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사막 랜덤 시선 41
신현정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신현정, 커브,<<바보사막>>,랜덤하우스,.p.63

 

 

커브

 

 

자전거를 타고 하는 커어브가 나는 좋아

전신주 앞에서 커어브 했다

막다른 골목인 줄 뻔히 알면서도 영광문구 지나 청과상회 지나

석유집 꺾어 들어 커어브했다

미장원 앞에서 커어브했다

마침 은숙이가 오기에 은숙이 앞에서 커어브했다

우체국 앞에서 커어브했다

바람같이 내달리다가 우체국 앞에서 커어브했다

칸나 앞에서 커어브했다

칸나가 팔 높이 쳐들고 있기에 나도 팔 쳐들고

한 손으로 커어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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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어브'가 주는 자유로움

자전거 타고 '커어브'를 할 때도,

입으로 '커어브'라고 발음할 때도,

신나는 '커어브'

신형정의 시들은 좋겠다,

너무도 재미있고 신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사물이 가진 생동감을 따라하는 것

고독한 철학자가 되어야만 시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고독하고 무의미한 바위덩어리처럼 보이겠지만

(그래서 그들은 망치와 정을 들고, 수행처럼 세상을 온통 들쑤시고 부셔놓는지도 모르겠다)

'커어브'처럼 유치한 즐거움은 절대 시가 될 수 없다고 짜증을 낼 수 있겠지만

'신나는 어떤 것'에 관한 시를 읽는 나는 얼마나 즐거운지

20년만에 시를 쓴다는 시인은

너무 가볍거나 신성하기 때문에 시가 될 수 없었다고 믿었던

존재들에게, 생각에게, 느낌에게 신나고 경쾌하고 때로는 불경한 시의 옷을 입혀

노래한다, 천연덕스럽게

자신과 만난 사물과 생각들에게 말을 건네고, 그들을 흉내내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시인은 눈치 보거나 억지를 부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나 당연한 마음과 생각들이니까,

한 줄은 행이고, 행이 모이면 연이 된다는 진부한 형식들을

(한 행이 한 연이 되고, 시가 끝날 때 마침표 하나면 충분하다는 자신감)

모두 무시하고, 자기 마음 가는 데로, 노래한다

아,

무거움을, 진짜로 무의미함을 버리는 데 20년이 걸린거로구나

그렇게 생각해보니,

나는 아직도 버릴 게 너무 많은 것 같다

버리고 나면, 시도 덩달아 저렇게 신나게

'커어브'하는 거구나

돌아가거나,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커어브'하고 싶어서, 자전거를 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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