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부에서는 우파에서부터 근본주의자와 급진 좌파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데올로기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비판을 가하고 결국에는 공산주의가 다시금 필요한 이유를 밝힌다. 라깡에 기대어 이데올로기 그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도 물론 제시한다. 이데올로기의 힘과 작동 방식에 관한 여러 가지, 조금은 생소한 사례들이 제시된다. 지젝이 제기한 비판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토마스 프랭크는 경제적 계급적대가 오늘날 미국에서는 근면한 기독교인와 퇴폐적 자유주의자 간의 대립으로 환치되었음을 지적했다. 즉 계급전쟁이 문화전쟁으로 전치된 것이다. 그래서 단 2%의 최상위 부자들에게만 세금을 늘리려는 오바마 정책에 그렇게 많은 보통사람들까지도 반대하는 포퓰리즘적 보수주의가 득세할 수 있었다. (pp. 68-71)

폰지 사기로 구속된 메이도프가 자신의 계략이 결국 무너지지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 것은 그의 개인적 악덕이나 비합리성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관계에 내재한 문제 때문이었다. 합법적 업무를 피라미드 사기로 변형시키려는 유혹은 자본주의적 순화과정의 본질 자체에 속하는 내적 추진력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원동력 자체가 합법적 투자와 무모한 투기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적 투자의 핵심은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내기이며 미래로부터 차용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통제 불가능한 어떤 상황 변화가 안전한 투자로 간주된 것을 파산으로 이끌 수 있다. (pp. 76-77)

지젝은 탈레반 같은 근본주의자들을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진정한 혁명세력으로 높이 평가하는 시각을 견제한다. 그는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여 파시즘의 발흥은 실패한 혁명을 증언한다는 주장을 적극 옹호한다. 급진 이슬람주의의 발흥은 이슬람국가들에서 세속적 좌파가 소멸한 것과 정확히 상응한다. 예컨대 아프가니스탄은 불과 30년 전만 해도 소련과는 독립적인 강력한 공산당이 존재했었다. (pp. 146-149)

그리고 1부 후반부로 가면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자유주의화된 좌파 혹은 개량주의적 점진주의까지 포함해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다시 공산주의의 기치를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가 구태의연한 이데올로기적 유토피아라는 생각이 든다면, 오히려 오늘날 자본주의 그 자체야말로 진정으로 유토피아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탱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승리가 끔찍했던 20세기 전체주의적 유토피아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유토피아는 역사의 종말에 도달했다고 믿었던 1990년대였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공산주의의 필요성은 유토피아적 사고가 아니라 현실적 필요성에서 나온다. 세계화된 경제질서 속에서 상품화된 식량, , 석유의 부족사태가 제3세계 국가들을 기아로 몰아넣고 있는 지금, 공산주의가 다시 문 앞에 와 있다. , 에너지, 환경, 문화, 교육, 건강 등을 시장에 맡겨 둘 수는 없다.

2부는 이른바 새로운 공산당 선언과도 같다. 2부는 오히려 1부보다 쉽게 읽힌다. 지젝의 어투는 확신에 차 있다. 그는 공산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오늘날 공산주의 이념을 실천할 현실적 적대관계를 붙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젝은 그러한 적대관계로 생태적 파국의 위협,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의 사회, 윤리적 함의, 새로운 형태의 (빈부간)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 등 네 가지를 내세운다.

공통적인 것”(the commons)에서 배제되는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이 여전히 존재하며, 그것은 더욱 배타적이고 철저한 과정이다.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었던 고전적 이미지의 프롤레타리아와 달리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상징적 실체를 빼앗기고, 유전자 염기는 심하게 조작되고, 살 수 없는 환경에서 비실대며 지내는, 모든 실체적 내용이 결여된 추상적 주체로 영락할 위험이 처해 있다. (p. 185)

이어 지젝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대비시키면서 사회주의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가 사회주의의 예로 드는 것들은 공동체주의, 포퓰리즘, 아시아적 가치에 입각한 자본주의 등이다. 그러면서 영원한 유토피아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닌 현실적 필요성에서 나오는 공산주의를 옹호한다. 2부를 요약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꽤 흥미롭고 새로운 주장들을 담고 있어서 1부에 비하면 술술 읽힌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맑스, 레닌, 라깡 등의 이론과 현대 사회주의의 역사에 대해서 약간씩의 지식이 없다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극우에서부터 극좌에 이르기까지 신랄한 비판을 쏟아부으면서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가속화시키는 프롤레타리아화를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서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지젝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덧붙임]

