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병:맛 2 - 청록, 얼얼하고 질긴
스튜디오 어중간 편집부 지음 / 스튜디오어중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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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날수록 겨울을 나는 것이 버겁다. 오랜 시간 나를 좀먹던 피부 상태도 최악으로 치닫고 틈틈이 온수를 들이켜도 계속 체해서 명치의 통증이 잦다. 원인 모를 근육통이 추위에 웅크린 몸 여기저기를 떠도는가 하면 잊을만하면 새끼손가락 마디의 통증이 재발한다.

그래서 한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잡지의 콘셉트가 청년의 투병이라는데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가.

 

책을 받자마자 첫 페이지부터 스르륵 훑었는데 마지막 페이지에 시선이 머물렀다. 독자의 8할은 보지 않을 발행 정보만 간략히 명시되어 있는 페이지 외에 잡지 제작에 참여한 이들을 소개한 추가 페이지가 있다. 잡지의 존재를 접하고 제일 궁금했던 건 이런 주제로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정답을 확인한 기분이었다. 노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요즘 그야말로 콘텐츠에만 매몰된 잡지들이 적지 않아 점점 멀리했는데 모처럼 사람에 주목하고, 사람 귀한 줄 아는 태도가 엿보이는 잡지는 오랜만이었다.

 

:2호는 일곱 개의 꼭지와 큐리-에이터의 outro로 구성되어 있다. 직업도 삶의 방식도 모두 달랐던 청년들이 있다. 어느 날 병이 찾아오면서 이들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거나 지향하게 된다. 이들이 맞이한 전환점엔 투병이란 공통점이 있다. 의식주 해결은 아픈 이에게도 예외가 없다. 투병했던 혹은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계를 이어가는지 현실적이고 솔직함이 돋보이는 첫 번째 꼭지가 특히 인상 깊었다. 위암 수술을 받은 편집장이 직장에서의 식사 시간을 염려하는 이야기에 매우 공감했다. 비교가 안 되지만,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리면서 작년에 수술도 한 나에게도 식사는 매우 민감한 주제다. 현재 하는 알바의 식사 시간이 30분인데 알바를 최종 할지 말지 고민하게 만든 가장 큰 요소이기도 했다. 아팠다면 그리고 현재도 아프다면 아프기 전과 똑같이 기능하기 어렵다. 명백한 이 명제에 대해 사회는 무관심하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청년과 아픔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경직된 사회 분위기와 문화를 더욱 실감했다. 아픈 청년들은 실존하나 이들의 특성이 배제된 채 온전히 기능하는(기능할 것을 요구하는) 청년만 기준점으로 삼는 일의 세계는 잔인하다 못해 비윤리적이기까지 하다.

 

내내 잊고 지내다 호되게 아프고 나서야 다시 떠오르는 한 가지 깨달음. 세상에 당연한 것은 정말 극히 드물다. 공감에서 더 나아가 페이지를 넘길수록 얻게 되는 것은 다른 삶의 발견이다. 잡지엔 여러 갈래도 병과 교차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극복했지만 여전히 병을 의식하는 사람, 여전히 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 투병인을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 끝내 투병인을 떠나보내고 남은 사람의 이야기가 섬세하게 담겨 있다.

결혼한 배우자와 사별한 경우, 남은 이는 법적으로 미혼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틱으로 인해 일상이 무너지고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은 흔히 접했지만, 20년 넘게 틱 증상을 보임에도 이를 이해하는 막역한 친구들이 있고, 그림을 통해 자신의 활동 영역마저 단단히 구축한 청년의 이야기는 생소했지만 반가웠다. 몰랐던 거지 없던 게 아니었구나. 소수지만 분명히 실존하는 이들을 발굴하고, 대안적 삶의 모델을 제시한다는 점에 병:맛은 건강한 사람들(이라 썼지만 아픔에 대한 공감이 낮은 사람들로 좁히고 싶다)에게 먼저 읽혔으면 좋겠다.

 

며칠 전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 발진으로 낙담하던 때 잡지와 만났다. 투병하는 청년에게 주목한 잡지라니. 과거의 상당 부분을 그리고 공교롭게 지금의 나를 설명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주제가 반가우면서도 그 자체로 너무 아픈 표현이기도 해서 눈가가 시큰해졌다. 맛난 음식 아껴먹듯 조금씩 자주 읽었다. 특유의 통찰과 다정함이 돋보이는 큐-리에이터의 outro를 여러 번 정독했다. 당사자가 아니기에 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온전히 닿을 수는 없지만 그 곁에 머물 수는 있다는 말이 위안이 되었다. 뒤이어 안도감이 찾아왔다. 아픈 누군가의 이야기에 세상에 발신하려는 창구를 알게 된 데에 대한 다행스러움이랄까. 병의 무서움은 통증 외에도 오롯이 당사자만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고독함에 있다. 후속 시리즈가 꾸준히 만들어져서 병의 고독함에 시달리는 이들이 잡지를 읽는 동안만이라도 해방감을 느끼면 좋겠다.

2호 메인 컬러인 청록에 호응하듯 페이지 곳곳에 영월로 추정되는 다양한 녹음이 심겨 있다. 달력을 보니 다음 주에 곧 마지막 절기인 대한이 온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도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 다가올 새봄을 기다리며 병:맛과 함께 겨울의 매듭을 잘 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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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 : 초 단위의 동물 림LIM 젊은 작가 소설집 2
김병운 외 지음, 민가경 해설 / 열림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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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작은 흐름의 이행이다. 그다음은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책을 보고 싶었던 건 저 두 문장 때문이었다. 풀 한 포기 볼 수 없는 불모지에 홀로 서 있는 내가 연상되었다. 통제광인 내게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삶은 재난과 다르지 않다. 끝이 정해진 삶도 내키지 않지만, 전자의 공포가 더 크기에 매사 점검과 반추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거겠지.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옹졸함이 크기를 더해가는 요즘 동시에 스스로 꾸짖고 싶은 마음 역시 비대해졌다. 그리고 이 책을 만났다.

