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 잡혀간다 실천과 사람들 3
송경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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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꾸는 꿈조차 검열당했던 시대가 있었던가? 바라는 세상을 입밖에 내미는 게 죄가 되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던가? 희망버스가 쌍용차로 가야한다는 말 한마디에 송경동은 구속이 되었다.

 

  이 책, <꿈꾸는 자 잡혀간다>는 모든 집회 현장보다 아름답지만 어떤 시위보다 투쟁적이다. 그 이유는 그가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의 고통을 지나칠 수 없기에 송경동은 끊임없이 연대하고 투쟁한다. 그가 낸 이 책조차도 하나의 연대로 읽힐 수 있는 지점이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처참하고 처절하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꿈을 꾸기 때문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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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조현 지음 / 민음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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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어쩌면 소통의 가능성에 대하여

-조현,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 나는 끝없는 이물감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보통 소설집을 읽으면 작품집 전체의 느낌이 머릿속 어딘가에 그려지는데, 이 소설집은 그렇지 못했다. 덕분에 이틀을 이 소설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이물감에 대한 해답은 조현의 상상력이 발원하는 자리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조현이 S.F.적 상상력을 사용하는 방법은 지금까지 한국문학에서 봐왔던 방식과는 다르다. 이전까지의 소설들은 지구라는 행성 혹은 대한민국이라는 도시에서부터 시작해서 기린과 펠리컨이 갑자기 나타난다든지(박민규), 전세계에 전염병이 퍼진다든지(편혜영)한다. 다시 말하면, 지구에서부터 우주로 혹은 환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현은 그 반대다. 그의 상상력은 우주에서부터 시작해 지구로 내려온다. 즉 지구 혹은 대한민국이라는 세계관 대신 조현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우주의 세계관으로부터 소설들이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장르적 상상력의 발원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상상의 전개방식은 그의 이력에서 나오는데 그는 평생 동안 1만 권의 책을 읽었고 지금도 매 년 500~600권의 책을 읽는다고 한다. 장르도 순수문학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사회과학, 철학, 장르소설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책을 독파한다. 이런 그의 이력이 이런 형식의 글쓰기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상상력에서 그가 던지는 물음은 이렇다. ‘우리는 어떻게 소통해야하나? 과연 우리는 소통할 수 있을까? 소통의 도구로써 시는 어떨까?’ 이러한 질문들이 소설집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특히 주목했던 건 소설집에 실린 거의 모든 단편에서 시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시는 소설 속에서 소통의 도구로 쓰인다. 이를테면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춤을 췄던 것과 유사한 용도다.

 

과연 시가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조현의 대답은 긍정적이다. 그는 시가 소통의 가능성을 가지면서도(<생의 얼룩을 건너는 법, 혹은 시학>), 인간의 언어감각이 가지는 한계 때문에 실망하기도 한다.(<옛날 옛적 내가 초능력을 배울 때>) 그럼에도 그가 시를 소통의 도구로 포기하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얽’혀있는 ‘모든 생명의 운명이’(<라 팜파, 초록빛 유형지>) 시를 통해 완전해 지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집은 한편의 시학이며, 소통에 대한 어떠한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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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예쁜 말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2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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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적 과거로의 여행

코맥 매카시, <모두 다 예쁜 말들>



나를 달리게 하는 것은

들판이 아니라 들판에 대한 상상

-이제니, <처음의 들판>

 



코맥 매카시의 <모두 다 예쁜 말들>을 읽고 있으면 자연히 서부의 모래바람이 떠오른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텍사스에서 멕시코까지의 여정은 우리가 서부극에서 보던 황량하고 넓은 평야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에서는 말을 방목해서 키우는 게 주된 생활양식이었다. 그런데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텍사스는 전통 생활양식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산업화에 들어간다. 그래서 전통적인 생활방식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때문에 소설 속에서 처럼 목장을 팔고 도시로 떠나는 것이다. 소설이 말을 이용한 무역으로 돈을 벌었던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것도 이전 생활양식의 종언을 의미한다. 종언에 대한 불안은 아버지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사람들이 불안해해. 200년 전의 코만치나 마찬가지 신세지. 백주대낮에 뭐가 나타날지 아무도 몰라. 심지어 그것이 무슨 색일지조차도. (p.40)



 

