
지구는 그 고요한 땅에
이보다 더 고요한 잠자리는 갖질 못했다.

리처드 에버허트의 시 죽음의 신을 잠의 신, 휘프노스의 형제로 간죽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나라에 시에서 죽음에 대한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관들을 제시해두었고, 잠과 죽음을 비슷한 상황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갈색 마을 안을 어둔 것이 걸어서 지나간다.
여러 번 가을 돌담에다 그림자를 지우면서.
사내와 여자가 지나가고 이윽고 죽은 이가 나타나서는 사람들의 싸늘한 방에 잠자리를 편다.

인간이 죽음에 부치는 생각이란 이런 것이다. 모순과 착종, 분열과 갈등, 강박과 망상..
이 모든 것이 칡덩굴처럼 죽음을 칭칭 감고 돈다. 이럴 수도 저런 수도 없는, 그러면서도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한, 그래서 뒤엉긴 실타래 같은 것, 그게 죽음을 부치는 우리들 생각과 감정의 궁극이다. 삶에 허덕이기 전에 우리는 먼저 죽음에 허덕이는지도 모른다. 살아 숨쉬고 있는 행위자체는 하고 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에는 벅차고 힘들뿐이다.

결국 나만의 죽음을 만나다.

토마스만 의 환멸에서는 주인공이 집요하게 자살을 결의하고 또 결의한다. 그 속에서 결단,후퇴와 전진 사이를 무수히 오락가락 한다.
한숨, 번민,결심, 단념,포기 또 번뇌...
그는 절벽머리에 선다. 눈을 감는다. 이제 발만 내밀면 모든 것이 끝난다 이 발 한 짝, 정말이지 단지, 이 한 발자국이면 모든 건 끝난다. 두 발 허공에 던지면 다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직 그 뿐. 그것뿐......

아!? 이걸 위해서 그 기나긴 머뭇댐, 준순, 주저, 망설임이...말도 안돼! 이 순식간의 일을 위해서 그 긴긴 세월 두고두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번민했단 말인가?

그러던 것에 집착하고 달라붙고 한 뒤 끝이 고작 환멸이라니. 죽음은 다시 한 번 더 멀어지고 만다.

환멸이란 꿈이나 기대나 환상이 깨어짐. 또는 그때 느끼는 괴롭고도 속절없는 마음이다.
나만의 죽음 앞에 무수한 고뇌한 결론은 나약하고 순간적인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느낀 후 죽음을 대면하는 주인공은 죽음이라는 두려운 속에 살았던 본인의 두려운 마음 뿐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다시 삶을 살아가는데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삶의 변화기가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2부. 한국인의 죽음, 그 자화상

산 사람의 방위, 죽은 사람의 방위

이사를 가서도 우리는 머리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항상 예사롭게 살펴본다. 극단적으로 어느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자면, 몸에 좋다거나 아니면 해롭다는 말들을 흔하게 쓴다. 더러는 어느쪽 머리 방향이면 흉한 꿈을 꾸게 된다고 믿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이사할 때도 '손 없는 날'에 이사가 몰려 오히려 손 없는날이 이사 비용도 더 비쌀정도다.
이렇게 방향으로인해 산자의 방향,죽은자의 방향을 의미있게 생각하고 그것에 따르게 된다.
신기한건 신라인들의 머리 방향이다. 이 시대의 죽은 이의 머리 방향은 대체로 동향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해를 바라고, 해돋이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누워 있는 사람들, 옛 신라인들은 죽어서 그렇게 누워 있었던 것이다. 불교에서는 내세, 죽음의 세계를 서방에 두고 있다.죽음의 방위를 서나 북에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옛 신라인들의 동남향의 머리 방위는 죽은 사람만이 취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 할 수없다. 동남향은 태양의 방위이기 때문이다. 옛신라인들은 죽음 그 자체를 삶의 역으로만 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이 지상에 있고 주검이 땅 밑에 누웠다고 해도, 그 지상과 지하만큼 대극적인 상거가 삶과 죽음 사이에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죽음은 또 다른 삶, 제2의 삶으로 그들에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죽음에 어둡고 습기찬 그늘이 질 수가 없다. 이별은 다만 재회의 전제가 될 뿐이고, 존재의 소멸이나 상실 따위와도 무관하게 된다.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신라인들의 모습은 옛 사람들에게 느끼는 신앙적은 느낌 그 이상의 초월적인 죽음에 대한 전환전 사고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고 놀라울 뿐이었다. 직접적인 신라시대 무덤에 방향을 다 조사하여 넣은 것도 인상적이었고, 조상들의 그 의연함에 감탄할 뿐이었다.

