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
앤디 메리필드 지음, 남청수.김성희.최남도 옮김 / 이후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맑시즘과 도시이론은 두 분야 모두를 충족시키기는 데 어려움을 겪어 왔다. 앤디 메리필드는 이 책에서 맑시스트이면서 도시에 관한 사고를 개진했던 사상가 여덟 명을 소개하고 있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발터 벤야민, 앙리 르페브르, 기 드보르, 마뉴엘 카스텔, 데이비드 하비, 마샬 버먼이 그들이다. 맑시즘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읽기 편하도록 저자는 각 장의 전반부에 사상가들에 대한 전기적 묘사를 포함시켰다. 어려운 개념이나 이론 자체를 소개하는 일은 가능한 한 최소화했고 그것들이 나타난 맥락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지는 장점이다. 독자들은 여기 소개되는 맑스주의자들이 어떠한 맥락에서 도시주의와 연결되는지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이 책의 첫 장은 여덟 명 중에서 당연하게도 맑스부터 시작한다. 사실 맑스 자신이 본격적으로 도시에 대한 분석을 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그는 파리 꼬뮨 같은 도시적 반란에 큰 기대를 걸었고, 어떤 의미에서 농촌과 농민에 대해 불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맑스는 삶의 대부분을 도시에서 거주했고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바라 보았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계급의 조건”(1845)주택문제”(1872)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도시를 다루었다. 맑스가 못한 걸 해냈으니, 이 책에서 다루는 도시주의에 관한 한 엥겔스야말로 조상격이라고 할 수 있다. 맑스가 어버지였다면 엥겔스는 어머니 정도였다고 할까.

 

벤야민(1892-1940)의 접근법은 도시에서 시작해서 맑스주의로 옮아간다. 그의 맑스주의적 도시주의에 기본적인 틀을 제공한 것은 화폐경제와 개인주의가 결합된 자본주의적 대도시를 통한 짐멜의 재해석이었다. 벤야민은 무자비한 경제의 탈을 쓴 자본가의 대도시를 비난하면서도세계주의의 기반이 되는 대도시의 윤택함을 향유”(p. 125)했다. “벤야민은 자본주의 도시를 세속적 계몽이나 혁명 속의 혁명적인 것으로, 또한 신뢰할 만한 빛의 도시로 평가한 최초의 맑스주의자였다.” (p. 160)

 

벤야민과 거의 동시대에 태어났지만 명은 그보다 훨씬 길었던 르페브르(1901-1991) 68혁명 이후 맑스주의 사전에 도시혁명이라는 단어를 추가했다. 1974년에 출간된 <공간의 창출>에서 그는 마치 노동이라는 개념을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라도 하려는 듯한 기세로 공간, 공간적 재현, 공간적 실천에 대해 논한다. “[르페브르의 맑스주의적 실천은] 도시의 거리반란에 관란 것이며, 일상생활 내에서 실행된다.” (p. 27)

 

기 드보르(1931-1994)는 사회과학자는 아니었다. 파리를 사랑한 전형적인 맑스주의자로서 시장주도적인 도시화를 싫어했고 파리의 붕괴  안타까워했다. “그의 맑스주의적 도시주의는 사실상 도시에 대한 초현실적 시였다.” (p. 255)

 

마뉴엘 카스텔(1942-)은 대학원에서 앙리 르페브르의 지도를 받았지만, 스타일과 학문은 르페브르의 형이상학적 경향과 매우 달랐다. 카스텔은 르페브르가 공간적인 물신주의에 빠져 있으며, 도시 공간을 물신화시키고, “맑스주의적 문제설정에 대한 도시주의적 이론화를 과시한다고 비난했다. 대신에 그는 도시 현상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을 선택했다(p. 29).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재생산 문제를 적극 껴안은 (후에는 부정하지만) 카스텔은 집합적 소비와 재생산의 장으로서 도시를 바라보았다.

 

위키피디아에서 지리학자로 분류되며 현재 뉴욕시립대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데이비드 하비(1935-)야말로 이 책에서 다루는 여덟 사상가들 중에서 도시학자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의 논리에 매우 충실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격에 대항해서 싸웠고, 1980년대 암흑기 내내 자신의 의견을 고수해왔다. 하비는 <자본론>의 외연을 확장시켜 자본주의적 도시화에 관한 이론을 정립했다. 도시에 대한 문화적 접근법이 주를 이루는 이 시대에 하비는 독특하고 유의미한 이론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유일하게 미국(뉴욕)에서 나고 자란 마샬 버먼(1940-)의 맑스주의적 도시주의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부정과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을 말한다. 버먼은 <정체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한국어판은 <현대성의 경험: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에서 뉴욕 빈민가 브롱크스의 변화 사례를 통해 모더니티가 가져오는 도시 변화를 고찰한다. 그가 보기에 도시는 위험과 위협이 도사리고 있지만 자유를 촉진하고 믿을만한 자아를 키워내는 환경도 제공한다.

 

이렇게 다양한 사상가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책이다. 내가 이 책의 번역본 제목을 보면서 기대했던 것은 맑스주의적 도시 사례 분석이었다. 그러나 각 장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특정 도시들이 사상가들의 시각을 통해서 입체적으로 부각되기를 바랐던 내 기대는 채울 수 없었다. 책의 기획 의도 자체가 맑스 이후 맑스주의적 도시주의자들의 사상을 정리하고 소개하는 것이니만큼 사례 분석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지도 모르겠다. 번역본 제목을 차라리 매혹의 맑스주의자, 도시에 살다로 달았더라면 본문 내용에 더 부합했을 것이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다루는 사상가들은 대개 유럽인(들)이라는 점이다. 뉴욕 태생의 마샬 버먼을 제외하고는 저자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유럽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삶을 유럽에서 지냈다. 도시 문제를 다루기에 미국은 역사가 너무 짧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도시가 갖는 일상성과 혁명성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텐데, 버먼이 현대 뉴욕을 맑스주의적으로 해석하겠다고 마음 먹기까지 미국 역사에서 도시의 혁명성은 (아직) 찾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뉴델리, 서울, 베이징, 도쿄 등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는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아쉽다.