주인공 존 그래디는 텍사스적 생활양식의 마지막 계승자다. 그는 말을 사랑하고, 말의 영혼을 느낄 수 있다. 그가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향하는 이유는 그곳에 아직 이전의 생활양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멕시코로 가는 존 그래디는 롤린스, 블레빈스와 함께 한다. 세 인물은 각각 당시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롤린스는 텍사스의 이전 생활양식을 알지만, 새롭게 생성되는 산업화를 지향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그래디를 남겨두고 떠나간다. 블레빈스는 과거 서부의 생활양식을 보여준다. 서부는 땅이 넓기 때문에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켜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서부 사람들은 총에 능하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나서야 한다. 이런 모습은 블레빈스가 말을 훔치고 도망다니는 거친 모습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블레빈스의 죽음으로 과거 생활약식의 종언을 보여준다.) 존 그래디는 중간자적 위치에 서 있는데, 텍사스의 변화를 보면서도 과거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인물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존 그래디의 과거의 생활양식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는 실패한다. 그렇지만 소설이 보여주는 이전 생활양식은 말과 함께 유목하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이를 테면 이런 구절들.

 

모든 말은 하나의 영혼을 공유하기에 말 한 마리가 별도의 연혼을 갖게 되면 대단히 무시무시해진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렇게 떨어져 나온 영혼을 이해하게 되면 모든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도 하였다. (p.158)
 

그리고 존 그래디가 롤린스와 블레빈스의 말을 찾는 모습에서 말과 사람의 영혼을 동일시한는 생각을 엿볼수 있었다. 특히 블레빈스의 말을 찾아 텍사스까지 돌아오는 모습은 블레빈스에 대한 속죄와 이전 생활양식과의 결별을 담아두고 있다. 소설을 읽고 나니 텁텁한 모래바람이 지나간 느낌이다.

 

* 소설을 읽고 알게된 것. 1. 멕시코에 아즈텍 문명이 있었고, 300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그래서 소설 속에 스페인어가 많이 등장한다. 2. 멕시코의 가톨릭은 스페인의 식민지 였을 때 이식되었다. 3. 텍사스는 원래 멕시코의 영토였다. 1836년 독립했다. 4. 멕시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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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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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 - 늙는다, 사랑한다, 그리고 부모가 된다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어렸을 때 막연하게 어른이 되고 싶었다. 키도 크고 돈도 벌고 무엇보다, 과자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권리에서 비롯된 동경이었다. 기억 속에는 아직도 어른들의 허리춤보다 낮은 시점에서 그들을 올려다봤던 장면들이 선명하다. 무언가를 혼자 해냈을 때, 혹은 몸에서 2차 성징의 징후들을 발견했을 때 어른들은 대견스럽게 ‘이제 다컸네’라며 운을 띄운다. 그런 말을 들으면 뿌듯해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왠지 어른이 된 기분이랄까. 하지만 김애란의 문법에 따르면 어른이 된다는 건, 아주 외로워지는 것이다. ‘말만 들어도 단어 주위에 어두운 자장이 이는 게 한번 빨려들어가면 다시는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엇’(67쪽)이다.



열일곱 살의 부모가 낳은 자식이 열일곱 살이 됐을 때 부모보다 늙어버리는 아이러니에서 <두근두근 내 인생>은 시작한다. 조로증을 앓는 아름이의 성장소설과, 아름이 부모의 사랑이 이야기가 담긴 이 소설은 ‘어른이 뭐지?’에 대해서 끝없이 질문한다.



소설은 어른이 된다는 하나의 징표를 신체의 늙음으로 본다. 얼굴에 하나 둘 주름이 페이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진다. 허리가 구부정해지고 걸음이 느려질 수도 있다. 사람을 처음 봤을 때 이런 늙음은 어른을 나타내 주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아름이는 분명 어른이다. 열일곱 해를 살았지만 자신의 부모보다도 늙어 보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겉모습만으로 어른의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른이라는 건, 신체의 성장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마음이 자라야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어른’ 혹은 ‘어르신’이라 부르는 것도 신체의 성장보다는 마음의 성장에 방향이 가있지 않나. 그래서 아름이는 ‘저는 마음보다 몸이 빨리 자라서, 그 속도를 따라가려면 마음도 빨리빨리 키워놓지 않으면 안되거든요.’(129쪽)라고 말하는 것이다.



