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 끝도 없는 전쟁을 위해 뿌려지는 씨앗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전쟁의 벌레, 일개미와 같은 운명에 순응하며 그저 평화롭고 조용하게살고 싶었고 또 그렇게 죽고 싶었다. 그는 병사의 대오에서 살다가 기꺼이 병사로서 죽을 수도 있었다. 어질고 무던하게 살아온 바로 이 순박하고 온순한농민 의병들이야말로 어느 전장에서나 무적의 힘을 발휘했으며, 결코 전쟁옹호자들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그 모든 전쟁의 참화를 묵묵히 견뎌 냈다. - P31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아. 하지만 이런 식으로 끝도 없이 싸우고 죽이고 하다보면 인간성마저 잃게될 거야. 요즘 밤마다 죽는 꿈을 꿔. 사체에서 빠져나온 나는 흡혈귀가 되어사람들의 피를 빨아 먹으러 다니지. 형, - P34
삽질을 하다 보면 묘혈의 바닥이 드러나고 그곳을 가득 덮고 있던 죽은 자의 마지막 숨결이 끼엔을 파고들었다. 달이 가고 해가 갈수록 끼엔의 가슴속에는 그 죽음의 기운들이 켜켜이 쌓이고 그의 잠재의식 속으로 스며들어 영혼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친근한 혼령들은 오래도록 끼엔의 기억속을 떠다녔으며 그의 삶은 아무도 모르는 전쟁의 슬픔에 질질 끌려 다녔다. - P40
꿈은 끼엔의 영혼을 흔들어 깨웠다. 끼엔에게도 한때는 젊은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지만 마음과 외양, 끼엔이라는 인간 자체가 아직 전쟁의 폭력과 야만에 훼손되기 전의 시절, 욕망과 도취와 열정으로 가슴에 거품이 가득 일던 시절, 어리석을 만큼 무모했던 시절이었다. 사랑의 고통으로, 질투와 회한으로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던, 지금의 저들처럼 사랑스럽시절이 그에게도 있었다. 아아! 전쟁이란 집도 없고 출구도 없이 가련하게 떠도는 거대한 표류의 세계이며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는, 인간에게 가장끔찍한 단절과 무감각을 강요하는 비탄의 세계인 것이다. 끼에게는 자기의 영혼이 황폐해지는 것을 막을 기회가 없었다면 그의 젊은 부대원들만큼은 반드시 일상의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 아직 남아 있는 사랑의 마지막 한방울이라도 누려야 했다. 내일이면 모두 사라져 버릴 것들이니. - P47
"어쨌든 평화가 왔잖아. 평화의 시간이란 전쟁으로 죽은 자들이 모두 부활하는 시간 아니겠어?" "흥, 평화? 빌어먹을. 평화라는 것도 그저 우리 형제들의 피와 살을 먹고자란 나무일 뿐이지. 이렇게 한 줌의 뼈만 남겨 두고 말이야. 그런데, 저기 누워서 숲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자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살았어야 할 사람들 아니냐고." "무슨 말을 그리 끔찍하게 해. 좋은 사람들도 아직 많아. 그리고 좋은사람들은 다음 세대에도 계속 태어날 거야. 살아남은 사람들은 정말 사는 것처럼제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할 테고. 그렇지 않다면 전쟁이 다 무슨 소용이고 평화는 또 무슨 소용이겠어?" - P60
평화라.... 흠, 내가 보기엔 예전에 사람들이 쓰고 있던 가면이 몽땅 벗겨진 것뿐이야. 이제 그 추악한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지. 피를 얼마나 많이뿌렸는데.." "젠장. 선, 왜 그렇게 이상한 말을 하는 거야?"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당신 같은 군인들도 깨져 버린 꿈을 안고 괴로워하며 살고 있잖아. 게다가 우리 시대는 이미 다 끝났어. 솔직히 말하자면, 이영광스런 승리 이후에도 끼엔, 당신과 같은 병사들은 이제 다시는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인간의 목소리까지도. 빌어먹을, 우리가 다시 정상적으로 이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가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 P61