 

여덟 사상가들은 맑스주의자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인 사상적 영향을 주고받은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저자 자신은 각 장을 연결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지만) 책 전체의 내용은 일관되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사실 맑스주의 도시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독립적으로 확립된 분야도 아니고 관련된 학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맑스주의에서도 도시를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책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각 사상가들의 이론이나 저작 속에 분명 도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도시를 좀 더 종합적인 수준에서 사고하지는 못 한 것 같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상가들 중에서 마뉴엘 카스텔과 데이비드 하비를 제외하면 도시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개진했다고 보기 어렵다.

 

 

다음으로 번역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저자 서문을 읽다가 말이 안 되는 문장이 너무 많아서 원문과 대조를 해본 끝에 많은 오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중 일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4. 어느 정도까지 우리는 도시와 맑스주의 문제설정을 결합한 책임이 있는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라는 위대한 옛 원로들을 붙잡을 수 있다.

[원문] To some extent we can hold the grand old patriarchs,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responsible for Marxism’s problematic marriage with the city.

[설명] ‘hold a person responsible for’라는 숙어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오역이다. 

è  맑스주의와 도시 간의 문제적인 결혼의 책임은 위대한 창시자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어느 정도 지울 수 있다.” 혹은,

è  맑스주의와 도시 간에 이루어진 문제 많은 결혼의 책임은 어느 정도는 위대한 창시자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있다.”

 

14쪽 그 다음 문장. 결국 어느 누구도 도시적인 것을 붙잡고 싸우지 않았으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운동 법칙내에서 도시에 관해 명확한 항목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원문] Neither man, after all, really got to grips with “the urban”; neither really spoke about the city as a definitive item within the “laws of motion” of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설명] Neither men이었다면 두 사람 다 ~ 아니다라는 뜻이었겠지만 여기서 man은 단수형으로 쓰였으므로 맑스와 엥겔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인류 전체를 가리킨다. 보통 neither~ nor~로 쓰는데, 저자는 neither~ neither~로 썼다. grip에는 이해력이라는 뜻도 있다. 예컨대 get a grip on 하면 ‘~를 이해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

è  결국 인간은 도시라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지도 못했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운동 법칙내에서 결정적인(명확한) 항목(소재)으로서 도시에 대해서 진정으로 언급하지도 않았다.

 

16. 그것은 텅 빈, 즉 무능한 것이었고, 시골 게릴라들의 비참한 상태와 농민들의 삶과는 거리가 먼 귀를 가진 머리였다.

[원문] It was empty “head”, largely incompetent, deaf to the plight of the rural guerilla and to the peasant life.

[설명] largely 이하는 “head”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

è  그것은 텅 빈 머리였으며, 전반적으로 시골 게릴라의 곤경과 농민의 삶에 둔감하고 무능력했다.

 

16. 도시는 급진주의를 붕괴시켰고, 맑스주의 당원들을 부드러운 소비자, 즉 자신도 모르게 부즈주아가 되었다.

[원문] The city corrupted radicalism, made Marxist comrades soft, consumers, unwittingly bourgeois.

[설명] made가 목적어로 Marxist comrades consumers, 이렇게 둘을 취한 문장으로 보인다. ‘당원들을 ~ 되었다는 어법에 맞지 않는다.

è  도시는 급진주의를 붕괴시켰으며, 맑스주의 동지들을 유약하게 만든 한편 소비자들을 부지중에 부르주아로 만들었다.

 

16. “터무니없는것으로 내쫒아 버린다.

[설명] ‘내쫒아가 아니라 내쫓아가 맞다. 그리고 dismiss기각하다’, ‘내쫓다외에 간단히 처리해 버리다는 뜻이 있다.

è  터무니 없는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18. 또한 철이 지나고 퇴행적인 형식들이 밀도라는 관점에서 연구된 인구의 일반적인 구성 안에서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어떤 조합이 나올 수 있는지에 관해서도 밝혀내야 한다.

[원문] (necessary to establish) …and what combinations may result from the fact that antiquated and retrograde forms continue to exist in the general composition of the population, studied from the viewpoint of its greater or lesser density.

è  또한 인구밀도를 높이거나 낮춰서 살펴 보면 전체 인구 안에 구시대적이고 역행적인 형식들이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어떤 조합이 도출될지에 관해서도 밝혀야 한다.

 

오역과 비문(非文)을 그나마 자제하면서 찾다가, 더 이상은 시간 낭비인 것 같아서 이쯤에서 그만두었다. 서론 부분만 놓고 보면 지금껏 내가 본 번역서들 중에서 최악의 번역이다. 그나마 본문은 나은 편이다. 역자들이 스터디그룹에서 발제문 형식으로 번역하던 것을 후에 번역서로 출간하기로 결심을 했는지(실제로 대학원이나 학회에서 그런 경우가 많이 있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비공식 석상에서 돌려볼 발제문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선보일 책이라면 번역을 이렇게 무성의하게 해서는 안 된다. 역자들은 영문법과 국문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결여되어 있으며 우리말 어휘력이 부족하다. 문법에 안 맞거나 뜻이 안 통하는 문장이 무척 많았는데, 원서와 비교해보면 십중팔구 오역한 문장이었다. 출판사와 역자들이 교정을 보는 과정에서 뜻이 안 통하는 문장이 있으면 원문과 대조하면서 일일이 새로 고쳐야 한다. 이 과정은 초벌번역 못지 않은 수고가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수고를 들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죽 했으면 속표지에 원저자의 이름도 잘못 인쇄해서 스티커로 고쳐 붙였겠는가?) 역자들은 여느 역자 서문과 달리 당차고 다소 감정적인 <옮긴이의 말>에서 국내 번역서들의 통일성(적어도 저자 이름과 제목이라도)에 관해 그들이 품었던 포부와 한계를 언급했다. 그러나 그런 데 신경쓰기보다는 문장을 정확하게 번역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게 우선이어야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룩: 거룩의 본질·장애물·난관·근원 (J. C. 라일)