 

내게 와서 박힌 문장은 요즘 SNS에서 잘 쓰이는 표현을 빌리자면 매우 폭룡적이다. 책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인 흘러간다로 수렴하는 문장이었다니! 일곱 편의 단편은 하나같이 정체되기를 거부한다. 방향과 속도를 달리하며 끊임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거나 지금 여기에서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린다. 상상에 그치지 않고 대놓고 너머의 존재를 찾는다. 나처럼 흔들리고 의심하다가도 나와 달리 낯선 상황에 기꺼이 몸을 내던지는 인물들을 향해 손을 뻗고 싶어졌다. 손목이든 뒷덜미든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집이 느껴지는 이야기라니 기묘하지 않은가.

 

김병윤 오프닝 나이트

전시장에 온 나는 여러 인물을 만난다. 초면인데 계속 시선이 얽히더니 묘하게 끌리는 남자, 재회한 지인에게서 옛 연인을 떠올리는 중첩된 관계 속 미로를 종횡무진한다. 시나리오 같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리듬감이 있는 단편 영화로 제작해도 잘 어울릴 것 같다. 내가 연출자라면 글 속 주요 인물 중 최소한 한 명은 결코 화면에 등장시키지 않을 테다. 기만의 망령 같은 부터 지워버리겠다.

 

서이제 초 단위의 동물

영화과를 졸업한 작가답게 그녀의 글엔 기본적으로 영화적 기운이 무성한데 이번 작품 역시 로드무비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 반복되는 일상 속 나와 회사 동료들은 어느 날 하나둘 낯선 곳으로 가더니 금세 지렁이, 달팽이 등의 동물로 변해 버리고 만다. 내가 그곳에 가게 된다면 어떤 동물로 바뀌어 있을까. 천적이 많지 않은 상위 포식자가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다. 평균 수명이란 다분히 인간 중심적인 개념이니까. 작가가 세운 이 세계는 인간의 시간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루살이가 이 정도면 충분히 살았다고 말하는 세계, 중요하지만 자꾸 잊게 되는 혹은 애써 잊으려는 삶의 속도에 대해 생각해볼 일이다.

 

성수나 끝말잇기

두 발을 딛고 사는 이곳 너머에 또 다른 존재가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지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발신에 우리가 제대로 수신하지 못해서라는 생각 역시 해본 적이 있다. 발신할 수 없다면 수신할 감각을 발달시키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 작품이 미약하게나마 그 시도를 도울 것이다.

 

아밀 어느 부치의 섹스로봇 사용기

인간 여자를 대하기 어려운 영민은 여성형 섹스 로봇 리아를 렌탈한다. 로봇의 존재 명분은 차치하더라도 행위로 이어지기까지 상대를 기다리고 배려하는 태도나 방법이 여느 인간보다 뛰어난 리아의 성능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로그래밍이 된 리아의 일관된 태도에 영민은 상처를 치유하고 동시에 새로운 상처를 받는다. 우리의 성장엔 어느 정도의 업데이트가 필요할까.

 

안윤 핀홀

퍼즐을 맞춰나가듯 초반에 흩어진 채 무작위로 나열된 이야기 파편들이 유의미한 서사로 윤곽이 드러난 순간 되레 심란해졌다. 나의 결핍을 채워줄 거라 믿었던 반려자에게서 더 큰 균열을 발견한 순간 나는 보라처럼 그 균열 속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을까.

 

이유리 달리는 무릎

환상적 요소를 일상과 버무리는 솜씨가 일품인 그녀의 새로운 작품을 맛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녀의 전작인 이구아나와 나가 떠오르는데 비교하면서 읽으면 배로 재미있겠다. 어느 날 주인공에게 의뢰자가 찾아온다는 설정은 유사하나 전작은 거래하는 당사자들이 개별적으로 분리된 독립 개체인 것이 반해 신작의 의뢰자는 무려 해결사의 무릎 안에 존재한다. 작가의 마르지 않는 상상력, 펼친 설정을 방치하지 않고 어렵지 않게 다시 매듭짓는 고수의 냄새가 난다.

 

최추영 무심과 영원

진주는 검도를 하며 한때 교제하는 사이였던 옛 연인과 심리적으로 완전한 안녕을 고한다. 촉각적 심상이 두드러지는 이별 이야기라니 그 흔치 않은 접근이 아주 매력적이다. 검도장의 차가운 마룻바닥에 내딛는 뒤꿈치, 머리부터 호구를 하나씩 착용하며 체형에 맞게 몸이 조여지는 순간에 그녀는 그를 떠올린다. 구호와 함께 그녀가 죽도를 들고 공중에서 휘두르는 행위는 홀로 남겨진 자가 스스로 구원하려는 살풀이 같기도 하다.

 

낯선 방식으로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에 끌리는 내 취향에 대체로 부합했으나 소화하기 다소 어려운 작품들도 있었다. 하나씩 꼭꼭 씹어 삼키면서 읽고 싶은 욕심을 부리려다 이내 힘을 빼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모르겠으면 넘어가쇼. 그냥 흘러가게 두라며 안심시키는 단편집을 만난 이상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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