1. 제목과 관련하여

 한글 번역서에는 원서에 없는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 책의 내용과 그다지 부합하지는 않는다. 1부의 내용 중에 세계금융위기와 관련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오늘날 계급적대가 문화화, 이데올로기화, 혹은 물신화 되어 있어서 피지배계급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으로 쉽사리 나아간다는 주장을 현학적인 수사와 잘 알려지지 않은 사례들을 동원하면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잠깐 등장할 뿐이다. 좀 더 솔직한 부제라면 신공산당선언정도가 어울렸을 것이다.

2. 번역과 관련하여

잘 읽히지 않는 책이다. 특히 1부가 그렇다. 무엇보다도 원서 자체가 술술 읽힐 만한 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는 그렇게 쉽지 않은 책을 역자가 주로 직역을 했기 때문에 번역서의 가독성은 더더욱 떨어진다. 번역의 문제부터 몇 가지 짚고 넘어가겠다.

전체적으로 번역은 오역은 없어 보이지만 그다지 매끄럽지는 못하다. 번역 어휘 선택도 항상 최선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부사나 수식어구의 위치도 재정렬해야 더 매끄러워질 문장들이 많이 있었다. 원문을 최대한 그대로 살리고 싶어서 직역을 위주로 했던 것이라 해도, 어차피 영어와 한글이 전혀 다른 구조와 표현법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말에 가깝게 의역하는 것이 어쩌면 저자의 의도를 더 잘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의 말이 아니라 TV 광고를 번역한 부분에서도 직역 어투가 그대로 나오는 걸로 봐서, 역자가 원서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직역 어투를 고집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예컨대 110-112쪽에 번역된 스타벅스 광고는 마치 한국어에 익숙하지 못한 Korean American 2세가 번역한 것 같은 문장이다.

이것보다 조금 더 나은 직역어투의 예를 들어보자. 수없이 많지만 마침 노트북 앞에서 책을 읽다가 시간을 내서 기록해둘 수 있었던 것들 중에서 몇 가지 예만 들면 다음과 같다.

수에즈운하 동편의 이스라엘 부대가 이집트 군사들에 의해 괴멸되던 패닉의 순간에 일어났던 일들의 믿을 만한 녹음기록을 뒤편의 오디오기계가 재생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p. 87)

è  이 길지 않은 문장에는 (of)’가 네 번 나오는데, 번역이 너무 무성의하다. 영어에서 of는 한국에서 1:1 매칭이 되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주술관계, 소유관계, 동격관계, 수식관계 등 다양하다. 의미에 맞게 풀어 써주는 것이 낫다. 이렇게 를 그대로 쓰는 관행은 해방 이후 영어책을 일본에서 번역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본어 특유의 ()’를 하나하나 로 번역해서 써왔던 데서 비롯된다. 이 문장에서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일들의 믿을 만한 녹음기록에서 는 무척 어색하다. 그리고 ‘-에 의해+수동태는 완전히 영어식 표현이다. 또 하나, ‘오디오기계에서처럼 외래어와 한국어가 결합되는 합성어는 띄어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좀 더 확실한 건, 강 이름이나 산 이름 같은 경우에 나일 강처럼 띄어써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편이 좀더 한국어문법에 맞고 자연스럽다. ‘수에즈운하 동편에 주둔한 이스라엘 부대가 이집트 군사들에 괴멸되던 패닉의 순간에 발생한 일들을 녹음한 믿을 만한 기록을 뒤편에 있는 오디오 기계가 재생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합리적 반유대주의라는 공식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은 1938년 로베르 브라지야크에 의해서인데 그는 자신이 온건한반유대주의자라고 생각했다. (p. 99)