대한민국사 1

대한민국사 2

대한민국사 3

대한민국사 4

 

가족: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는 심리여행

긍정의 배신: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느림보 마음

독고준

 

발자국: 역사의 발자국 헤아리기 (고종석)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바보배: 1494년 출간된 세상 모든 바보들에 관한 원전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당신에게

 

열하일기 1

열하일기 2

열하일기 3

몸과 인문학: 동의보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영국 정원 산책

 

밤의 군대들 (노먼 메일러)

퇴마록 외전: 그들이 살아가는 법

레드 브레스트

애도일기 (롤랑바르트)

어린왕자 (김현 번역)

 

감정의 모험 (아흐멧 알탄)

귀신의 시대 (손홍규)

귓속에서 운다 (이창수)

내 마음의 빈 집 한 채 (신경숙 엮음)

물 위에 찍힌 발자국 (김충규)

 

인공낙원의 뒷골목 (홍기돈)

1984

감상소설 (미하일 조셴코)

숨그네

이 날을 위한 우산 (빌헬름 게나치노)

 

절망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파계 (시마자키 도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부에서는 우파에서부터 근본주의자와 급진 좌파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데올로기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비판을 가하고 결국에는 공산주의가 다시금 필요한 이유를 밝힌다. 라깡에 기대어 이데올로기 그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도 물론 제시한다. 이데올로기의 힘과 작동 방식에 관한 여러 가지, 조금은 생소한 사례들이 제시된다. 지젝이 제기한 비판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토마스 프랭크는 경제적 계급적대가 오늘날 미국에서는 근면한 기독교인와 퇴폐적 자유주의자 간의 대립으로 환치되었음을 지적했다. 즉 계급전쟁이 문화전쟁으로 전치된 것이다. 그래서 단 2%의 최상위 부자들에게만 세금을 늘리려는 오바마 정책에 그렇게 많은 보통사람들까지도 반대하는 포퓰리즘적 보수주의가 득세할 수 있었다. (pp. 68-71)

폰지 사기로 구속된 메이도프가 자신의 계략이 결국 무너지지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 것은 그의 개인적 악덕이나 비합리성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관계에 내재한 문제 때문이었다. 합법적 업무를 피라미드 사기로 변형시키려는 유혹은 자본주의적 순화과정의 본질 자체에 속하는 내적 추진력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원동력 자체가 합법적 투자와 무모한 투기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적 투자의 핵심은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내기이며 미래로부터 차용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통제 불가능한 어떤 상황 변화가 안전한 투자로 간주된 것을 파산으로 이끌 수 있다. (pp. 76-77)

지젝은 탈레반 같은 근본주의자들을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진정한 혁명세력으로 높이 평가하는 시각을 견제한다. 그는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여 파시즘의 발흥은 실패한 혁명을 증언한다는 주장을 적극 옹호한다. 급진 이슬람주의의 발흥은 이슬람국가들에서 세속적 좌파가 소멸한 것과 정확히 상응한다. 예컨대 아프가니스탄은 불과 30년 전만 해도 소련과는 독립적인 강력한 공산당이 존재했었다. (pp. 146-149)

그리고 1부 후반부로 가면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자유주의화된 좌파 혹은 개량주의적 점진주의까지 포함해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다시 공산주의의 기치를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가 구태의연한 이데올로기적 유토피아라는 생각이 든다면, 오히려 오늘날 자본주의 그 자체야말로 진정으로 유토피아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탱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승리가 끔찍했던 20세기 전체주의적 유토피아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유토피아는 역사의 종말에 도달했다고 믿었던 1990년대였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공산주의의 필요성은 유토피아적 사고가 아니라 현실적 필요성에서 나온다. 세계화된 경제질서 속에서 상품화된 식량, , 석유의 부족사태가 제3세계 국가들을 기아로 몰아넣고 있는 지금, 공산주의가 다시 문 앞에 와 있다. , 에너지, 환경, 문화, 교육, 건강 등을 시장에 맡겨 둘 수는 없다.

2부는 이른바 새로운 공산당 선언과도 같다. 2부는 오히려 1부보다 쉽게 읽힌다. 지젝의 어투는 확신에 차 있다. 그는 공산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오늘날 공산주의 이념을 실천할 현실적 적대관계를 붙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젝은 그러한 적대관계로 생태적 파국의 위협,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의 사회, 윤리적 함의, 새로운 형태의 (빈부간)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 등 네 가지를 내세운다.

