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
앤디 메리필드 지음, 남청수.김성희.최남도 옮김 / 이후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맑시즘과 도시이론은 두 분야 모두를 충족시키기는 데 어려움을 겪어 왔다. 앤디 메리필드는 이 책에서 맑시스트이면서 도시에 관한 사고를 개진했던 사상가 여덟 명을 소개하고 있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발터 벤야민, 앙리 르페브르, 기 드보르, 마뉴엘 카스텔, 데이비드 하비, 마샬 버먼이 그들이다. 맑시즘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읽기 편하도록 저자는 각 장의 전반부에 사상가들에 대한 전기적 묘사를 포함시켰다. 어려운 개념이나 이론 자체를 소개하는 일은 가능한 한 최소화했고 그것들이 나타난 맥락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지는 장점이다. 독자들은 여기 소개되는 맑스주의자들이 어떠한 맥락에서 도시주의와 연결되는지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이 책의 첫 장은 여덟 명 중에서 당연하게도 맑스부터 시작한다. 사실 맑스 자신이 본격적으로 도시에 대한 분석을 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그는 파리 꼬뮨 같은 도시적 반란에 큰 기대를 걸었고, 어떤 의미에서 농촌과 농민에 대해 불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맑스는 삶의 대부분을 도시에서 거주했고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바라 보았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계급의 조건”(1845)과 “주택문제”(1872)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도시를 다루었다. 맑스가 못한 걸 해냈으니, 이 책에서 다루는 도시주의에 관한 한 엥겔스야말로 조상격이라고 할 수 있다. 맑스가 어버지였다면 엥겔스는 어머니 정도였다고 할까.
벤야민(1892-1940)의 접근법은 도시에서 시작해서 맑스주의로 옮아간다. 그의 맑스주의적 도시주의에 기본적인 틀을 제공한 것은 화폐경제와 개인주의가 결합된 자본주의적 대도시를 통한 짐멜의 재해석이었다. 벤야민은 “무자비한 경제의 탈을 쓴 자본가의 대도시를 비난하면서도… 세계주의의 기반이 되는 대도시의 윤택함을 향유”(p. 125)했다. “벤야민은 자본주의 도시를 세속적 계몽이나 혁명 속의 혁명적인 것으로, 또한 신뢰할 만한 빛의 도시로 평가한 최초의 맑스주의자였다.” (p. 160)
벤야민과 거의 동시대에 태어났지만 명은 그보다 훨씬 길었던 르페브르(1901-1991)는 68혁명 이후 맑스주의 사전에 ‘도시혁명’이라는 단어를 추가했다. 1974년에 출간된 <공간의 창출>에서 그는 마치 ‘노동’이라는 개념을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라도 하려는 듯한 기세로 공간, 공간적 재현, 공간적 실천에 대해 논한다. “[르페브르의 맑스주의적 실천은] 도시의 거리반란에 관란 것이며, 일상생활 내에서 실행된다.” (p. 27)
기 드보르(1931-1994)는 사회과학자는 아니었다. 파리를 사랑한 전형적인 맑스주의자로서 시장주도적인 도시화를 싫어했고 ‘파리의 붕괴’를 안타까워했다. “그의 맑스주의적 도시주의는 사실상 도시에 대한 초현실적 시였다.” (p. 255)
마뉴엘 카스텔(1942-)은 대학원에서 앙리 르페브르의 지도를 받았지만, 스타일과 학문은 르페브르의 형이상학적 경향과 매우 달랐다. 카스텔은 르페브르가 공간적인 물신주의에 빠져 있으며, 도시 공간을 물신화시키고, “맑스주의적 문제설정에 대한 도시주의적 이론화”를 과시한다고 비난했다. 대신에 그는 “도시 현상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을 선택했다(p. 29).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재생산 문제를 적극 껴안은 (후에는 부정하지만) 카스텔은 집합적 소비와 재생산의 장으로서 도시를 바라보았다.
