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당시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끔찍한 광경 앞에서 엄청난 공포와 고통, 분노와 증오 때문에 가슴이 죄이고 찢어져 정신이 마비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복잡한 감정이 일지 않는다. 지금은 단지 슬픔, 거대한 슬픔, 살아남은 자의 슬픔, 전쟁의 슬픔만이 영혼을 뒤덮고 있다. - P265
유해 발굴을 떠났던 그해에 끼엔은 잊혀 간 흔적을 찾아 울창한 밀림 속을순례했다. 호아를 떠올리며 악어 호수를 다녔고, 그의 정찰 소대 전우들을 생각하며 고이 혼을 다녔다. 바로 그때부터 전쟁을 슬픔의 빛깔로 받아들이는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걸음마다, 날마다, 사건마다 차분하고 침울하게 그의 가슴속에 되살아났다. 슬픔의 빛으로 과거를 비추었다. 그것은 각성의 빛이었고, 그를 구원하는빛이었다. 회상 속에, 그리고 결코 나아지지 않는 전쟁의 슬픔 속에 깊이 몸을 담그는 것만이 일생의 천직과 더불어 그의 삶을 존재하게 했다. 희생자들을 위한 글쟁이로, 과거를 돌아보고 앞을 얘기하는, 지나간 세월이 낳은 미래의 예언자로 살게 했다. - P266
그리고 이것 역시 놓쳐 버린 운이었다. 고상하고 완벽하게 아름다운 정신으로 살아가는 운, 천부적인 문화적 소양을 즐기며 살아가는 운, 인품의 가치를 누리는 운, 그런 것들을 충족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만났을 때, 끼엔은 재회의 행복한 나날을 보내면서 프엉을 즐겁게 해 주려고 그녀가 출연하는 공연을 보러 극장에 몇 번 간 적이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수치심의 한계를 감내해야 했다. - P277
나는 점점 내 나름의 방식대로 작품을 읽게 되었다. 이 산더미 같은 원고를읽는 단순한 방법은 순서와 상관없이 놓여 있는 대로 한 장씩 읽는 것이다. 그것은 우연의 연속이다. 놓여 있는 것이 원고든, 편지든, 수첩에서 찢어 놓은 메모든, 일기든, 글의 초안이든,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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