공통적인 것”(the commons)에서 배제되는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이 여전히 존재하며, 그것은 더욱 배타적이고 철저한 과정이다.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었던 고전적 이미지의 프롤레타리아와 달리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상징적 실체를 빼앗기고, 유전자 염기는 심하게 조작되고, 살 수 없는 환경에서 비실대며 지내는, 모든 실체적 내용이 결여된 추상적 주체로 영락할 위험이 처해 있다. (p. 185)

이어 지젝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대비시키면서 사회주의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가 사회주의의 예로 드는 것들은 공동체주의, 포퓰리즘, 아시아적 가치에 입각한 자본주의 등이다. 그러면서 영원한 유토피아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닌 현실적 필요성에서 나오는 공산주의를 옹호한다. 2부를 요약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꽤 흥미롭고 새로운 주장들을 담고 있어서 1부에 비하면 술술 읽힌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맑스, 레닌, 라깡 등의 이론과 현대 사회주의의 역사에 대해서 약간씩의 지식이 없다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극우에서부터 극좌에 이르기까지 신랄한 비판을 쏟아부으면서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가속화시키는 프롤레타리아화를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서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지젝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덧붙임]

1. 제목과 관련하여

 한글 번역서에는 원서에 없는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 책의 내용과 그다지 부합하지는 않는다. 1부의 내용 중에 세계금융위기와 관련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오늘날 계급적대가 문화화, 이데올로기화, 혹은 물신화 되어 있어서 피지배계급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으로 쉽사리 나아간다는 주장을 현학적인 수사와 잘 알려지지 않은 사례들을 동원하면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잠깐 등장할 뿐이다. 좀 더 솔직한 부제라면 신공산당선언정도가 어울렸을 것이다.

2. 번역과 관련하여

잘 읽히지 않는 책이다. 특히 1부가 그렇다. 무엇보다도 원서 자체가 술술 읽힐 만한 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는 그렇게 쉽지 않은 책을 역자가 주로 직역을 했기 때문에 번역서의 가독성은 더더욱 떨어진다. 번역의 문제부터 몇 가지 짚고 넘어가겠다.

전체적으로 번역은 오역은 없어 보이지만 그다지 매끄럽지는 못하다. 번역 어휘 선택도 항상 최선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부사나 수식어구의 위치도 재정렬해야 더 매끄러워질 문장들이 많이 있었다. 원문을 최대한 그대로 살리고 싶어서 직역을 위주로 했던 것이라 해도, 어차피 영어와 한글이 전혀 다른 구조와 표현법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말에 가깝게 의역하는 것이 어쩌면 저자의 의도를 더 잘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의 말이 아니라 TV 광고를 번역한 부분에서도 직역 어투가 그대로 나오는 걸로 봐서, 역자가 원서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직역 어투를 고집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예컨대 110-112쪽에 번역된 스타벅스 광고는 마치 한국어에 익숙하지 못한 Korean American 2세가 번역한 것 같은 문장이다.

이것보다 조금 더 나은 직역어투의 예를 들어보자. 수없이 많지만 마침 노트북 앞에서 책을 읽다가 시간을 내서 기록해둘 수 있었던 것들 중에서 몇 가지 예만 들면 다음과 같다.

수에즈운하 동편의 이스라엘 부대가 이집트 군사들에 의해 괴멸되던 패닉의 순간에 일어났던 일들의 믿을 만한 녹음기록을 뒤편의 오디오기계가 재생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p. 87)

è  이 길지 않은 문장에는 (of)’가 네 번 나오는데, 번역이 너무 무성의하다. 영어에서 of는 한국에서 1:1 매칭이 되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주술관계, 소유관계, 동격관계, 수식관계 등 다양하다. 의미에 맞게 풀어 써주는 것이 낫다. 이렇게 를 그대로 쓰는 관행은 해방 이후 영어책을 일본에서 번역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본어 특유의 ()’를 하나하나 로 번역해서 써왔던 데서 비롯된다. 이 문장에서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일들의 믿을 만한 녹음기록에서 는 무척 어색하다. 그리고 ‘-에 의해+수동태는 완전히 영어식 표현이다. 또 하나, ‘오디오기계에서처럼 외래어와 한국어가 결합되는 합성어는 띄어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좀 더 확실한 건, 강 이름이나 산 이름 같은 경우에 나일 강처럼 띄어써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편이 좀더 한국어문법에 맞고 자연스럽다. ‘수에즈운하 동편에 주둔한 이스라엘 부대가 이집트 군사들에 괴멸되던 패닉의 순간에 발생한 일들을 녹음한 믿을 만한 기록을 뒤편에 있는 오디오 기계가 재생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합리적 반유대주의라는 공식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은 1938년 로베르 브라지야크에 의해서인데 그는 자신이 온건한반유대주의자라고 생각했다. (p. 99)

è  전형적인 수동태 문장이다. 원문이 수동태라서 그대로 번역했을 것이다. 지젝이 굳이 능동태로 만들 수도 있었을 이 문장을 수동태로 만든 것은 “The best expression of … was by Robert, who regarded himself as a…”와 같이 Robert에 대한 수식어구를 문장 맨 뒤에 간략하게 덧붙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한글과 다른 영어의 특징이자 묘미이고, 어디 가서 영어 곧잘 한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이런 식으로 문장을 구성하는 게 당연하다. 여기서 ‘who’ 이하는 이른바 관계대명사 계속적 용법이라 불리는 것으로, 흔히 앞문장을 해석한 후 who 이하를 해석하면 된다고 알려져 있다. 역자는 이러한 해석 방법에 충실히 따랐다. 원문을 바꿔서 “Robert, who regarded himself as a…, expressed the best formulation…”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물론 이 경우 그 뉘앙스는 조금 달라진다. 그렇지만 위 번역처럼 원문의 구성을 그대로 번역하는 건 문제가 있다. 한국어에는 수동태 표현이 잘 쓰이지 않는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관계대명사 계속적 용법은 앞 문장에 이어서 해석하기보다는 제한적 용법처럼 수식관계로 바꾸어 해석해주는 편이 나을 때가 많다. 따라서 위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을 온건한 반유대주의자로 여기는 로베르 브라지야크는 1938년 합리적 반유대주의라는 공식을 가장 잘 표현한 적이 있다.’