3부. 어제의 거울에 비친 오늘, 우리들의 죽음

죽음이라는 음산한 그늘은 개인 각자의 죽음에까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병원의 보편화 혹은 의료의 대중화를 더불어서 대부분 병원 침상에서 맞는 죽음은 오직 '불치의 결과'일 뿐이다. 이로써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의, 특히 의술의 결함이거나 실수거나 아니면 한계로 계산되고 만다. 그저 주어진 죽음에 일반인들은 주어진 상황 그대로 함락하면 그만이다. 죽음의 몰가치화하고 개성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흔해빠진 것이 되고 그래서 거의 모든 죽음은 별것 아닌 게 되고 말았다. 현대의 군중사회에서 각자의 삶이 겪은 그 무명, 그 이름 없음은 죽음에서 결국 끝을 본다. 죽음은 다만 말뿐이다. 죽음은 가고 죽음이란 말만이 황당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장례식, 이젠 한국적 현실에서 집안의 빈소 차림은 없어지고 다만 병원 영안실에서만 진행되는 그 장례식은 오직 죽음을 멸각하고 소각하고 드디어는 소실하는데 기여한다. 규모가 클수록 겉이 화려할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소실의 효과, 지워 없애기의 효능은 커지는 것이다.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각하기 위해서 장례라는 절차가 진행된다. 기왕의 죽음을 한 번 더 완벽하게 죽이기 위한 짓이다. 이제 죽음이 죽었다.
작가는 죽음을 대하는 우리 시대의 장례문화를 비판하는 느낌이 났다. 하나의 형식으로 진행되어 사라지는 죽음. 옛 시대의 조상들의 장례형식을 부활해야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죽음을 보내는 우리들의 마음가짐과 세태가 안타깝고 몰인정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최소한의 죽은자를 위한 죽은자를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상황, 그런 마음가짐, 태도는 우리가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죽은자의 입장에서 써내려가는 듯한 글체에서 문득 한번 더 생각해보게 하는 글귀들이 많았다.

죽음의 감정을 마친 무엇인가 흉칙한 것이기나 하듯 밀쳐내도록 부추기거나 혹은 그같이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죽음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다. 메멘토 모리 곧, '죽음을 기억하라'라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뇌리에서 죽음을 몰아내던 자는 죽어서 남들의 뇌리 안에 자리잡을 틈이 없다.


4부. 죽음의 문화적.신화적 형상

우리는 우리의 온 삶을 통틀어 부딪쳐보기 전에는 운명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운명이란 놈의 복면을 벗기지 위해서라도 그 녀석을 향해 돌진 해야 한다. 내던져져 있는 존재이면서도 나 스스로를 내던져보는 존재이기도 한 인간 존재의 비결은 죽음을 두고 한결 더 치열해진다.
모르는 제 눈감음으로써 아예 죽음이 없는 듯이 사는 길이다. 이것이 죽음 앞에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다. 머리만 틀어박고 죽음에게서 숨으려 하는 것이다. 아니면 제 눈만 감고 죽음은 없노라고 하는 것이다.
?죽음을 못 본 체하기 위해 현실적인 일에 정열적으로 몰두할 때가 있다. 그 몰두로 이루어지는 삶이 있다. 그러나 이 정열은 공포 위에서 있고 불안을 딛고 서 있기에 오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오열로 살아가는 삶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오열의 일로 삶을 살아갈 때 불행히도 인생은 도피의 자리일 뿐이다.
인간은 한계 앞에서 비로소 인간다워진다. 인간은 좌절의 덫에 걸려서 흘리는 동통의 피를 머금고 자라는 꽃이다. 인간은 자신이 고양이에게 쫓겨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쥐라는 의식을 더불어 스스로에 눈뜬다. 한계와 좌절, 그리고 극한은 인간 존재를 비쳐내는 거울이다. 자유혼은 그 거울에 의해서야 비로소 모습이 드러난 인간의 존재성이다.

5부.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사랑하고

사람끼리도 자주 만나야 정이 들기 마련이다. 낯이 익는다는 것, 눈에 자주 든다는 것, 그것은 정붙이기의 전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ㅈ에 정을 붙이자면 그리하여 죽음과의 친화를 일구어 내자면 죽음과 자주자주 그리고 절실하게 마음으로 만나야 한다. 삶이 죽음과 정을 붙여야 한다.

죽음이여, 교만치 말라
죽음이여, 거들먹대지 말라.

신체부자유나 고아들을 위한 사회 시설에 대한 님비 현상이나 공동묘지부설 철거를 향한 님비는 이미 우리 사회는 인간사회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지독한 '에고센트리시즘'의 사회적 윤리성을 짓밟아버린다.공동묘지가 혐오시설쯤으로 보였고 그래서 땅값에 아파트 시세까지 떨어질까 걱정이었다는, 산 자들의 이 교만, 이 허망한 욕심이야말로 어디 딴 세상으로 나가야한다. 남의 죽음에 대한 부정. 상문 곧 남의 초상집에 문상 갔다가 불행히도 횡액을 당한듯이 묻어오는 상문살, 곧 독기운이야 말로 상문살이다.
죽음은 어차피 우리들 누구나의 것이다. 죽음은 남의 것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자의 타인에 대한 윤리 의식은 죽은 이를 향해서도 지켜져야 한다. 요즘은 그런 죽음을 향한 살아 있는 자들의 윤리 의식이 아쉽다.

모든 죽음에 대한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생각.
이토록 많은 죽음에 대한 연구와 죽음을 생각하며 적어내려가는 김열규 교수의 외침 속에 귀 기울여보고 느껴본 후, 죽음에 대한 마음가짐은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삶의 의연함과 소중함은 죽음을 등한시 하는 것이 아닌 마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소중한 시간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죽음 앞에 맞서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던 현자들을 통해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웃음을 들이키소서,죽음 앞에서, 부디 부디.

윤동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책을 제공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메멘토모리,죽음을기억하라#사무사책방#김열규#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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