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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의 오랜꿈은 ‘출판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책’을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책은 데뷔소설이자 유작이 되어버렸다. 책을 쓰면서 건강이 악화된 매리 앤 새퍼는 조카 애니 배로스에게 마무리를 요청하였으나 책의 출간을 보지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소설은 재기넘치고 발랄한 32세 여주인공과 더불어 여러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감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작가의 나이 40대 중반에 우연히 찾은 건지섬이 책의 모티브가 되었고, 실제 집필하기 시작한것은 그로부터 20년 이후인 60대 중반 이었다니 새퍼 할머니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게다가 편지를 모아 책으로 엮는다는 발상이 매우 기발하다.
이야기는 영국 채널 제도의 건지섬에 사는 '도시 애덤스'의 용기에서 비롯된다. 그는 찰스램의 책을 더 구해보고 싶어서 중고책(찰스램수필선집) 표지에 적힌 책의 옛주인에게 편지를 쓴다. 수신자 줄리엣 역시 찰스램의 열렬팬이었으므로 기뻐하며 그를 도와주게된다. 작가인 그녀는 도시를 통해 건지섬에 대해 알게되고 그가 소개한 2차대전중 창단된 감자껍질문학회에 대해 칼럼을 쓰게된다. 그 과정에 다른 회원들과 다수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점차 친밀해져간다. 그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기지와 용기가 뛰어났던 엘리자베스의 희생적인 삶이 있었고 건지섬의 친구들이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게된다. 그녀는 결국 건지섬에 직접 가서 그곳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엘리자베스의 남겨진 딸을 돌보며 책을 쓰게 된다. 아름다운 건지 섬에서의 일상은 줄리엣 스스로를 성찰하게 하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과 사랑에 대해 깨닫게 된다.
저자의 바램대로 이 책을 통해 전쟁의 아픔속에서 서로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지켜냈던 많은 이들을 위로받기를 바란다. 또한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인간이 만들어버린 어떤 장벽도 초월한다는 저자의 민음에 깊이 공감한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내는 최선의 방법은 유머’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 열악한 전시에도 열정을 불태울 대상을 찾아 슬픔을 잊는다. 자신보다 더 비참한 이들을 희망으로 돌보는 용감한 엘리자베스를 비롯하여 건지섬 사람들이 들려주는 전쟁의 기억은 몹시 슬프고 감동적이다. 독자는 편지를 읽은 후 줄리엣처럼 독일군 점령기의 채널제도에 대해 자료를 찾게 되고 이 다음엔 건지섬에서 또 누가 편지를 보내올까 궁금해진다.
감자껍질문학회 회원들은 개인의 경험과 성향에 따라 다양한 책을 선택하고 함께 독서를 해오고 있다. 세네카를 통해 비참한 주정뱅이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존 부커이야기처럼 책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편지로 생생히 들려준다. 그렇게 찰스 램, 제인 오스틴, 에밀리 브론테, 찰스 디킨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오스카 와일드의 책을 만나게 된다.
이책에는 줄리엣과 수많은 사람들의 편지들이 시간순으로 소개되어 있다. 북클럽, 출판사, 친구, 사랑, 전쟁이야기 등이 어찌 보면 마구 뒤섞여 있다. 그러나 시간순이므로 독자가 사건들의 전후 관계를 스스로 붙들어 쥐고 이해하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다. 편지글이 주는 송수신자의 성향이나 문체를 섬세하게 살펴본다면 읽는 재미가 더해질 수 있다. 줄리엣이 친구 소피아와 주고받는 편지는 사랑, 일, 가족을 향한 보편적인 감성을 담고 있기에 요즘 젊은 세대가 읽더라도 충분히 공감된다. 책 후반의 줄리엣을 초반의 캐릭터와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다. 중반부터인데 소개되는 편지부터 엘리자베스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긴장감과 몰입도가 높아진다. 이와 병행해 줄리엣의 사랑찾기도 지속되기에 이책이 연애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책을 읽다보면 ‘인생을 아름다워’라는 전쟁영화가 떠오른다. 유머와 긍정적인 캐릭터들을 통해 전쟁이미지가 품는 피로감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주인공 줄리엣은 전쟁중에 잡지와 신문에 칼럼니스트로 활동한다. 독자를 웃게하는 논조로 많은 인기를 얻지만 가볍고 경박하다며 공격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미디어들은 그녀의 논조처럼 ‘전쟁을 다루면서도 유쾌한 이야기’, ‘유머 감각과 인간애를 지키며 전쟁을 견뎌내는’ 라는 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작품속으로 ...........
아마도 책들은 저마다 일종의 은밀한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기한테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모양이에요 -p20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 -p22
난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어요(사랑에 빠졌다는 생각, 이게 바로 비극이에요). -p42
우리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는 이유로 이 일에 대해 뭔가 조언해줄 필요는 없어요. 정말이에요. 사실은, 그냥 아무 말 않고 넘어가주면 정말 고맙겠어요. -p45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내는 최선의 방법은 유머’ -p56
‘내게는 숲과 계곡을 향한 열정이 없어. 내가 태어난 방, 평생 내 눈앞에 놓인 가구, 충직한 개처럼 어디든 나를 따라다니는 책꽃이와 낡은 의자, 오래된 거리, 햇볕을 쬐던 광장, 예전에 다닌 학교……. 이래도 자네의 ’산’이 없다고 해서 내게 열정을 불태울 대상이 부족해 보이는가? 나는 자네가 부럽지 않아. 오히려 가엾게 여기지. ‘마음’만 있다면 무엇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정년 몰랐단 말인가.‘ -p179
새로운 사람이나 사물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 일종의 에너지를 세상에 내뿜고, 그것이 풍부한 결실을 끌어당긴다고 해요. -p180
사실 독일군 병사들 역시 처참한 지경이었습니다. 밭에서 먹을 걸 훔치고 주민들 집 문을 두드리며 음식 찌꺼기를 구걸했지요. 하루는 어떤 병사가 고양이를 잡아 .........(생략)....참으로, 참으로 서글픈 장면이었어요. 그걸 보며 욕지지가 솟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 히틀러의 제3제국이저기 있네. 외식중이군.” 그러자웃음이 터져 나왔고, 이내 죽을 듯이 웃어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만 당시에는 그렇게 되더군요. -p228
세네카가 이런 말을 했지요.
‘작은 슬픔은 말이 많지만, 크나큰 슬픔은 말이 없는 법이다.’ -p233
“매일 밤 우리는 뜬눈으로 누워서 연합군 탱크가 수용소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소리를 기다렸어요. 내일이면 자유의 몸이 되리라 속삭이면서. 우리가 죽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아요.“ -p339
" 그런 용기가 없는 편이 엘리자베스에겐 더 나았을 텐데.“ 그래요 하지만 우리모두에겐 더 나쁜 일이었겠죠 -p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