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바트 비룡소 걸작선 16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 지음, 박민수 옮김 / 비룡소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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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 크라바트, 비룡소

 

소년의 내면은 아직 환상의 색채로 물들어 있다,
아직은 작은 소년, 그러나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는 변성기의 크라바트,
그는 얼굴에 검댕을 문지르고, 지푸라기 왕관을 쓴 왕이다,
배고픔만 제외한다면, 그 작은 소년에게 세계란 춤추듯 미끄러지는 빙판처럼, 구걸과 방랑으로 이어지는 자유로움 일 것이다
그러나,
검은 까마귀의 호명이 들리고,
크라바트는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이방의 땅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 작은 소년은, 자신이 향하는 길이, 환상과 놀이로 가득했던 유년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된 노동과 엄격한 규율로 이루어진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상상조차 못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크라바트, 그 작은 소년은 이제, 떠돌던 어느 마을에서도 발견할 듯한, 익숙한 풍경이지만, 새로운 차원의 법칙이 지배하는 코젤브르흐 방앗간의 직공이 된다
이 작은 방앗간은 하나의 세계이고, 마법의 공간이다, 마법은 건장한 청년 열두 명이 방앗간에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고된 노동을 이끌어내는 힘이다
방앗간은,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방앗간을 위해 존재한다
그들의 충성심은 해마다 한 명(누군가이지만, 누구나 될 수 있는)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공포로 유지되며, 그들의 노동은 달콤한 마법을 조금 수혈받는 것으로 지속된다
그리고 이 질서정연한 세계가 영원히 순환하도록 마법은 소년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이들의 꿈과 내면의 속삭임까지도 검열하고, 침입한다
 

그곳에서 삼 년, 크라바트는 우정을 배우고, 삶을 배우고, 마법을 배울 것이다,
그리고 직공이라는 굴종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심사숙고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을 묵과할 수만 있다면, 크라바트는 방앗간 주인이 되고, 그리고 거대한 마법의 힘을 갖게 될 것이다, 혹은 마술을 잃어버린 평범한 한 사내로 남겨질 것이다
 

자,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모두들 마법의 유혹을 떨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과연 당신은 그럴 수 있을 것인가?
당신은, 당신의 삶은 방앗간 직공들처럼 굴종적이지 않고, 인생을 통째로 바꾼다고 해도, 이 비참한 현실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마법을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다고 자신하는가? 
 

이미 눈치챘겠지만, 마법의 방앗간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날마다 마법의 달콤한 속삭임에 유혹당한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자신이 방앗간 주인 될 수도 있다는 희박한 가능성에 현혹되어 굴종적인 삶을 받아들이고, 굴종 위에 군림하고 싶어한다, 혹은 소문으로만 들리는 삶의 비법, 즉 마법의 그림자를 찾아 지칠 때까지 헤매고, 그렇게 쓰러지더라도 절대 포기하진 못한다
게다가 그것 이외에 삶의 방법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냉혹한 현실에서 살아남는 것이 때로는 비굴하고 비참하게 느껴지더라도, 그것 이외에 우리에게 허락된 삶은 오직 절망과 죽음뿐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이 작은 소설 <<크라바트>>는 우리에서 유혹과 굴종이 아닌 다른 삶을 제시한다,

욕망에 사로잡힌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우울과 절망으로 흥건하게 젖은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을, 그러나 언제나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명쾌하고 단순한 것인지,

이 책을 끝까지 읽는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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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 나는 이 작가의 도둑 씨리즈를 먼저 읽었다
<<왕도둑 호첸플러츠>>는, 책읽는 것을 무슨 산낙지 한 마리 통째로 삼키는 것처럼, 지렁이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보는 것처럼 싫어하는 남자 꼬맹이들도 열광하며 읽는 책이다, 로알드 달처럼 너무도 유쾌한 동화 작가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크라바트>>를 읽으면서, 현실에 대한 섬세하고 아름다운 우화를 읽으면서, 이 작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크라바트처럼, 이미 성장기를 지나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성숙한 작가
그리고 독일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좋은 작품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도 했다
 

글쎄, 국내에서 가장 멋진 우화를 찾는다면, <<마당을 나온 암탉>>이다, <<크라바트>>만큼이나 예술적이면서, 문학이 줄 수 있는 가장 멋진 선물, 즉 진실에 대해 속삭이는 작품이 있다면, 그것 말고는 나는 또다른 우화를 알지 못한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고, 내 자신의 독서가 좁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화를 좋아한다, 그것은 내 취향이다,
가끔은 알리고 싶을 때가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슬픈 일이고,
그것을 알리고 싶은 것은 순전히 나의 욕심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귀찮고, 오래 걸리는 글쓰기를 왜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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