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7일 전쟁 카르페디엠 27
소다 오사무 지음, 고향옥 옮김 / 양철북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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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태껏 가출 한 번 해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다른 짓은 뒤늦게나마 시도할 수 있지만 가출은 십대에 해야 제격인데 말이다. 물론 성인도 가출할 수 있지만, 자칫 훌쩍 홀로 떠난 여행으로 비쳐 상황의 심각성을 부각시키기 곤란하다. 또한 적당한 구실을 마련하기도 버겁다. 십대라면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라던가, 학습 중심의 교육제도 불만,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그도 아니면 물결치는 자유에 대한 무조건적인 갈망! 무엇을 갖다 붙여도 그럴싸한 구실이 되어 자기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십대 가출은 부모 속을 제대로 썩이긴 하지만 더러 서로의 가치 추구에 대해 깊이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보다 커다란 세상으로 내딛는 힘찬 발걸음을 선물하므로 결코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문제다.




  여기, 떼거리로 가출한 소년들이 있다. 아니, 대놓고 어른들에게 전쟁을 선포한 소년들의 이야기가 있다. 사반세기 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소다 오사무 소설 <우리들의 7일 전쟁>은 자의식이 형성되어가는 열네 살의 통쾌한 질주를 그리고 있다.




  해방구. 스물두 명의 자의식이 똘똘 뭉친 빈 공장은 십수 년 전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전공투 세대가 공권력과 대치하며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던 성역의 이름으로 거듭난다. 한때 똑같은 품질과 규격의 제품을 수없이 생산하다 중단된 공간은 저마다의 독특한 색깔을 지닌 소년들을 잉태한, 거대한 자궁으로 변모한다. 각자의 색감을 들고 태어났으나 사회에서 유용하면서도 순응하는 인간으로 제조하는 교육 시스템의 컨베이어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아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해방구는 그들을 품는 아늑한 자궁이 되어준다. 다시금 태어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각자의 색감을 되찾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상의 때가 켜켜이 쌓인 어른들이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순 없는 노릇. 부모, 선생님 말 잘 들으며 공부나 하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 뭐? 해방구? 당장 내려와! 허나 속마음과 달리 한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설득한다. 사회생활의 이력만큼이나 놀라운 카멜레온 색깔 바꾸기 재주. 돌덩이를 숨겨놓은 카스텔라를 내밀지만 내동댕이친다. 어쭈! 한번 해보겠다고? 폭력성이 꿈틀, 고개 들었지만 가까스로 인자한 교사상을 연출한다. 성적이 떨어지거나 고교 진학에 문제가 될까 저어한 엄마들의 회유도 통하지 않는다. 과보호로 아들을 나약하게 만든 엄마도 아들을 더 이상 길들일 수 없다. 버려진 공장은 약간의 작업으로 요새로써 모자람이 없었고, 자기네들의 의지를 지키는 소년들은 요새를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손색없기 때문.




“잘 안 되는 이유는 아이들을 인격체로 대하기 때문이야. 우리가 보통 동물을 어떻게 길들이지? 개나 말을 조련하듯이 채찍으로 길들이면 반드시 잘돼가게 되어 있어. 이게 비법이야. 자네들도 머릿속에 잘 넣어두게.” (P.  222)




  존중받지 말아야 할 마땅한 인간이 있을까. 모든 인간은 존엄성을 가진다. 성숙하지 않은 만큼 덜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은 같은 크기다. 허나 안타깝게도 태반의 교육자들은 피교육자들의 그것과 자기의 그것을 같은 무게로 쟤지 않는다. 성장과 배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는다. 한 학급 남아들의 집단행동은 사상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일종의 생존본능이었다. 존재감을 느끼기 위한 시도였다.




“부패한 사람이니까 이용할 수 있는 거 아냐. 부패하지 않는 사람치고 바보 아닌 놈 없고, 그런 놈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P. 273)




  개인의 안위보다 나라의 충성이 먼저인 군국주의 잔재가 개인의 인간다운 생활보다 체제 유지가 급선무인 사회를 지탱하고 있나? 군군국주의 교육의 희생자이기도 한 교장이 군가를 부르며 해방구에 재차 방문하는 광경을 보면 측은하면서도 무섭다. 시간이 흘러도 쉽게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려는 체제의 속성, 그 속성을 유지케 하는 부패, 부패에서 실속을 챙기려는 교장 같은 사람. 과연 아이들은 해방구를 지킬 수 있을까. 무사히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한데 대체 어떤 어른이 좋은 어른이지?




