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배정치의 시대 - 기본소득과 현금지급이라는 혁명적 실험
제임스 퍼거슨 지음, 조문영 옮김 / 여문책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영문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직역하면 ‘사람(남자)에게 물고기를 줘라’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예로부터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다. ‘노동하지 않는자 먹지도 말라’는 무비판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문장과도 맞닿아 있다. 이 책의 저자 제임스 퍼거슨은 아프리카와 제3세계를 대상으로한 국제 개발 및 원조 활동에서 개발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추적하는 인류학자이다. 2차 대전 이후 끝없이 물고기 잡는 법과 같은 서구 근대화 방법 이식과 다양한 원조를 계속 했음에도 왜 아프리카는 서구처럼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는커녕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를 추적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개발’에 대한 질문은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라는 반문을 낳게 했다. 우리말로 <분배정치의 시대> 번역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개발은 어떤 의미인가’에서부터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는 질문에 전 지구적 사례를 제시하고 인식의 이동을 요청하는 응답 서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한국사회와 연결되는 지점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저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및 나미비아를 중심으로 소위 기본소득이나 공적부조의 형태로 금전지원이 일어나고 있음을 제시하면서 기존 서구 복지국가와는 다른 형태가 있다고 주장한다. 서구 복지국가 운영은 4인 정상가족을 중심으로 경제활동이 가능한 남성에게 지속적인 노동이 가능토록 이끄는 재분배 형태의 물적 지원이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아이를 키우고 있는 실제 누군가에게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런 아프리카의 공적부조는 기존 서구의 복지국가 운영방식과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사회를 유지시킬 수 있는 구성원에게 지급되었던 방향과는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한 정치인은 복지를 하면 국민들이 게을러진다고 말했었다. 복지 예산을 늘리거나 요새 서울시의 청년 수당과 성남시 청년 배당을 실시했을 때 정부부처나 다양한 언론매체, 혹은 동년배에 안정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누군가는 강력한 반대를 한다. 저자가 서구 복지 제도의 빈틈을 제시하는 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접근조차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진다. 복지예산에 기대어 있는 사람들을 그 누구는 ‘복지충’으로 부르고 주공아파트 휴먼시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휴거라고 욕되이 부르고 있다. 기업가의 해고로 실업급여를 받는 개인도 무언가 어색한 감정이 든다. 이런 감정과 언설에는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이 내재되어 있으며 대부분 세대에 거쳐서 능력주의와 출세를 신봉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정당성을 획득한다.
 
 저자는 실제로 물고기 잡는 법이라는 노동의 과정과 기회 평등을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물고기라는 물건이나 물고기를 얻을 수 있는 금전적 지원은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받을 당연한 권리이며 몫이라고 말한다. 이는 서구의 사회적인 것이 가졌던 빈틈과 소위 복지의 안전망을 빠져나간 사람들까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포함하는 인식의 전환이다.

 

 그리고 저자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과 아울러 직접 돈을 주는 금전 지원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이에게 돈을 주면 버릇나빠진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격언에도 교환가치가 높은 돈을 주게되면 노동이나 자기 계발의 동력을 상실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경제활동을 하다가 멈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가정에서 장을 볼 때에 마음이 쪼들리거나 사회생활에서 축의금이 빠듯해서 사회적 관계를 맺기 꺼렸던 경험이 있다. 저자는 기본적인 금전지원이 최소한의 관계 맺기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경제적 관점으로 돈을 사유했던 마르크스 주의나 고전 경제학에서 돈의 가치 중립성을 제시한 것과 저자가 달리 돈이 가진 사회적 문화적 관점까지 함께 생각해야 함을 역설했다고 생각한다. 돈은 신과 비등하지도 덮어놓고 무시할 수도 없는 사회적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아프리카의 실험적 분배정치 장면들을 목도하면서 나는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개인화 탈규제화 자유화되어 공동체가 와해되는 이 시기에 다양한 죽음들과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비윤리적 사건들이 스쳐지나갔다. 이는 구성원의 노동력을 기준으로 혹은 성공이나 재산여부를 중심으로 인간을 등급화하고 구별을 정당화하는 언설과 다양한 지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다시 옛말에 그래도 ‘살 사람은 살아야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이탈리아 학자 베라르디 비포는 소시오패스, 비극적인 집단 학살이 발생하는 요즈음의 시기를 금융자본주의 시대 온정과 인간됨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가치를 거부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는 얼마나 더 잘 살기 위해 우리의 옆을 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려왔는가. 경제 성장이나 근대화 산업화의 이상들은 과연 어디까지 달려가야 보일 수 있는가. 이제는 그 가치와 이상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본다. 조한혜정교수가 우리나라를 선진국이 아닌 선망국이 될 것 같다며 우려했던 기억도 함께 자리한다. 

 

 이 책은 그동안 사회적인 것이 서구적인 사회적인 것이었을 뿐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사회적인 것이 존재함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이 기존의 서구 소유권 개념이나 복지 운영방식에서 벗어나 공동체 구성원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할 이유가 있다는 명제에 얼마나 충실히 사회는 운영되어야 하는가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엄혹한 이 시기 국가나 권력의 양태가 비윤리적이기에 거리로 나온 시민들에게 있어 이 비윤리성이 사라지고 거대한 적이 사라졌을 때 다시금 사회적 담론은 어떠한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움직일 것인가. 이 윤리적 기준은 또 다른 능력주의와 시민과 비시민의 구분을 낳을지도 또 다른 파시즘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이런 엄중한 시기의 양면성 앞에 우리는 시민됨을 그 존재로서 그래도 살 사람은 살아야하지 않겠냐는 인간 존재의 당위성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인류의 태고적 기원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술의 발전과 자본의 활용 방법에 따라서 더욱 효과적으로 사회적인 것이 더욱 살만한 사회로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런 인식의 전환과 실천적 방법에 있어 빼어난 사례와 공감가는 내용을 충분히 담은 좋은 책이다.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혼자 일어서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쯤 팔을 잡고 함께 일어나가는 것 아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