… ‘진정한실존적 선택이런저런 상품의 피상적 선택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전면적인 실존적 참여를 포함하는 선택이라는 주제에 갖가지 변주를… (p. 129)

è  이런 식으로 하이픈으로 삽입하는 문구는 사실 한국어문법에 고유한 표현이 아닌 것으로 안다. 영어를 그대로 번역한 문장이 하도 많이 유통되다 보니 어느새 이런 표현이 마치 한국어문법에 원래부터 있었던 양 번역서가 아닌 순 창작물에도 이런 식의 표현을 종종 보게 된다. 가능하다면 하이픈 없이 그냥 수식어구로 적절히 배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문장에서 또 하나 더 심각한 문제는 번역된 삽입구가 무슨 말인지 한눈에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영어식 표현으로서 명사+of+명사를 그대로 직역한 점, including으로 시작되는 이 삽입구를 포함하는이라고 그대로 번역해서 당최 무엇을 어디에 포함한다는 것인지 중요하지도 않은 표현 때문에 잠시 문맥을 잃기 쉽다는 점, contrary to인지 as compared to인지 모르겠으나 ‘-에 대립하는 것으로서라는 표현이 무척 문어적이기도 할 뿐더러 대립이라는 강한 표현 때문에 괜히 초점이 분산된다는 점 등등 문제가 많이 있다. 다음과 같이 바꾸면 좋았을 것이다. “… ‘진정한실존적 선택이런저런 상품을 피상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 실존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비롯하여이라는 주제에…”

메씨지, 씨스템: 외래어 표기법상 메시지’(message), ‘시스템’(system)으로 표기하게 되어 있는 것을 굳이 메씨지’, ‘씨스템이라고 번역한 것은 그것이 영어 발음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법을 거스르면서까지 새로운 번역어를 주장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외래어 표기법을 몰랐기 때문일까? 영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기를 원했다면, 예컨대 스트리트스트릿으로, ‘아크로님애크러님으로 표기했어야 하지 않을까?

/녀를: ‘his/her’를 번역한 것인데미국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사고방식 때문에 ‘a person’을 대명사로 다시 쓸 때 ‘he’ 하나로만 써서는 안 되고 ‘he/she’로 써야 한다. 여기서 슬래시(/)  ‘or’에 해당한다. 그래서 ‘his/her’는 번역하면 그 혹은 그녀의이다. 그런데 국문법에서는 주로남자를 가리키기는 하지만 여자도 가리킬 수 있으므로 ‘his/her’그의로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역자는 국어 표현에 존재하지도 않는 /녀가’, ‘/녀를등의 표현을 개발했는데, 새로운 번역법을 주장하려는 명백한 의도가 아니었다면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다.

‘-에 있어서’: 일본어 문투

이 외에도 용어나 어휘 번역이 부자연스러운 경우가 많이 있었다. 책 앞부분에서만 해도 문제점이 이렇게 많이 발견돼서 이렇게 따지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얼마 지나고부터는 그냥 꾹 참고 읽어 나갔다.

용어에 대한 설명도 균형감이 없다.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서 주석이 필요한 용어는 그냥 둔 채 그다지 몰라도 되는 용어는 오히려 장황한 주석이 달린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번역자도 영어 번역본을 텍스트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솔직한 의견으로는 그냥 영어본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최근에 읽었던 수많은 한글 번역본 중 가장 거슬렸던 책 중 한 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너지는 환상 -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세계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이수현.천경록 옮김 / 책갈피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저자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레닌과 트로츠키를 잇는 국제사회주의 운동을 대변한다. 그는 구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다. 1990년대 중반 책갈피에서 그의 책이 처음 번역되어 나왔을 때,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실의에 빠진 한국 좌파들에게 ‘몰락한 건 소련 국가자본주의이지 사회주의운동 그 자체가 아니’라는 위안을 주었다. 그의 저서들 중 비교적 초기에 번역된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은 대학가에서 새로운 필독서로 부상했다.

 

이 책은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시작된 경제 위기의 원인과 세계 경제 전망에 관해 밝힌 책이다. 물론 고전 맑시스트의 명성에 걸맞게 경제 위기를 맑시즘의 관점에 서서 근본부터 파고든다. 이번 경제 위기에 많은 사람들이 moral hazard라는 잣대를 들이댄다. 그러나 미국 금융 위기가 moral hazard 탓이라는 주장은 기실 ‘구조’의 문제를 ‘개인’에게 돌리는 우파적 관점이다. moral hazard를 말하는 자들의 논점은, 금융위기가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구조적 모순이 아니라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의 부도덕함 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캘리니코스는 미국 및 전세계 경제 위기를 둘러싼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맑시즘의 시각에서 분석한다(저자가 맑스주의 경제학의 개념을 별다른 설명 없이 사용하기 때문에, 여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다소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많은 이론가와 정책가들이 등장한다. 저자는 그들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매우 시사적인 현상들에 관한 상충하는 의견들과 그 이론적 배경을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전반부는 미국 금융위기를 미시적으로 다루고, 후반부는 좀 더 거시적이고 세계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한다책의 내용이 다소 산만하고, 강조점이 명확하게 부각되지 못했지만 이 책을 통해 주장하는 캘리니코스의 핵심은 이번 위기가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주요 주장과 흥미로운 부분을 요약, 재구성하고 거기에 내 의견를 덧붙여 정리하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하고자 한다.

 

1부에서는 미국 금융위기를 다룬다. 무분별한 ‘파생상품’ 판매가 금융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일지언정 그 근저에는 이러한 위기까지 이끈 자본의 과잉 축적과 이윤율 저하의 문제가 깔려 있다는 것이 캘리니코스의 기본 입장이다.