위키피디아에서 지리학자로 분류되며 현재 뉴욕시립대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데이비드 하비(1935-)야말로 이 책에서 다루는 여덟 사상가들 중에서 도시학자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의 논리에 매우 충실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격에 대항해서 싸웠고, 1980년대 암흑기 내내 자신의 의견을 고수해왔다. 하비는 <자본론>의 외연을 확장시켜 자본주의적 도시화에 관한 이론을 정립했다. 도시에 대한 문화적 접근법이 주를 이루는 이 시대에 하비는 독특하고 유의미한 이론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유일하게 미국(뉴욕)에서 나고 자란 마샬 버먼(1940-)의 맑스주의적 도시주의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부정과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을 말한다. 버먼은 <정체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한국어판은 <현대성의 경험: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에서 뉴욕 빈민가 브롱크스의 변화 사례를 통해 모더니티가 가져오는 도시 변화를 고찰한다. 그가 보기에 도시는 위험과 위협이 도사리고 있지만 자유를 촉진하고 믿을만한 자아를 키워내는 환경도 제공한다.
이렇게 다양한 사상가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책이다. 내가 이 책의 번역본 제목을 보면서 기대했던 것은 맑스주의적 도시 사례 분석이었다. 그러나 각 장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특정 도시들이 사상가들의 시각을 통해서 입체적으로 부각되기를 바랐던 내 기대는 채울 수 없었다. 책의 기획 의도 자체가 맑스 이후 맑스주의적 도시주의자들의 사상을 정리하고 소개하는 것이니만큼 사례 분석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지도 모르겠다. 번역본 제목을 차라리 ‘매혹의 맑스주의자, 도시에 살다’로 달았더라면 본문 내용에 더 부합했을 것이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다루는 사상가들은 대개 유럽인(들)이라는 점이다. 뉴욕 태생의 마샬 버먼을 제외하고는 저자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유럽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삶을 유럽에서 지냈다. 도시 문제를 다루기에 미국은 역사가 너무 짧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도시가 갖는 일상성과 혁명성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텐데, 버먼이 현대 뉴욕을 맑스주의적으로 해석하겠다고 마음 먹기까지 미국 역사에서 도시의 혁명성은 (아직) 찾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뉴델리, 서울, 베이징, 도쿄 등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는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아쉽다.
여덟 사상가들은 맑스주의자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인 사상적 영향을 주고받은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저자 자신은 각 장을 연결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지만) 책 전체의 내용은 일관되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사실 맑스주의 도시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독립적으로 확립된 분야도 아니고 관련된 학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맑스주의에서도 도시를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책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각 사상가들의 이론이나 저작 속에 분명 도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도시를 좀 더 종합적인 수준에서 사고하지는 못 한 것 같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상가들 중에서 마뉴엘 카스텔과 데이비드 하비를 제외하면 도시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개진했다고 보기 어렵다.
다음으로 번역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저자 서문을 읽다가 말이 안 되는 문장이 너무 많아서 원문과 대조를 해본 끝에 많은 오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중 일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4쪽. 어느 정도까지 우리는 도시와 맑스주의 문제설정을 결합한 책임이 있는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라는 위대한 옛 원로들을 붙잡을 수 있다.
[원문] To some extent we can hold the grand old patriarchs,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responsible for Marxism’s problematic marriage with the city.
[설명] ‘hold a person responsible for’라는 숙어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오역이다.
è “맑스주의와 도시 간의 문제적인 결혼의 책임은 위대한 창시자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어느 정도 지울 수 있다.” 혹은,
è “맑스주의와 도시 간에 이루어진 문제 많은 결혼의 책임은 어느 정도는 위대한 창시자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있다.”
14쪽 그 다음 문장. 결국 어느 누구도 “도시적인 것”을 붙잡고 싸우지 않았으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운동 법칙” 내에서 도시에 관해 명확한 항목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원문] Neither man, after all, really got to grips with “the urban”; neither really spoke about the city as a definitive item within the “laws of motion” of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설명] Neither men이었다면 ‘두 사람 다 ~ 아니다’라는 뜻이었겠지만 여기서 man은 단수형으로 쓰였으므로 맑스와 엥겔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인류 전체를 가리킨다. 보통 neither~ nor~로 쓰는데, 저자는 neither~ neither~로 썼다. grip에는 ‘이해력’이라는 뜻도 있다. 예컨대 get a grip on 하면 ‘~를 이해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
è 결국 인간은 “도시”라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지도 못했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운동 법칙” 내에서 결정적인(명확한) 항목(소재)으로서 도시에 대해서 진정으로 언급하지도 않았다.