“어떤 게 좋은 어른인데요?”

“잘난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지.” (P. 73)




  부모나 선생의 리모컨 조작대로 움직이는 아이라면 잘난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겠지. 그렇게 어른이 된 아이는 다음 세대 아이를 품질 검사 완료한 상품처럼 포장하려 들겠지. 몰개성을 재빨리 습득하면 안전하다고 판단내리겠지. 인간의 다양성을 속박하는 사회 장치에 저항하는 것은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하겠지. 흐르지 않는 물은 악취를 풍긴다는 것을 망각한 체하며.




“져도 좋잖아. 하고 싶은 걸 할 수만 있다면.” (P. 29)




  합리화라는 그럴싸한 허울을 뒤집어 쓴 사회와 그 사회를 떠받고 있는 기성세대에 경종을 울린 애송이들의 반란은, 실은 결연한 의지보다는 캠프의 흥겨움에 가깝다. 그렇지만 늘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가 아님을, 중학교 1학년도 충분히 세상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음을 7일 동안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규격화된 틀로 붕어빵 굽듯 아이들을 대했던, 적당히 눈 감으며 안온을 추구하던 어른들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속수무책이다. 알고 보면 세상에는 승부가 필요치 않은 경우도 꽤 있다. 진다고 해도 속상하지 않는 이들과의 맞붙음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다음에 우리가 모두 없어져도 별은 저렇게 빛날 거야.” (P. 51)




   아이들이 빠져나간 해방구를 침입한 어른들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허둥대는 것도 잠시, 온갖 망상을 끄집어내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 이를 때, 어쩌면 그들은 하멜른의 어른처럼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했을 터. 섣부른 반항에 지나지 않다고 여긴 사건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 빛이 수백 광년 떨어진 곳까지 전달되어 그곳에서도 여전히 빛나길.




  프랑스 68혁명을 짐작케 하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몽상가들>의 잔상에 이어, 프랑스의 68혁명 열기가 일본 열도를 달굴 무렵 고등학생이었던 무라카미 류가 자기의 과거를 회상하며 쓴 소설 <69>를 원작으로 제작한 동명의 영화의 잔상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따라다녔다. 각기 다른 인간이 지닌 색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세력에 대항하는 길은 오직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69> P. 242)’임을 해방구 아이들은 몸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멋들어지게 해방구 문구를 쓴 아키모토는 다 부족하지만 미술 과목만은 우수하다. 체육엔 별다른 자질이 보이지 없으나 전자 기계에 남다른 눈이 있는 사토루, 레슬링에 빠져 살다보니 레슬링 중계에 탁월한 재치가 돋보이는 아마노 등 아이들마다 각기 다른 다양한 색감을 지니고 있다. 자기 색을 적확히 찾으면 아이들은 질리언 린처럼 비상할 수 있다. 어렸을 땐 주의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학습장애아 취급을 받았으나 춤에 남다른 관심이 있음을 발견해 준 한 사람 덕분에 뮤지컬 <캣츠>, <오페라의 유령>의 안무가로 활동한 발레리나 질리언의 푸에테(한 다리 발끝으로 몸을 지탱하고 다른 다리로 휘젓듯 32회전하는 여성 무용수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테크닉)를 그려본다.




  <우리들의 7일 전쟁>은 자의식을 형성해가는 사춘기 소년들의 각각의 고유색을 지키기 위한 유쾌한 몸부림이다. 어른 또한 ‘다름’을 인정받고 싶은 성장기를 다 거쳤을 텐데, 그런 적 전혀 없었다는 듯 시치미 떼는 꼴이 역겨워 강력한 펀치를 날린다. 분명한 주제의식이 자연스레 서사에 녹아들어 전혀 지루하지 않다. 깔깔대며 마지막 장을 덮으면 먹장구름처럼 밀려오는 우리의 현실은 독자로 하여금 씁쓸함을 감출 수 없게 만드는데, 이는 이 소설이 지닌 가벼움 속의 감춰진 묵직함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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