 

흔히 힐퍼딩의 금융자본론은 1980, 90년대 대학가 좌파 운동권 사이에서 종종 읽혔던 책인데, 자본주의 후기에 이르러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하게 된다는 금융자본론의 입장과는 반대로 미국에서는 1945년 이후 그러한 경향이 오히려 줄어들었고 최근에는 채권과 양도성예금증서 발행 따위의 방식으로 산업자본이 스스로 자본을 조달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미국 금융자본은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서 가난한 가계에 모기지 대출을 남발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결국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이어졌다. 그러고보면 ‘신용’이라는 것이 신용카드나 모기지 같은 형태로 개별 소비자들까지 주어지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말이 좋아 ‘신용사회’지 그 내막을 보면 이렇듯 불안정하고 불순한(?)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자본주의 하에서는 각종 신용 상품들, 혹은 신용 파생상품들의 이름을 걸고 A의 신용위험을 분산해서 a1, a2라는 상품으로 B C에게 팔고 이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D, E, F, G에게 팔고… 하는 방식을 통해 위험을 완벽하게 분산시켰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을 단순히 분산시킨 것이 아니라 동일한 정도의 위험을 더욱 많은 경제주체들이 떠안는 것을 의미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의 정도가 더욱 커진 것을 의미했다.

 

파생상품의 핵심적, 보편적 특징은 모든 자산을 ‘해체’하고 ‘분해’해서 그 구성 요소들로 쪼개고, 자산 자체를 거래하지 않으면서도 그 구성 요소를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생상품은 다양한 종류의 ‘특수한’ 자본을 결합하고 혼합하는 독특한 구실을 하는 메타 자본의 성격 때문에 1971년 미국이 금환본위제를 포기한 이후 국제통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고정 장치 구실을 할 수 있었다. 파생상품은 개별 자본들이 마치 안정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 금융 시스템 속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해준다. 하비의 표현을 빌리면 파생상품은 “교환을 매끄럽게 하고 비용도 들지 않고 즉시 조정할 수 있는 화폐”의 구실을 했다. 2008년 중반 장외 거래 파생상품 미결제 계약의 개념적 가치 총액은 683 7,000억 달러로 세계 총생산보다 11배 많았다. (pp. 57, p. 58 & p. 77)

 

(헤지펀드, 사모펀드, 구조화투자회사 같은) 그림자 금융 시스템이 오랫동안 숨어서 전혀 규제 받지 않은 채 마술처럼 신비하게 서브프라임 대출을 해준 다음 그 대출들을 묶어서 월스트리트의 마법사들만이 설명할 수 있는 세 글자짜리 온갖 전달 상품으로 만들어서 판매했다. (pp. 51-52)

 

그러나 캘리니코스는 세계 경제위기의 원인이 금융권에서 시작되었을지언정 금융권만이 원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의 위기가 자본축적 과정 전체에서 작동하는 심각한 모순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위기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 세 가지 차원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1) 장기적인 과잉 축적과 수익성의 위기, (2) 만성적으로 불안정하고 구조적으로 불균형한 세계 금융 시스템, (3)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한 신용 거품 의존 증대.

 

(1) 미국에서는 수익성(이윤율) 위기를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산업 재편, 노동운동 탄압, 노동자에 대한 착취 증가를 통해 극복하려 했다. 노동생산성이 증가된 것에 비해 실질임금이 동결되어 노동력의 가치는 꾸준히 떨어졌고, 생산성 증가의 결과물은 자본에게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 미국 자본의 이윤율은 오늘날까지 꾸준한 하락세를 보였다.

 

(2) 미국은 금 태환이 되지 않는 달러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이용해서 만성적 국제수지 적자를 메울 수 있었다. 미국은 꽤 낮은 금리로 얼마든지 자국 통화를 빌릴 수 있었다. 연방준비위원회는 세계 전역의 잉여 저축과 잉여 재화 및 서비스를 일정한 실질 환율로 흡수해서 미국 경제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세계 경제의 균형도 유지하는 정책을 자유롭게 추진했다. 그러나 심지어 세계 최빈국에 속하는 나라에서 유입되는 자금에 의존해야 하는 미국의 헤게모니는 사실 취약한 것이었다.

 

(3) 1998년 러시아의 디폴트 선언 이후 미국의 주요 헤지펀드인 Long Term Capital Management(LTCM)가 파산하자 그린스펀은 구제금융과 금리 인하를 통해서 지속적인 주가 상승을 유도함으로써 국내 소비와 투자를 계속 부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IT 산업에 대한 과잉 투자를 불러왔고 2000년 닷컴 거품이 꺼지면서 다시 불황이 닥쳤다. 이에 그린스펀은 강조점을 바꾸어 모기지 금리를 낮추고 주택 가격을 올리면서 가계 차입과 소비 지출을 늘리는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주택 가격이 56% 상승한 5년이 지난 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발하자 이러한 조처도 효과가 다했다.

 

별로 안전하지 않은 채무자들에게 내준 대출, 예컨대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특히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위험도가 높을수록 이자와 수수료도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용평가기관들은 자신들에게 수수료를 지급하는 은행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으므로 많은 CDO를 트리플A, 즉 디폴트 위험이 거의 없는 안전한 투자 등급으로 분류하고 보증해 줬다. (p. 107)

 

그러나 2006-2007년에 모기지 디폴트가 급증하자 은행들과 그림자 금융권의 은행 파트너들이 세운 투기성 사상누각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금융 시스템은 한쪽 끝만 잡아당기면 전체가 줄줄 풀리고 마는 뜨개질한 목도리 같은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p. 116)

 