16쪽. 그것은 텅 빈, 즉 무능한 것이었고, 시골 게릴라들의 비참한 상태와 농민들의 삶과는 거리가 먼 귀를 가진 “머리”였다.
[원문] It was empty “head”, largely incompetent, deaf to the plight of the rural guerilla and to the peasant life.
[설명] largely 이하는 “head”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
è 그것은 텅 빈 “머리”였으며, 전반적으로 시골 게릴라의 곤경과 농민의 삶에 둔감하고 무능력했다.
16쪽. 도시는 급진주의를 붕괴시켰고, 맑스주의 당원들을 부드러운 소비자, 즉 자신도 모르게 부즈주아가 되었다.
[원문] The city corrupted radicalism, made Marxist comrades soft, consumers, unwittingly bourgeois.
[설명] made가 목적어로 Marxist comrades와 consumers, 이렇게 둘을 취한 문장으로 보인다. ‘당원들을 ~ 되었다’는 어법에 맞지 않는다.
è 도시는 급진주의를 붕괴시켰으며, 맑스주의 동지들을 유약하게 만든 한편 소비자들을 부지중에 부르주아로 만들었다.
16쪽. “터무니없는” 것으로 내쫒아 버린다.
[설명] ‘내쫒아’가 아니라 ‘내쫓아’가 맞다. 그리고 dismiss는 ‘기각하다’, ‘내쫓다’ 외에 ‘간단히 처리해 버리다’는 뜻이 있다.
è “터무니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18쪽. 또한 철이 지나고 퇴행적인 형식들이 밀도라는 관점에서 연구된 인구의 일반적인 구성 안에서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어떤 조합이 나올 수 있는지에 관해서도 밝혀내야 한다.
[원문] (necessary to establish) …and what combinations may result from the fact that antiquated and retrograde forms continue to exist in the general composition of the population, studied from the viewpoint of its greater or lesser density.
è 또한 인구밀도를 높이거나 낮춰서 살펴 보면 전체 인구 안에 구시대적이고 역행적인 형식들이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어떤 조합이 도출될지에 관해서도 밝혀야 한다.
오역과 비문(非文)을 그나마 자제하면서 찾다가, 더 이상은 시간 낭비인 것 같아서 이쯤에서 그만두었다. 서론 부분만 놓고 보면 지금껏 내가 본 번역서들 중에서 최악의 번역이다. 그나마 본문은 나은 편이다. 역자들이 스터디그룹에서 발제문 형식으로 번역하던 것을 후에 번역서로 출간하기로 결심을 했는지(실제로 대학원이나 학회에서 그런 경우가 많이 있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비공식 석상에서 돌려볼 발제문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선보일 책이라면 번역을 이렇게 무성의하게 해서는 안 된다. 역자들은 영문법과 국문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결여되어 있으며 우리말 어휘력이 부족하다. 문법에 안 맞거나 뜻이 안 통하는 문장이 무척 많았는데, 원서와 비교해보면 십중팔구 오역한 문장이었다. 출판사와 역자들이 교정을 보는 과정에서 뜻이 안 통하는 문장이 있으면 원문과 대조하면서 일일이 새로 고쳐야 한다. 이 과정은 초벌번역 못지 않은 수고가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수고를 들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죽 했으면 속표지에 원저자의 이름도 잘못 인쇄해서 스티커로 고쳐 붙였겠는가?) 역자들은 여느 역자 서문과 달리 당차고 다소 감정적인 <옮긴이의 말>에서 국내 번역서들의 통일성(적어도 저자 이름과 제목이라도)에 관해 그들이 품었던 포부와 한계를 언급했다. 그러나 그런 데 신경쓰기보다는 문장을 정확하게 번역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게 우선이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