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내가 잊고 있던 단 한 사람
정채봉 지음 / 이미지앤노블(코리아하우스콘텐츠)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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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아오면서 내 나이만큼의 다양한 책들을 만나 보게 되었는데, 그 수많은 작가들 중에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정채봉이다. 그로인해 나도 아동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고, 아동작가가 되기 위한 필요한 조건에 대해 생각한 만큼 순수를 머릿속에 담고 지내게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비록 지금은 그가 이 세상에 없지만, 그의 커다랗고 착한 눈망울은 영롱히 빛을 발해 대한민국 곳곳에서 숨쉬는 사람들 마음 안에 청초히 살아있다.  그의 저술들은 전부 초록빛이 난다. 거의 그의 글은 오선지 위에 잘 짜여져 방실거리며 대롱대롱 메달린 음표 같고, 새벽녘 호박잎 위에서 통통 춤을 추는 투명한 이슬 같다.

 

이 책, '나 내가 잊고 있던 단 한 사람'은 정채봉의 에세이, 시, 동화를 하나로 담아 낸 선집이다. 그의 마지막 유고집이 아닐까 싶다. 더 이상 그의 새로운 글을 못 보게 된다는 슬픔이 먹구름이 크게 기지개를 펴듯 내 머릿속 가득히 퍼져나간다.

 

정채봉의 글은 마음 중심에 깊이 배인 순수함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 순수함으로 상처 받아 구겨진 하얀 백지 위에 새순을 심는다. 상처 받아 시름하는 어른들의 가슴 켠켠마다에 맑은 동화를 통해 순수하고 올곧았던 어린 시절의 영상을 재여준다. '나'를 돌아보게 하여 준다. 그럼으로 '나'는 새로운 인생의 갈림길에서 소망과 순수와 평온과 무욕심으로의 길을 선택하게 되고 마음의 치유를 노잣돈 삼아 걸어갈 수 있게 해 준다. 정채봉은 글을 통해 잊고 살았던 동심과 순수한 자아를 돌아보게 하려는 계몽의 의지가 뚜렷하다. 그의 글이 아름답고 강한 이유는 이런 순수로의 회귀에 대한 구상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정채봉을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느낌은, 그는 착한 사람이라는 것. 그의 책 속 자음과 모음 낱낱 조각마다에 그렇게 쓰여져 있다. 그리고 그의 글은 군더더기가 전혀 없으며, 간결하고 그 속에는 천 마디의 말보다 더 선명한 설득력이 새겨져 있다. 글에서 맛이 나고, 그는 비록 죽었지만 이야기들은 언제까지나 살아서 숨쉰다. 우화를 이용하여 직접적인 간접적인 전달로 독자들 스스로가 진실을 낚아 마음 속에 삼키게끔 한다. 누군가 정채봉에 대해 말하기를,  그가 남긴 글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간직했던 첫 마음이 고스란히 흐르고 있다고 한다. 어느새 아이가 각박하고 속절없으며 척박해진 세상 속을 살아가는 어른이 되어 죽기 전까지 태어날 때의 초롱하고 명료하며 말간 순수, 바로 그 첫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값지며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이 책 속, '어느 달, 어느 날들' 속에서 작가는 몹시 아파 병원에 입원해 있다. 그를 아는 간호사가 다가와서 자기도 고향이 작가와 같은 순천이라며 뒤에 감추어 온 책을 내밀며 사인을 부탁하고 이내 정채봉은 '고향 사람을 타향에서 흰 구름 스치듯 보네'라고 사인을 해준다. 그리고 제가 순천여고 나온 걸 어찌아셨냐고 묻는 간호사에게 답하기를, "그 학교 여학생들 예쁘다고 소문나 있잖아요."라고 했다. 글 속 동화에서만 만나볼 수 있었던 새싹처럼 고운 작가의 생각을 실제로 만나 악수를 나누며 듣게 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정채봉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오래 전 누군가에 의해 그의 책을 선물 받게 되어서였다. 그 책의 이름은 '멀리 가는 향기'였는데, 우화나 동화식의 짧은 이야기들을 여러 편 담아 재밋게 표현하여  독자들 스스로가 삶이라든지 생활 속의 부조리, 또는 그릇된 가치관에 대해 지적해 주는 책이었다. 복잡한 소설이나 난해한 철학서, 마음을 다스리는 처세술 등 딱딱한 인문서 위주로만 독서했다가  이 책을 접하는 순간 가슴 가득 감동의 울림을 받게 되었다. 어렵게 쓰여지지 않은 동화로써 그 어느 도서보다 큰 영향을 받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바로 때가 묻지 않은 작가의 순수함이 책의 정중앙에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 '나 내가 잊고 있던 단 한 사람'도 '멀리 가는 향기'처럼 같은 맥락으로 쓰여져서 쉽게 읽혀지고 마음의 평온함이 찾아오며, 정신없는 도시를 떠난 편안한 휴식 속에서 나의 부질없는 삶의 욕망들을 한편 한편 끄집어 살펴보게 도와 주었다. 그렇게 잃어버렸던 예쁘장한 마음의 고향, 동심의 세상으로 사람들을 실어나르며 살다가 2001년 1월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맑은 영혼을 간직한 채 하늘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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