최근의 경제위기는 무엇보다 금융위기와 연결된 불황이며 전세계적인 불황이다. 이 점이 이번 경제위기의 회복을 더디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엄청난 손실에 직면한 금융기관이 대출을 줄이고, 대출이 어려워진 기업은 생산을 줄이고 가계는 저축을 늘린다. 이것은 다시 금융권을 압박하고 금융기관은 대출을 더욱 줄이게 된다. 이른바 디레버리징(Deleveraging)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오늘날의 경제 및 금융위기가 훨씬 더 깊고 장기적인 과잉 축적과 수익성 위기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노동 착취율을 높이고 자본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그다지 큰 효과가 없었고, 후자는 국가의 구제금융 때문에 실현이 저해되었다. 구제금융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최악의 조합, 즉 손실은 사회화하고 이득은 사유화하자는 것이었다. 수익성 없는 기업들이 파산하도록 내버려 두면 자본의 가치가 크게 떨어질 것이고 그러면 이윤율이 다시 충분히 상승해서 새로운 축적이 시작될 수 있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1930년대 대공황만큼이나 장기적이고 심각한 불황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구조적 딜레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주요 국가들이 시장에서 비효율적인 자본들이 일소되도록 자유방임한다면 그 결과는 장기 불황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나서서 자본의 대대적 가치 저하를 막는다면 과잉 축적과 수익성의 장기적 위기가 지속될 것이다. 이것은 세계 자본주의가 수십 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근본적 모순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다. (pp. 128-132)

 

2부에서는 흥미로운 이론화가 눈에 띤다. 세계화 이후에 약화된 것으로 믿어 왔던 국민국가의 재등장, 경제 통합을 가로막는 지역경제들간의 갈등, 그리고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는 미국 헤게모니 등을 다룬다.

 

우선 미국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면 국민국가의 재강화를 목도하게 된다. 즉 세계화된 경제는 있어도 세계 정부는 존재하지 않으며 2008년 경제 위기를 즈음하여 오히려 각 국가 수준에서 경제에 개입하려는 시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오랫동안 경제연합을 추진해 온 유럽에서조차 그렇다.

 

또한 석유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러시아와 걸프 국가들이 막대한 수입을 올렸고, 아시아 지역은 제조업과 일부 서비스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는 세계 경제의 경제력이 이동했고 서방 자유 자본주의가 세계로 확산되는 데 제동이 걸린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중국, 러시아, 걸프 국가 등 신흥 경제들은 자유 자본주의가 아닌 국가자본주의 모델을 따른다. 방대한 에너지원을 보유한 중동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현지 민중의 저항에 직면하여 지지부진해졌고, 이라크 전쟁에 대한 유럽의 협력은 석유와 가스 공급을 쥐고 있는 러시아의 방해로 약화되었다.

 

미국은 자국 경제를 살리려는 노력 속에 대외 채무가 늘었는데 특히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채무가 늘었다. 그 중에서도 중국은 2008년에 중국 GDP 10%가 넘는 4,000억 달러 이상을 미국에 빌려 주었다. 그러나 미국은 달러 평가절하를 통해 부채 부담을 덜려고 했고, 이는 채권국들과의 갈등을 낳았다. 이에 미국 국가정보위원회에서 나온 보고서조차 미국의 세계 지배력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즉 신흥 강대국들의 부상, 세계화하는 경제, 서쪽에서 동쪽으로 상대적 부와 경제력의 이동, 비국가 행위자들의 영향력 증대 때문에 2025년쯤이면 세계 체제는 다극 체제로 바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동안에 어떠한 갈등과 대결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다극 체제라고 해서 미국이 여러 다극 중 하나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세계 경제에서 미국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은 수출의존도가 지나치게 높고 내수시장이 너무 작다. 생산성 향상보다는 저임금에 기초하여 수출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산시설에 대한 과잉투자로 유휴설비가 크게 늘기 시작했다.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경제들 대부분이 저축은 높은 반면 소비가 적다는 불만이 이번 경제 위기를 계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다른 신흥 경제의 부상은 그들 사이에서 갈등과 긴장을 낳게 될 것이고, 미국이 이것을 이용해서 이른바 분할 지배 전략을 구사하기가 수월해질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에 경제는 국민국가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고, 때문에 처음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낳았지만 종전 이후에는 ‘착근된(embedded: 배태된)’ 자유주의라는 형태의 타협을 이루었다. 즉 국제 수준에서는 자유화를 보장하지만 국민국가 수준에서는 국가의 개입을 강화(공공부문 확대, 복지 확대, 케인스주의 수요관리 정책으로의 전환)하는 형태가 결합된 것이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경제는 다시 1930년대 이전처럼 사회에서 분리된 형태로 돌아갔지만,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다시 ‘착근된’ 자유주의로의 복귀가 점쳐지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오늘날이 달라진 것이 있다. 경제의 세계화가 많이 진전된 탓에 국민국가가 경제를 규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제적 규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위기와 변환은 특정 정책 레짐(regime)과 특정 자본주의 형태가 실패해서 다른 형태들로 진화되는 과정인가? 캘리니코스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를 괴롭혀 온 훨씬 더 뿌리 깊고 오래된 위기, 즉 과잉 축적 위기와 이윤율 저하 위기가 다른 형태로 전이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번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위기를 보여준다.

 

대안은? 결론에서 캘리니코스가 주장하는 내용은 그가 기본적으로 항상 품고 있는 생각이겠지만, 본론에서 나온 미국과 세계 경제 위기와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민주적 계획경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볼리비아의 가스, 석유산업 국유화는 고무적이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다. 경제적 우선순위들이 경쟁이 아닌 민주적으로 결정되는 경제질서를 향한 결정적 한걸음을 내디뎌야 할 것이다. 그 과정의 하나로 ‘전국민 기본소득제’를 주장한다(이 부분은 글의 전개상 꼭 필요하지는 않았겠지만 저자가 한 번은 언급하고 싶었나 보다). 모든 국민이 기본소득을 보장 받으면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노동을 팔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므로 노자관계가 역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가능한가? 국내 반대세력이 가만히 있을까? 국제적인 반대 세력들은? 그리고 볼리비아처럼 이미 한 발을 내디딘 국가 말고 아직 시작도 못한 국가들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이쯤 읽다 보면 캘리니코스가 혁명론자가 아닌 개혁주의자였나 하는 착각마저 든다.