나는 또한 내 시대를 비추던 별빛마저 영원히 꺼져 버렸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지나간 시대의 영광은 그것이 제아무리 절정이었다 할지라도 일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전쟁 직후의 눈부신 후광도 저마다의 숙명 속으로 빠르게 묻혀 갔다. 죽은 자들은 어차피 죽은 목숨일 뿐이고 살아남은 자들은 어찌 되었든 계속 살아갈 터이다. 그러나한때 시대를 관통했던 궁극적 목적이면서 한때 우리의 역사와 사명, 우리 세대의 운명을 비추던 불타는 갈망은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상상했던 것처럼항전의 승리와 함께 곧바로 현실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도 여기 이 순간까지도 우리 주변의 실체들을 돌아보면 전후 복구 시대의 그 거칠고 비천한삶과 무엇이 달라졌는가? - P67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면 예정했던 모든 것이 제멋대로 나아가거나 어지러이 뒤엉켜 끼엔이 원했던 수순이나 맥락들이허사가 되어 버리곤 했다. 초안을 다시 훑어볼 때면 그는 자신이 앞 장에서방금 규정했던 것이 바로 다음 장에서 부정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하기도했다. 또한 그의 인물들은 서로 모순되기 일쑤였다. 매달리면 매달릴수록그는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문제들로부터 더욱 빠르게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 P68
그는 마치 버리기 위해서 쓰고 있는 듯했다. 헛되이 애쓰며 고민하는 데 대한 안타까움 쓰라림, 천벌과 같은 병적 완벽주의의 응보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영원토록 발목이 잡혀 있을 것 같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 속에서긋고, 지우고, 긋고, 지우고, 또 찢고, 모두 찢어 버리고, 그러고는 다시 심혈을 기울여 썼다. 처음 글을 배우는 사람처럼 그는 한자 한자 간신히 문장을이어 갔다. …… 그는 홀로 자신의 감정들과 함께 살면서, 정신노동을 멈추않았다. 그러면서 눈에 띄게 늙어 갔다. 아마도 자기 자신에 대한 기괴한믿음이 숱한 실패를 견디게 하고, 예술 창작 과정에서 얻게 될 성과를 위해영감을 유지하고 키워나가게 한 듯했다. - P69
돌이 속에 더욱 깊이 빠져 들었다. 소설의 첫 장부터 그는 전통적인 줄거리를틀어쥐지 못했고, 합리성은커녕 제멋대로 엉클어진 시간과 공간 설정, 뒤죽박죽인 구성에다 각 인물들의 삶과 운명도 즉흥에 내맡겨졌다. 각 장마다 끼엔은 자기 기분이 내키는 대로 전쟁을 그렸다. 그리하여 그것은 이제껏 듣도보도 못한 전쟁이 되어 버렸고, 자기 혼자만의 전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그렇게 반미치광이가 되어 끼엔은 자기 인생의 전쟁 속으로 뛰어들어 다시싸웠다. 외롭게, 비현실적으로, 처절하게,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숱한 장애와오류에 맞닥뜨리며. - P70
의 앞날은 아직도 창창한데∙∙∙∙ 어서 가세요. 그리고 잘사세요...." 그렇다. 이 절박함으로 전쟁에 대해 써야 한다. 사랑에 대해, 슬픔에 대해쓰는 것처럼 사람들의 가슴과 영혼을 요동치게 하는 것은 없다고, 그 시대의삶속으로, 그 감정의 전류 속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려면 단지 과거를 전달하는 수밖에 없다고 끼엔은 생각했다. 전쟁이란 본디 그런 것이 아닐지라도.... 전쟁....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전쟁이라는 주제를 선택했고, 왜 반드시 그것이어야만하는걸까? 전쟁 당시 그의 삶은,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의 삶은 실로 참혹했고, 심지어 그것은 삶이라 말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으며, 그 삶 속에서 예술적인 색채란 찾아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 P77
그러나 그것은 먼 과거의 부활이었다. 날마다 더 멀리 되돌아갈것이며, 그 긴 과거의 재현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는 새로운 인생을 찾은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전쟁의 슬픔 속에 사라져간 자신의 청춘, 이미 지나가버린 자신의 삶이었다. - P113
처에 흩어져 있는 병사들의 무덤을 잇는 머나먼 길이었다. 이미 죽은 자들을불러 모으는 과정이 소설 속 페이지마다의 삶을 형성했다. 소설의 분위기는사람을 죽거나 병들게 하는 기운이 감돌고 귀신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캄캄한 밀림 같은 것이었다. 삭아 바스러진 뼛조각들과 유품을 건져 올린 곳도 여기 이 밀림이었다. 또한 그 밀림의 어둠 속에서 병사들의 삶에 대한 무수한신화와 전설이 잉태되었다. 바로 그 병사들이 시적 영감을 끌어내고, 줄거리를 만들어 냈으며, 끼엔에게 문체와 문장의 운율, 글자 한자 한자의 리듬을주었다. 우선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서 끼엔처럼 승리의 날까지 살아남은 병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시작부터 그들은 전쟁의 끔찍한 상황 속에서 흔적도없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결연하게 행동했다. 한 번뿐인 인생이 결코 비참하게 끝나지 않도록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그들은 늘 죽음을 마주하고 내몰렸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바로 코앞에서 엉망진창으로 온몸이 부서졌다. 그들은 하나씩, 또는 한꺼번에 총에 맞아 그 자리에 쓰러져 죽거나 부상을 당해피를 쏟으며 서서히 죽어 갔다. 그 밖에 또 수많은 종류의 고통, 영혼을 파멸시키고 인간성을 발가벗기는 악몽에 대해서는 일일이 말하지도 않았다. - P116
