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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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의 부재를 틈타 내 자리를 차지했다.'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가 16세기 프랑스 아르티가에서 일어났다. 그 후 400년 동안 이 이야기는 많은 곳에서 되풀이되었고, 다니엘 비뉴 감독의 <마틴 기어의 귀향>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급기야는 영화작업에 참가한 역사학자 나탈리 데이비스가 영화에서 담아내지 못한 혹은 잘못 전달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역사가의 입장에서 '역사적'으로 이해하여<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펴냈다. 흔히 역사물이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제작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과정이 전도된 이 케이스는 상당히 특별하다 할 수 있다.

나탈리 데이비스가 <마르탱 게르의 귀향>에서 하려고 한 이야기는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마르탱 게르의 가출(?!)이나 가짜 마르탱 게르가 돌아온 후의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 등은 모두 지역적 환경과 역사적 배경에 따라 각기 다르게 형성된 집안과 개인의 정체성에 따른 갈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데이비스는 자연환경 사회적 배경, 종교문제, 경제·산업기반의 변화, 외국과의 분쟁 등에 의해 지역과 개인의 정체성이 형성되고 그것이 개인의 삶에, 역사의 전체 흐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역사읽기의 중요한 한 방법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중에서도 나탈리 데이비스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베르트랑드의 정체성이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여성도 정체성이 있었는?' <마르탱 게르>을 보면 그 대답은 긍정적이다. 베르트랑드는 롤스라는 집안, 아르티가에서 상당히 유력한 가문의 딸이다. 그녀의 행적을 볼 때 그녀는 상당히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일종의 상인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그녀 역시 자신의 친정과는 사뭇 다른 게르 집안의 전통을 감지했을 것이고 거기에 적응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녀는 마르탱처럼 떠날 수 없었고 적응해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가짜 마르탱의 등장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성향을 펼칠 수 있는 호기였고 다행히 가짜 마르탱 역시 그녀와 유사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사실 데이비스는 가짜 마르탱 게르가 마을에 적응하고 (진짜 게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재판에서도 유리한 입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베르트랑드의 적극적인 계획과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며 서술하고 있다. 데이비스는 이러한 베르트랑드를 통해 16세기 프랑스에서도 여성의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교과서적인 역사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한 개인의 사건을 통해서, 구체적인 사실로부터 역사를 복원해 나가는 이러한 시도는 다양한 역사읽기라는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이고 역사에 재미를 부여해 준다. 또 영화에서 시작한 연구작업은 영화가 역사의 텍스트가 될 수 있느냐에 대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에 대한 해답은 독자 여러분이 각자 고민해 봐야할 문제...

참! 다니엘 비뉴 감독의 <마틴 기어의 귀향>(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지루할 수도 있긴 하다는 단점은 있다)을 함께 보고 책과 영화가 같은 사건을 어떻게 다르게 해석했는가를 찾아보는 것도 이 책을 보다 재밌게, 그리고 다양하게 생각하며 볼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일 것이다. 단, <마틴 기어의 귀향>을 18세기 미국버전으로 리메이크한 헐리우드 영화 <서머스 비>는 원작의 의미, 즉 역사적 사실과는 거의 무관하고 실망스러우니만큼 까대면서 볼 사람이 아니라면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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