 

그러나 결론의 후반부로 가면 자본에 맞서는 세계적 수준에서 벌어지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의 필요성과 가능성이 언급된다(그런데 이러한 결론은 1, 2부의 주장을 통해 논리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일성을 저해한다. 그저 그의 평소의 자기 주장을 다시 한 번 반복하고 따름이다). 자본의 세계화는 저항의 세계화를 낳았다는 논지인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본문과 비교해 볼 때 결론이 너무 거창한 듯하다.

 

[덧붙임] 다음 오타들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간혹 두 칸씩 띄어쓴 곳도 수정해야 한다.

균형를 -> 균형을 (p. 67), 다름과 같이 -> 다음과 같이 (p. 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 비판
역사문제연구소 / 역사비평사 / 1996년 11월
평점 :
품절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 비판은 근대성이라는 주제로 한국 근현대사를 설명한 연구서이다. 1980, 90년대까지 비제도권 역사연구의 주된 방향은 소위 '민중사관'에 기초하여 정치권력의 탄압과 민중의 저항을 다루거나 민족주의에 기초하여 탈식민지(그것도 가장 단순화된 모습으로서 '반미' '해방')를 다루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비제도권 역사학은 도매금으로 '구시대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버렸다. 그만큼 80, 90년대 재야 역사학이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서 있었던 탓이다.

이후 그들은 더욱 근본적인 쟁점으로 '근대성 비판'을 들고 나왔다. 이 주제는 확실히 강력한 것이었다. 근대 후기, 다시 말해 현대에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한 각개전투식 대응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근대주의적 가치관(근대적 발전 모델 따위의)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적인' 근대성의 논리에 비추어 한국 역사를 바라본다는 것은, 근대성을 부정하는 것이건 근대성을 보완하는 것이건 간에 역사를 미래와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적극적인 자세이며 세계적 수준(세계체제론)에서 벌어지는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매우 거시적이기도 하다.

 

이 책에 따르면,

 

근대, 근대의 특징을 의미하는 근대성, 근대성의 성취과정인 근대화 등의 개념은 제3세계보다 근대의 출발이 빨랐던 서양의 일국사적 경험에서 추출한 것이다. ……서양의 근대성은 제3세계에 이식되면서 근대성의 원형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화학적 변용을 통해 식민지적 근대화 형태로 변모한다. 일국사적 발전모델인 서양 근대의 단선적 모순에 비해 식민지적 근대화의 모순은 입체적으로 중첩되면서 그 지양을 위한 역사적 비용 또한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 모순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독립을 계기로 부분적으로 해소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 중심국의 변화된 세계지배 구조 속에서 변형된 모습으로 더욱 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결국 식민지적 근대화 모순의 지양은 단선적으로 원형회복의 차원을 넘어 세계사적으로 근대 지양의 출발점을 이룬다.[i]

 

저자는 식민지적 근대가 서양의 원형적근대와 다를 수밖에 없음을 논한 뒤, 식민지적 근대화의 모순을 지양하기 위한 노력들의 한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계서제적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는 서구의 원형적근대화와 같은 세련된근대화(예컨대, ‘신포디즘같은)를 좇아가려는 주변부-반주변부의 어떠한 노력도 허사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세계체제의 계서제적 분업구조의 특성상 주변부-반주변부에서는 국내 반체제운동 세력의 요구를 무마하기 위해 지배계급이 분배할 수 있는 파이 조각의 양()이 지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국내 반체제 세력에 대한 전환의 비용은 지배계급이 자신에게 분배될 파이 조각의 일정 지분을 포기함으로써 혹은 분업체계의 하위에 위치한 국가로부터의 초과이윤을 유용(流用)함으로써 충당되어져 왔다. 그러나 중심부가 아닌 경우 국내 반체제 세력에게 분배할 파이 조각은 쉽게 고갈되는데[ii], 그러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면 심지어 지배계급조차 계서제의 모순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일찍이 레닌이 말했던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가 세계체제의 주변부-반주변부에 항상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세계체제론의 수용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여겨진다. 거시적인 맥락에서, 지난 10여 년간 한국과 전세계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들, 이를테면 멀리는 유럽 통합과 그 속에서도 짐짓 자국의 이해관계를 고수하려는 혼미한 각축, 취약한 유럽 경제, 일본의 재군사화, 러시아의 G8 가입, 세계경제에서 중국의 급부상, 동남아시아에서의 유혈 사태들, 지역내-지역간 경제 블록화, 폰지사기(Ponzi Scheme)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등 나태한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인한 미국 경제위기 그리고 가까이는 남한 자본의 구 사회주의권 진출, 경제개혁 이후 일련의 부도사태와 정부의 일관성 없는 해결책 등등이 모두 현실사회주의 몰락후 세계체제의 새로운 규칙에 적응하기 위한 소리 없는 전투들인 것이다. 그러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는 현실에 세계체제론은 제동을 건다. 게임의 법칙을 제대로 알기나 하고 게임에 참가하고 있느냐고.



[i] 정태헌, 한국의 식민지적 근대화 모순과 그 실체, 역사문제연구소 편,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 비판, 역사비평사, 1996, pp. 242~243.

 

[ii] 여기에 들뢰즈/가타리류의 ‘욕망이론’이 적절히 결합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그로 인한 생산력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그와 비례해 인간의 욕망도 동시에 증대되어 왔기 때문에, 파이 조각을 둘러싼 ‘제로섬 게임’의 기본규칙은 변함이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