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 개정판
최문형 지음 / 지식산업사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명성황후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최문형 / 지식산업사  / 2001년판

 

1988년 쓰노다 후사코의 <민비시해>가 한국에서 출간되고 1992년 최문형교수와 몇몇 학자들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는 논문집을 출간했다. - 쓰노다 후사코의 <민비시해>는 그뒤 1999년 제목을 바꿔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이라는 책으로 재발행되었는데 현재 이도 절판되었다. - 그후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져 현재까지 많지는 않지만 여러종의 연구서들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2001년 최문형교수가 종합적이면서 체게적인 논지로 저술한 연구서인데 학술서의 모양을 갖춘 대중서이다.  많은 주석을 달았지만 모두 미주로 돌려 읽는데 신경쓰이지는 않다.


이 책의 논지를 간추려 말하면,  왕비시해사건은 일본공사 미우라의 단순하고 과격한 성격탓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깡패들이 난입해 벌어진 우발적 살인도 아니다. 불안정한 국내외 정세속에서 왕권의 안정을 이루지 못하던 고종과 민왕비가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전에 말려들어 인아거일(引俄拒日)을 하려다가 일본정부의 교묘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국제범죄사건이다.


학술서를 표방하지는 않았으므로 이책에서 최문형교수는 민왕비에 대한 애정을 곳곳에서 표현하고 있다. 때문에 민씨척족세력의 폐해상을 거의 서술하지 않았다. 민씨정권에 대한 상황표현도 “무능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실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하여 상당히 동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비참하게 살해딘 왕비에 대한 동정심일수도, 왕후의 비범한 능력과 남자를 능가하는 결단력을 아까워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일국의 왕비가 국제관계 파워게임의 희생양이 되었으니 제대로 된 나라라면 있을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국제관계 정책의 운용과 조정을 국왕도 아니고 신료도 아닌 황후가 전면에 나서 행사해야만 될 이유가 있었던가? 그렇다고 뚜렷한 철학이나 어떤 혜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인재를 키운 것도 아니다.  오직 시아버지 대원군에 대한 반감과 원한이 민왕후 집권의 원동력이었다. 고종은 대체 뭘하고 있었을까?     

 

이 책에서 알수 있는 사실들

 

근대 일본은 사쯔마번(가고시마현)과 쵸슈번(야마구치현) 양대 세력의 대결장이다. 양대 지역의 벌족과 무사가 근대 일본을 확립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도모, 이노우에 가오루는 모두 쵸슈번 출신의 동지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요동반도와 타이완을 강제로 할양받았으나 곧바로 러시아 주도로 독일과 프랑스가 함께한 삼국간섭에 부닥친다.  이때 청일전쟁당시 내무대신이던 이노우에가  조선 공사를 자청 자진강등되어 조선으로 부임한다. 이토오 내각의 외무상이던 무스 무네미쓰는 폐질환으로 직책만 유지한채 공무에서 물러나고 문부상인 사이온지 긴모치가 외무상을 대리한다.


1895년 7월 이노우에가 귀국하고 미우라 고로가 차기 조선공사에 내정된다.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의 힘을 체감한 민왕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인아거일책을 본격화한다.  즉 3차 김홍집내각에 이범진등 친러파를 대거 기용하고 일본이 추천한 박영효를 왕비암살음모를 씌워 실각시킨다. 이노우에는 즉시 박영효를 일본으로 도피시키는데  이것이 모두 이노우에의 치밀한 계략이었다. 박영효가 일본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이노우에는 두가지 방책을 이토오 내각에 제시한다. 하나는 후임공사에 왕후와의 교제가 능한 이를 임명하는 순리적 방법, 하나는 민왕후를 제거하는 강경책이다. 이노우에는 군인출신 미우라를 공사에 추천했고 내각은 7월22일 미우라를 후임공사에 내정한다.(8/17 정식임명)  미우라는 자신이 적임자일수 없음을 밝히며 수차례 수락과 사퇴를 번복한다. 이는 시해가 미우라 단독일수 없다는 반증이다. 미우라 역시 쵸슈번 출신으로 일본내각의 실력자들이 고심한 인선임을 알수있다. 미우라는 부임 17일만에 시해사건을 벌이는데 각본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이토오, 야마가타, 이노우에는 천황을 보좌하는 최고결정권자집단인 7인 원로회의의 구성원이다. 이 때문에 일본정부차원의 개입이라 말할 수 있다.


<민비시해>의 저자 쓰노다 후사코는 시해사건의 일본정부 개입설을 부인한다. 즉 일본정부의 대한 정책 총수는 외상인 무쓰 무네미쓰라고 한다. 그러나 무쓰는 1895년 6월 5일 직무에서 손떼고 요양중이었고 더더욱 이노우에가 조선공사로 부임한 1894년부터는 아예 조선정책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있었다. 즉 내무상출신 이노우에가 조선문제에 관한한 전결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상 무쓰가 시해에 직접 가담한 오카모도 류노스케로부터 나중에 보고를 받고서야 그 전모를 알았으니 정부차원의 시해는 아니라는게 쓰노다의 교묘한 주장이다. 아마도 자신의 목적과 구미에 맞는 자료만 골라 보았던것 같다. 이 쓰노다의 저서에 우리나라 독자와 지식인까지 농락당했다.

 

낭인은 깡패나 부랑자가 아니다. 낭인이란 비정치적 민간인으로서 대륙에서 정치적 활동을 하는자이며 우익의 대륙 침략론자가 그들이다. 즉 현양사나 흑룡회가 그들의 단체이다. 시해 계획을 짜고 직접 가담한 시바 시료는 하버드대학과 펜실베이니아대학을 졸업한 일본 최고 지성인의 하나다.

 

사건후 영국영사에게 증언한 4인중 2인은 왕후가 일인들의 칼에 희생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궁녀, 희생된 왕후의 시신을 확인한 늙은 여의다.  또 시신을 목격한 시위대 장교와 시신을 불태우는 장면을 목격한 궁중 하인도 있다. 다만 누가 왕후를 직접 칼로 찔러 시해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시해과정에서 일부가 왕후의 시신을 능욕하는 듯한 만행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있으나 더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런 일이다.


아관파천은 고종의 계획이나 주도가 아닌 러시아공사 스페이에르의 계획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