‘끼엔의’ 죽음은 다양했고, 매우 풍부한 형태와 색채를 띠었으며, 산사람보다 더 생동감이 있었다. 그는 이제 땅속에 살지 않고, 꿈속에서 소리 높여 삶과 죽음에 대해, 죽음의 순간에 대해, 심지어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병사와도 같았다. - P117
병사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전쟁의 슬픔은 사랑의 슬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드넓은 강 위로 석양이 질 때의 우울함과도 같은 무엇이다. 그것은 슬픔이고, 그리움이고, 부드러운 고통이라서, 사람들을 과거의 시간 속으로 날아가게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전쟁의 슬픔이 구체적인 어떤 시점, 어떤 사건, 어떤 사람에 머물러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특정한 시점에 머무르는 순간,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가슴을 찢는 고통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는 일은 더욱 그럴 것이다. - P122
군인과 민간인의 물결이 이어지고, 행복과 환희의 열기가 후끈후끈달아올랐다. 그럴 때면 끼엔은 왠지 질시 섞인 슬픔이 솟는 것을 느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잊을 수 없는 승리의 광경을 직접 체험했음에도 왜 끼엔과 동료들은 그들처럼 눈부시게, 날아갈 듯, 훨훨 타오르듯 환호하며 행복해하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빨리도 숨이 막혀 왔던 것일까? 어쩌면 그 전쟁의 참호에서 미처 발을 빼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 P141
끼엔의 소설에서 전쟁은 총성이 멎었어도 끝날 줄을 몰랐다. 그의 인물들은 살아 있든 죽었든 이 세상에 실재한다고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계속 살아갔다. 그의 소설은 묻어 두었거나 시대를다했거나 주인을 잃었던 감정들의 은신처였다. "이건 분명 반쯤 미친 사람의 문장이에요. 저승사자나 쓸 법한 거라고요!" - P142
아직도 그리고 영원히. 그의 인생에는 딱 두 번의 사랑밖에 없었다. 한 번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그와 프엉의 사랑. 또 하나는 전쟁 이후의 다른 사랑 역시 그와 그녀의 사랑이었다. - P195
글을 써야 한다! 잊기 위해 쓰고 기억하기 위해 써야 한다. 의지하고 구원•받기 위해, 견디기 위해, 믿음을 간직하기 위해, 살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 매일같이 거리를 지나다니는 낯선 무리가 우연히 서로의 인생에 증인이듯이 친한 사람들에 대해 글을 써야 할 필요가 있다. 삶과 영혼 속에서 서로다른 세상과 상반된 것들에 대해 써야 하고, 태어나 자란 집들과 보금자리와도시에 대해 써야 한다. 비 내리는 어두운 밤, 길모퉁이 가로등을 지나고 지붕들 아래를 걷는 사람들의 삶 속에 얼마나 많은 운명과 역경이 있는지 알고있기에 이에 대해 써야 한다. 기나긴 밤거리의 고요 속을 걷는 발소리는 침묵의 울림이자 생각의 발소리처럼 들린다. 번쩍이는 방수천을 덮은 시클로" 한대가 소리 없이 지나갔다. 교통경찰초소 앞에서 한 쌍의 연인이 포옹하고있다. 길모퉁이에서 희미하게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하고 어두웠던 거리에 갑자기 전기가 들어오면서 바람이 불어오듯 차례차례 전등이 켜졌다. 메마른 소리를 내며 나뭇잎이 떨어졌다. 비에 젖은 낙엽이었지만 인도 위 여기저기를 횡횡 날아다녔다. 끼엔은 위대한 음악의 침묵 속을 걷고 있는 듯이느껴졌다. 동네의 어두운 밤거리를 거닐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분명하게 느끼게 되었다. 삶을 재촉하며 살았다. 기억해 내려고 안달복달하지 않고 기억도 없고 희망도 없는 서민들의 삶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다. 글을 써야 한다. 글을 써야 한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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