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밭 엽기전
백민석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엽기적인 만행!'
나이 지긋한 분이시라면 판문점 도끼만행을 생각하시겠지만 소위 N세대라 불리는 젊은이들은 킥킥킥 웃을겁니다. 딴지일보의 허무맹랑한 기사를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죠.

'엽기'의 사전적 의미는 '기이한 것을 좇는다'입니다. 이제껏 엽기는 극악무도하고 천인공로할 범죄를 묘사할 때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던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상치 못할 황당한 경우을 표현하는 단어로 둔갑해 버려 유머와 위트가 담긴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그놈의 엽기적인 딴지일보 때문에...)

그렇다면 왜 엽기적인 것을 좋아하는 걸까요? 엽기의 쾌감은 바로 엉뚱하다는 데 있습니다. 표현이야 잔인하거나 추잡하거나 혹은 지저분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생각지 못한 기발한 상상력에서 시작되었으니까요.

진부한 특수효과로 똘똘 뭉친 블록버스터형 영화(대표적인 졸작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보다 존 카펜터, 조지 로메로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바로 엽기의 참맛을 알고 계시는 분이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제목부터 아예 '목화밭 엽기전'이라 붙인 백민석의 신작소설은 어떨까요?
한마디로 농담이 아닌 진짜 하드코어 엽기소설이라 불릴만한 작품입니다. 수컷의 야성을 가진 주인공, 조울증에 시달리는 아내, 팻숍을 운영하며 극단적인 관음증을 추구하는 삼촌 그리고 삼촌의 성욕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주인공으로부터 사냥되어 죽임을 당하는 수많은 인간 '거름'들...

특별한 교훈이나 감동 없이도 이 작품을 끝까지 끌어나가는 원동력은 잔인한 상상력입니다. 작가도 인터뷰에서 '자신이 쓴 다섯개의 작품 중 가장 자전적인 요소가 없는 소설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당연하겠죠). 한 마디로 욕망에 굶주린 수컷의 강렬한 냄새와 피비린내로 '갈 때까지 가 본' 작품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을 교훈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치적, 현실 비판적인 의미를 찾아내려 하신다면 좀 곤란합니다. '데드 얼라이브'같이 그저 스플래터 공포영화 한편 본다 생각하시고 잔인한 상상력과 엽기적인 장면 자체를 즐기시면 됩니다. 만약 이 작품에서 의미와 교훈을 먼저 찾으시려고 한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소설읽기를 하고 계신겁니다.

그래도 뭔가 남는 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한 말씀.

왜 신문과 뉴스에서 살인과 범죄기사를 즐겨 다루는지, 엉성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경찰청 사람들'이 인기가 계속되었는지 생각해 보시죠. 사건 전말의 엽기적인 면을 찬찬히 만끽한 뒤 그에 대한 도덕적인 자책감은 범죄자에게 내려지는 무거운 처벌로 가볍게 털어버리는 건 아닌지 말이죠. 범죄가 사회적인 처벌(이것은 필요조건입니다)과 맞물려 현대사회의 주요한 엔터테인먼트의 하나가 되었다는 게 교훈이라면 교훈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목화밭 엽기전'도 어떤 면에선 교훈적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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