è  전형적인 수동태 문장이다. 원문이 수동태라서 그대로 번역했을 것이다. 지젝이 굳이 능동태로 만들 수도 있었을 이 문장을 수동태로 만든 것은 “The best expression of … was by Robert, who regarded himself as a…”와 같이 Robert에 대한 수식어구를 문장 맨 뒤에 간략하게 덧붙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한글과 다른 영어의 특징이자 묘미이고, 어디 가서 영어 곧잘 한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이런 식으로 문장을 구성하는 게 당연하다. 여기서 ‘who’ 이하는 이른바 관계대명사 계속적 용법이라 불리는 것으로, 흔히 앞문장을 해석한 후 who 이하를 해석하면 된다고 알려져 있다. 역자는 이러한 해석 방법에 충실히 따랐다. 원문을 바꿔서 “Robert, who regarded himself as a…, expressed the best formulation…”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물론 이 경우 그 뉘앙스는 조금 달라진다. 그렇지만 위 번역처럼 원문의 구성을 그대로 번역하는 건 문제가 있다. 한국어에는 수동태 표현이 잘 쓰이지 않는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관계대명사 계속적 용법은 앞 문장에 이어서 해석하기보다는 제한적 용법처럼 수식관계로 바꾸어 해석해주는 편이 나을 때가 많다. 따라서 위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을 온건한 반유대주의자로 여기는 로베르 브라지야크는 1938년 합리적 반유대주의라는 공식을 가장 잘 표현한 적이 있다.’

… ‘진정한실존적 선택이런저런 상품의 피상적 선택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전면적인 실존적 참여를 포함하는 선택이라는 주제에 갖가지 변주를… (p. 129)

è  이런 식으로 하이픈으로 삽입하는 문구는 사실 한국어문법에 고유한 표현이 아닌 것으로 안다. 영어를 그대로 번역한 문장이 하도 많이 유통되다 보니 어느새 이런 표현이 마치 한국어문법에 원래부터 있었던 양 번역서가 아닌 순 창작물에도 이런 식의 표현을 종종 보게 된다. 가능하다면 하이픈 없이 그냥 수식어구로 적절히 배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문장에서 또 하나 더 심각한 문제는 번역된 삽입구가 무슨 말인지 한눈에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영어식 표현으로서 명사+of+명사를 그대로 직역한 점, including으로 시작되는 이 삽입구를 포함하는이라고 그대로 번역해서 당최 무엇을 어디에 포함한다는 것인지 중요하지도 않은 표현 때문에 잠시 문맥을 잃기 쉽다는 점, contrary to인지 as compared to인지 모르겠으나 ‘-에 대립하는 것으로서라는 표현이 무척 문어적이기도 할 뿐더러 대립이라는 강한 표현 때문에 괜히 초점이 분산된다는 점 등등 문제가 많이 있다. 다음과 같이 바꾸면 좋았을 것이다. “… ‘진정한실존적 선택이런저런 상품을 피상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 실존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비롯하여이라는 주제에…”

메씨지, 씨스템: 외래어 표기법상 메시지’(message), ‘시스템’(system)으로 표기하게 되어 있는 것을 굳이 메씨지’, ‘씨스템이라고 번역한 것은 그것이 영어 발음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법을 거스르면서까지 새로운 번역어를 주장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외래어 표기법을 몰랐기 때문일까? 영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기를 원했다면, 예컨대 스트리트스트릿으로, ‘아크로님애크러님으로 표기했어야 하지 않을까?

/녀를: ‘his/her’를 번역한 것인데미국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사고방식 때문에 ‘a person’을 대명사로 다시 쓸 때 ‘he’ 하나로만 써서는 안 되고 ‘he/she’로 써야 한다. 여기서 슬래시(/)  ‘or’에 해당한다. 그래서 ‘his/her’는 번역하면 그 혹은 그녀의이다. 그런데 국문법에서는 주로남자를 가리키기는 하지만 여자도 가리킬 수 있으므로 ‘his/her’그의로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역자는 국어 표현에 존재하지도 않는 /녀가’, ‘/녀를등의 표현을 개발했는데, 새로운 번역법을 주장하려는 명백한 의도가 아니었다면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다.

‘-에 있어서’: 일본어 문투

이 외에도 용어나 어휘 번역이 부자연스러운 경우가 많이 있었다. 책 앞부분에서만 해도 문제점이 이렇게 많이 발견돼서 이렇게 따지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얼마 지나고부터는 그냥 꾹 참고 읽어 나갔다.

용어에 대한 설명도 균형감이 없다.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서 주석이 필요한 용어는 그냥 둔 채 그다지 몰라도 되는 용어는 오히려 장황한 주석이 달린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번역자도 영어 번역본을 텍스트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솔직한 의견으로는 그냥 영어본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최근에 읽었던 수많은 한글 번역본 중 가장 거슬렸던 책 중 한 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