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각본
박찬욱.정서경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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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집 읽기 전 지문과 지시문이 빽빽한 시나리오집을 생각했다가 담백한 지문과 대사가 담긴 글들을 보고 영화를 다시 한번 본 것 같았다. 사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영상의 표현 방식이 "지식인 변태" 같다고 느끼곤 했다. 이야기의 재미 문제는 아니다. 앵글과 대사, 색감과 호흡이 담고 있는 박찬욱 감독만의 톤이 있다. 고급 포장지에 잘 감추어진 욕망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이런 거창한 설명 보다 박찬욱 영화는 변태(좋은 뜻) 같다고 하면 열의 아홉은 이해했다. 나는 그 세련됨이 싫었다. 그래서 <헤어질 결심>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보게 되었는데, 영화관에서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만큼 좋았다.

각본집을 읽으면서 좋았던 점은 연기로 표현됐던 해준과 서래의 마음을 지문으로 읽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설명들.


28. 화장실 (밤)

거울 앞에서, 저 예의 바른 형사는 뭘까, 저 맛있는 초밥은 뭘까, 의문을 지워버리려는 듯 열심히 이를 닦고 헹구는 서래.


98. 어물전 - 재래시장 (밤)

... '여보'에 마음 무너지는 해준. 남편 옷 주머니에서 마침내 물티슈를 찾아 꺼내면서 그의 안색을 살피는 정안.


104. 펜션 앞 바닷가 (낮)

... 서래가 돌아본다. 창백한 안색, 습기 때문에 얼굴에 달라붙은 (진짜) 머리카락, 눈에는 눈물이 가득. 해준은 그녀가 끔찍하다, 무시무시한 살인범임을 확신하는데도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감정을 꾹꾹 누르며-


거울 앞에서 고민하는 서래의 모습과 살인범임을 알면서도 너무나 사랑스러워하는 해준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사랑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적나라한 감정의 표현들을 글로써 보는 것은 참 오랜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각본집을 다시 읽고 든 생각은 왜 서래는 해준을, 해준은 서래를 좋아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해준은 호미산에 올라가 말하기를 서래가 몸이 꼿꼿해서 좋아한다고 했다. 그 꼿꼿함이란 서래가 말씀과 사진 중 사진을 골랐던 것, 똑바로 보길 원하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동질감, 죽은 남편이 산 노인을 돌보지 못한다 말하는 현실주의 등의 다른 말일 것이다. 서래는 잠을 못 자는 해준을 위해 같이 호흡을 맞춰주는 사람이다. 아내와 대비되는 서래의 모습에서 해준은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불면의 이유를 찾은 것은 아니었을까.

서래 역시 해준을 좋아한 건 그가 가지고 있는 품위 때문이라고 말하는 데, 서래가 말하는 품위란 예의와 다정함의 어디쯤이 아닐까 생각했다. 서래는 기도수와 결혼을 결심한 것이 그녀가 뱃속에서 더러운 모습으로 나왔을 때 자신의 말을 들어준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해준 역시 그녀가 피우는 담배를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예의 바른, 그래서 해준과 함께 있을 때는 잊어버린 서래의 한 부분을 찾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아가 서래가 말하는 품위란 자신이 넘어버린 어떤 선을 넘지 않은 해준의 태도에 대한 갈망일 수 있다.

꼿꼿함과 품위가 서로를 좋아하게 된 이유라면, 아이러니하게도 해준과 서래는 정확히 같은 이유 때문에 이별한다. 이야기에는 두 번의 이별이 나온다. 첫 번째 이별은 서래가 기도수를 죽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인데, 그가 가지고 있는 품위 때문에, 그리고 품위를 지키기 위한 자부심 때문에 해준은 서래와 헤어지기로 한다. 두 번째 이별은 서래가 해준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그녀만의 방식으로 사건을 미결로 남겨 놓는 장면이다. 그녀가 두 번째 남편을 죽이고 스스로 물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해준이 말했던 꼿꼿함의 여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해준과 서래는 서로를 좋아하기를 멈춘 적이 없지만 결국에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매듭지어진다. (서래에게는 해결일 수도 있지만.) 이 어긋남에 대해 생각하다 영화의 대사를 바꿔 적어본다. 사랑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헤어질 결심>은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서래의 말처럼, 서로의 속도를 맞추지 못한 사랑의 결론이 아니었나.


서래가 돌아본다. 창백한 안색, 습기 때문에 얼굴에 달라붙은 (진짜) 머리카락, 눈에는 눈물이 가득. 해준은 그녀가 끔찍하다, 무시무시한 살인범임을 확신하는데도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감정을 꾹꾹 누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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