김애란은 마음의 성장을 사랑하는 것과 부모가되는 것으로 그려낸다. 사랑하는 것은 이성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이별까지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다. 아름은 처음 서하라는 아이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에게도 사랑이 오리라는 작은 희망을 갖게 만든다. 그런데 아름의 사랑은 시작도 하기 전에 거짓으로 드러나고 인생에서 처음 이별을 맞는다. 병을 앓는 상황 때문에 남들과는 다른 사랑의 형태지만 아름이 서하의 진실을 알고 나서 느끼는 감정은 이별이다.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이 (전형적으로) 무언가에 집중하다 자신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린다는 데서 그것을 알 수 있다. (285쪽)



마지막으로 김애란은 어른이된다는 것은 부모가 된다는 것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 전체의 물음인 ‘어른이 뭐지?’에 대한 최종적인 대답이다. 아름이 보기에도 부모의 눈빛은 어딘가 달랐다. ‘한 존재를 책임져아 하는 이들의 피로와 슬픔, 그리고 자부가 묘하게 엉겨’(78쪽)있는 모습은 늙음과 사랑만으로 나타나지 않는 모습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씨 할아버지는 아름과 비교되는 중요한 사람이다. 소설 처음에는 늙었지만 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나온다. 텔레비전에 자신이 안나왔다고 실망하는 모습이나 큰 장씨 할아버지에게 야단맞는 모습은 영락없이 아이의 모습이다. 이 아이다운 모습 때문에 아름과 장씨 할아버지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소설이 진행될수록 장씨 할아버지가 가진 어른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랑도 해봤고, 늙어봤으며 무엇보다 그는 부모였다.



경험이 없기 때문에 부모가 된다는 게 어른이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김애란의 소설을 도식적으로 썼지만 어른이 된다는 건 도식 이상일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몫의 책임이 하나씩 늘어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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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0
리브카 갈첸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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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함의 경계는 항구적이지 않다

리브카 갈첸, <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

어느날 아내와 똑같은 모습을 한 다른 여자가 자신의 집에 들어온다. 아내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내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이,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인이, 아내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아내가 하는 행동과 풍기는 느낌, 사소한 감정표현이 이전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다. 십년을 넘게 살아온 아내가 갑자기 바뀌는 경험은 흔치 않다. 그것도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경우는.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서 아내가 바뀌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다. 현실의 이야기를 해보자. 예를 들어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이유를 물어보지 못하지만 미묘하게 변해있는 친구의 반응과 행동을 보고 유추해 낼 수 있다. 기분 좋고 행복한 일만 있을 것 같던 친구의 변화는 이전에 있던 치구의 모습과 분명 ‘다르다’.

주인공 레오는 아내의 작은 변화들과 변화들이 축적돼서 쌓인 현재의 모습을 아내가 바뀌었다는 극단의 상상으로 몰아간다. 이러한 변화는 레오가 부부생활을 하면서 두었던 ‘친밀함의 경계’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늘 그런 식이었다. 나는 우리가 친밀함에 경계를 두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 좋았고 그런 노력이야말로 최상의 친밀함이라고 믿었다. (74쪽)

친말함의 경계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친밀함의 경계는 항구적일 수 없다. 어떤 말 못할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말 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고, 어떤 것은 그 반대가 될 것이다. 친밀함의 경계란 교착상태의 전선(戰線) 같은 것이다. 어느 쪽이 나아가면 다른 한쪽은 후퇴하기 마련이고 그 상태는 영원이 지속 될 수 없는 상태 말이다. 레오는 이 전선을 남북의 그것처럼 항구적인 어떤 상태로 보았을 뿐이다.

레오는 아내를 찾아 나선다. 문제의 해답을 츠비 갈첸의 논문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가 논문에서 찾아낸 것이 바로 ‘초기값 문제’다. 초기값 문제는 기상현상에서 현재의 날씨를 알지 못하면 내일의 날씨도 알아낼 수 없다라는 생각이다. 일종의 나비효과와 비슷한 개념으로 현재의 날씨를 정확히 안다면 미래의 날씨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 거란 것이다. 반대로 초기값 설정이 잘못되어 현재의 날씨를 잘못 알았다면 미래의 어떤 날씨도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레오는 아내를 찾는 여정에서 초기값이 잘못 설정 됐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주 가깝다는 건 충분히 가까운 게 아니란 걸(234쪽)” 알게 된다. 하지만 그가 하는 것은 현실을 인정하고 바꾸려 하지 않고 분열된 자아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상상으로 나오듯 분열 속에서 일상의 삶을 이어갈 것이다.

하비가 누구이고 레오의 아내가 어디로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주목해야 할 것은 친밀함의 경계가 항구적인 전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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