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되어버린 남자
알폰스 슈바이거르트 지음, 남문희 옮김, 무슨 그림 / 비채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책을 눈으로 읽고 생각하고 내용을 그리는 일련의 단계를 밟아 읽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책의 내용을 흡수 시키는 것마냥 책 그 자체에 푹 빠져 내용 속을 헤엄치듯이 읽어나간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책을 소장 목적으로 사들이고 꽂아 놓는데에만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흐뭇한 눈길로 겉표지를 바라보았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이 되어버린 남자]를 읽고 흠칫 놀라며 자신에게도 어떤 증세가 나타난 적이 있는지를 살피게 될지도 모른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한 얼굴은 겉표지를 꽉 메우고 있어 아마도 이 남자가 책이 되어버린 남자겠거니 예상하게 만든다. 책이 된 이 남자는 불행한가, 어째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가. 알 수 없는 내용을 그려보며 페이지를 넘긴다.

 

매혹적인 겉표지와 아름다운 첫 문구, 책종이의 질, 책의 완성도를 높히는 삽화들, 책을 소유하고 싶은 충동은 어느 것에서나 자극받아 일어난다. 이 책의 주인공인 비블리씨 역시 책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집에 있는 가구라고는 오로지 의자 몇 개와, 잠 자는데 필요한 매트리스가 전부. 그러나 의자까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책을 올려두고 있는 실정이니 말 다 했다. 여타 애서가처럼 책들을 꼭 꼭 숨겨 두는 것도, 장식용으로 두는 것도 아니라 일단 손에 들어온 책들은 전부 읽는다는 것이 다른 책 수집가와는 다른 점이라고 스스로에게 큰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벼룩시장에서 책 한 권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 무늬도 없는 겉표지에 이름조차 붙어 있지 않은 책이었지만 어쩐지 자꾸만 눈길이 향한다. 그 책을 판매하는 걸로 보이는 상인에게 물어보지만 상인 역시 처음보는 책이다. 결국 비블리씨는 그 책을 훔치고 만다. 그는 책 속에 푹 빠져 다른 어떠한 행위를 할 생각도 잊은 채 마지막까지 치달아 읽어 나간다. 하지만 갑자기 낱말이 세세하게 분해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순간 다른 모든 책들에 흥미를 잃은 그는 이름 없는 책, 그 단 한 권에 사로잡혀 그 책 안에 들어가고자 노력하게 되지만 그럴수록 낱말과 단어는 해체되고 분해되어 머리를 비껴나갈 뿐이다.

 

책을 읽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한 번쯤은 겪었을 법한 이야기들이 책으로 변해가는 남자의 상황과 묘하게 맞물리며 독자들에게도 은근한 공포심을 안겨 준다. 책으로 변해도 주위 상황을 식별하고 느낄 수는 있으니 오히려 책인 자신의 삶을 여유자적하게 즐기며 느긋하게 살아가는 데에는 좋을지도 모른다. 책으로 변해서 나의 생각을 페이지의 글자로 만들어 올리며 내 생각을 읽어 주는 독자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인지, 나를 방치하는 사람들에게 공격까지 할 정도로 증오심을 느낄 것인지. 독자에 따라 아름다운 생각만을 보여줄 수도 있고 추악한 마음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설정은 한가지 문장을 놓고도 수 백가지의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한 번 책의 표지를 떠올린다. 비블리씨는 왜 비명을 지르고 있는가. 저 속에 감춰두었던 나의 책들에게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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