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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평점 :
『앵무새 죽이기』의 입장에서 보자면 『파수꾼』이 차라리 출간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슈퍼맨과
배트맨 등 영화와 만화를 휩쓴 온갖 영웅들을 제치고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영웅으로 꼽혔던 애티커스는 『파수꾼』으로 인해 오명을 쓰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심각한 위상의 추락을 겪게 되었으니 말이다. 정의와 양심의 수호자였던 애티커스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컸던 만큼,『파수꾼』에서 변심한 애티커스를 향한 독자들의 배신감과 분노도 컸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파수꾼』을 반품하겠다는 지역 서점까지 있었다.
그리고 『파수꾼』으로 인해 『앵무새 죽이기』의 재평가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그런 논의들의
핵심 주장은 『앵무새 죽이기』에서 보여준 애티커스의 행동이 최소한의 윤리였고, 따라서 이 작품에서 이미 『파수꾼』에서의 변절(?)이 예고되었으며, 이것이 작가로서 하퍼 리가 가진 한계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도 100% 수긍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작품은 시대의 산물이고, 따라서 그 시대의 상황과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즉, 『파수꾼』이든 『앵무새 죽이기』이든, 두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당대의 현실이라는 점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애티커스라는 인물은 미국 남부를 살았던 ‘양심적인 변호사’라는 캐릭터로 읽어야지, 그것을 ‘하퍼 리’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
가령 셜록 홈즈, 에르퀼 푸와로와 더불어 엘러리 퀸이 선정한
3대 탐정의 한 명으로 추앙받는 브라운 신부는 ‘신부’라는 직업의 특성상 인간 본성에 대한 심도 깊는 통찰과 범죄자의 심리 분석에
입각한 특유의 연역적 추리로 수많은 사건들을 해결하는 탐정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보자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언설들, 예를 들어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적인 말들을 많이 한다. 그렇지만 그걸로 인해 브라인 신부를 평가 절하하거나 20세기 추리문학의
거장인 G. K. 체스터턴의 위신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이런 점들을 근거로 G. K. 체스터턴의 한계를 운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브라운 신부라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설정이면서 동시에 그 당시의 영국과 영국의 지식인층과
사교계를 보여주는 장치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즉,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읽으며 우리가 브라운 신부에게서 어떤 한계를 찾는다면 그것은 작가적 한계나 인물의 결함이라기보다는,
그 당시의 한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찬가지로 『파수꾼』이후 『앵무새 죽이기』를 새롭게 해석하거나, 애티커스를 재조망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측면과 각도에서 작품이나 인물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은 일정부분 유의미하지만, 『파수꾼』으로 인해 (시류나 분위기에 휩쓸려) 『앵무새 죽이기』나 애티커스를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작품은 작품이 창작된 시대적 배경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작중 인물은 작가의 사고체계나
가치관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역시 그 시대의 소산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가 지나치게 평가절하 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한편,『앵무새 죽이기』에서 보여준 애티커스의 행동이 최소한의 윤리였다는 비판은 적어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지나치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는 이 최소한의 윤리를 지키는
사람마저 드물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환경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미국 남부라는 견고한 보수적 사회에서, 그것도 대공황 직후라는 어수선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희생양’이 필요한 성난 대중들 앞에서 ‘최소한의 윤리’를 지키는 것조차 매우
큰 용기와 양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것은 굳이 그 사람의 '살갗' 속으로 들어가 ‘그 상황’ 속 ‘그 인물’이 되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끝으로 걸어가셨습니다. 등나무 덩굴을 살펴보신 뒤 다시 내게로 걸어오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네?」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다니는 거지.」 (pp.64-65)
가령 『앵무새 죽이기』의 백미는 법정 장면인데, 긴박감으로 보자면 사실 그 전날밤이 더 크다. 젊은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쓴 한 흑인 청년의 목숨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지 않고는 불가능한 결단이자 행동이었다. 이 용기와 결단을 누가 과연
작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백번 양보해서 애티커스가 보수적인 남부인으로서 한계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가 보여준 이 용기와 양심은 감동적이고 고귀하다.
또한 ‘최소한의 윤리’는 그 자체로 최대의 선은 아니지만, 그리로 갈 수 있는 동력이 되어줄
순 있다. 어쨌든 ‘그 사건’을 경험한 것이 애티커스의 딸인 진에게는 이후의 인생과 성격을 결정짓는
큰 사건이 된 셈이고, 그것이 『파수꾼』에서의 청년 진을 구성하고 형성했으니깐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를 지나치게 영웅시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평가절하하며 조롱할 이유도 없다. 현 시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건 애티커스처럼 최소한의 윤리라도
지키려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고, 사실 ‘최소한’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을 지키려면 있는 힘을 다하고, 갖은 용기를 다 내야 겨우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변호해선 안 된다고 하는데 왜 하시는 거예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읍내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고, 이 군을 대표해서 주 의회에 나갈 수 없고, 너랑 네 오빠에게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다시는 말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야.」
「아빠가 그 사람을 변호하시지 않으면,
오빠랑 저랑 이제 더 아빠 말씀을 안 들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그런 셈이지.」
「어째서요?」
「내가 너희들에게 내 말을 들으라고 두 번 다시 말할 수 없기 때문이야. 스카웃, 단순히 변호사라는 직업의 성격으로 보면 모든 변호사는 말이다,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맡기 마련이란다. 내겐
지금 이 사건이 바로 그래. 이 문제에 관해 어쩌면 학교에서 기분 나쁜 말을 듣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나를 위해 한 가지만 약속해 주렴. 고개를 높이 들고 주먹을
내려놓는 거다. 누가 뭐래도 화내지 않도록 해라. 어디 한번
머리로써 싸우도록 해봐……. 배우기 쉽지는 않겠지만 그건 좋은 일이란다.」
「아빠, 우리가 이길까요?」
「아니.」
「그렇다면 왜」
「수백 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려는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없으니까.」 ( pp.148-149)
애티커스의 이 말은 현재에도 유용하며, 따라서 경청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용기와 양심과 결단이다. 이것이
‘최소한의 윤리’라면, 그렇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최소한의 윤리’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