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한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궁금해서 구입한 책이다.
근 두 달 동안 이 책을 읽었나 보다.
각각이 분리된 장으로 나누어져 있어 시간날 때 짬짬이 읽었다.
역시 철학책은 소설처럼 책을 잡자마자 끝내지지 않는다.
오히려 두고두고 음미하며 읽는 게 나에게는 더 나은 철학 읽기 방식이다.
푸코의 언어는 들뢰즈의 언어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들뢰즈로 한 번 단련이 되어선 읽어갈 만은 했다.
그렇다고 내가 <말과 사물>에 씌어진 푸코의 생각을 전부 이해했다는 말은 아니다.
어려운 부분들은 그저 낯선 쇼스타코비치 음악을 듣듯이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단어와 어절과 문장들을 따라가며 그저 눈으로 훑었을 뿐이다.
그렇게 읽어가다 보면 어쩌다가 시를 읽을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렇게 푸코의 문장은 시적이고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예를 들어 '문학은 언어를 문법에서 적나라한 말하기의 힘으로 귀착하게 하고,
야생적이고 강압적인 말의 존재와 마주친다. 거기에서 언어는 억양도 대화자도 갖지 않고,
자기 외에는 말할 것이 전혀 없으며, 오로지 자기 존재의 광채로 반짝거리기만 할 뿐이다.'
푸코의 언어는 만연체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쉼표의 연속이다.
이를 테면 재현하기 부분에서 돈키호테를 분석한 부분을 보자.
'[돈키호테]는 르네상스 세계의 음화를 보여 주고, 문자는 세계의 산문이기를 멈추었고,
닮음과 기호의 오랜 일치는 무너졌고, 유사성은 기만하고 망상과 정신착란으로 바뀌고,
사물은 가소로운 동일성 속에 끈질기게 머물러 있고, 즉, 이제는 현재의 모습일 뿐이고,
말은 채울 내용도 닮음도 없이 이리저리 옮겨 가고, 더 이상 사물을 나타내지 않으며,
먼지에 닾인 책의 지면들 사이에 잠들어 있다.'
사실 나는 푸코의 여러 저작들 중에서 제목이 <말과 사물>인 이 책을 골랐는데
이유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혹은 사물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라는 호기심이 일어서였다.
대부분 책 제목이 내용의 반은 말해 주기 때문이다.
첫 장에서 푸코는 17세기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을 분석한다.
재기발랄하고 박학다식하고 안목이 깊고 넓은 미술 평론가의 그림평을 읽는 것 같았다.
여기서 푸코는 그림을 통해 세상을 보는 방법을 언어를 통해 재현해준다.
푸코의 그림 분석은 날카롭고 섬세하고 지적이고 아름답고 깊이가 있었다.
"이미지는 액자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파체로의 경구를 인용해
보이는 이미지를 통해 그림 너머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펼쳐 언어로써 보여준다.
그리하여 시녀들과 공주와 화가와 빛과 어둠과 거울을 통해,
그림 속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림의 중심인 왕의 자리를 보여준다.
존재하긴 하지만 보이지 않아 허구적으로 느껴지는 왕의 자리가 재현의 의미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서양 학문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가 주인공이면서 여타의 사물과 사실들을 통해 존재했고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연구한 것은 근대 이후라고 한다.
푸코는 16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서양사를 펼쳐 보이고 있는데,
푸코가 이 책에서 세밀하게 연구하는 대상은 언어와 자연과 경제이다.
언어의 본질적인 기능을 분석하고 언어가 말과 문자의 관계에서 어떻게 문자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따져 본다.
일반 문법과 동사의 이론과 에트르 동사의 쓰임 등은 나에게는 좀 난해했다.
분류하기 장에서 푸코는 자연사를 구조적으로 분석한다.
라마르크나 퀴비에를 예를 들며 그들의 이론을 설명하기도 한다.
교환하기 장에서 푸코는 화폐와 물가의 관계,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를 다루며
사물의 가치를 설명한다.
경제적 개념을 이리도 명쾌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푸코는 자연사가 생물학으로, 부의 분석이 경제학으로, 언어에 관한 성찰이 문헌학으로 바뀌는
역사적 고찰을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지식의 대상인 동시에 인식의 주체라는 모순적 입장을 띠고 출현하게 되는데
인간은 왕에게 속하는 자리에서, 노예화된 군주, 주시 당하는 구경꾼으로 나타난다,고 정의한다.
참으로 절묘하고도 아름다운 정의가 아닐 수 없다.
인문과학을 정의한 푸코의 언어 또한 명쾌한 아름다움이 있다.
"인문과학은 살아가고 말하고 생산하는 범위내에서의 인간을 겨냥한다.
인문과학은 인간은 무엇인가에서부터 실증적으로 (살아가고 말하고 일하는 존재로서) 생명이란,
노동의 본질과 법칙은, 어떤 방식으로 말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확장되는 분석이다."
그리하여 생명을 가지고 말하고 노동하는 인간은 인문과학의 대상이자 주체이다.
하지만 푸코의 철학은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다.
결론 부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유의 고고학이 분명히 보여 주듯이 인간은 최근의 시대에 발견된 형상이다.
그리고 아마 종말이 가까운 발견물일 것이다."
우주의 역사를 놓고 보았을 때 인류의 역사는 미미하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도 언젠가는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은, 살아가고 말하는 한 인간은,
사물을 사유하였듯이 자기 자신을 사유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푸코의 <말과 사유>를 통해 느낀 점이다.
느끼고 있는 한 인간인 나는,쓰고 있는 한 인간인 나는,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펑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살아가겠지만
혹여 아주 가끔씩은 넓은 우주의 별들을 향해서 눈인사 쯤은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