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말이다. 사전에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 혹은 그 기간‘이라는 특별하지 않은 뜻 말고도 ‘어떤 사람과 그의 삶 모두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특별한 뜻이 적혀 있다. 이런 예문과 함께. "인생이 불쌍해서 살려준다."인생은 ‘살려줘야 할 정도로‘ 불쌍한 것이다. 왜 그런가. 체호프는 입센의 작품을 보며 ‘인생은 저렇지 않아‘라고 잘라말한 적이 있다. 입센의 세계는 아무리 복잡한 비밀도 결국은 풀리면서 끝나는 그런 의미에서 너무 ‘문학적인‘ 세계라는 것. 체호프는 다르다, 라고 비평가 제임스 우드는 말한다. 체호프는 수수께끼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수수께끼로 끝낸다고. 인생의 질문들 앞에서 ‘난 모른다‘라고 중얼거릴 따름이라고. 그러니까 인생은 이해할 수 없어서 불쌍한 것이다. 문제를 푸는사람 자신이 문제의 구성 성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 수가 없는데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풀어야 하니까 더 불쌍한 것이다. 체호프가 러시아어로 ‘아, 인생이여‘라고 할 때 우리는 한국어로 ‘아이고,인생아‘라고 한다. 불쌍해서,죽일수도 없을만큼 불쌍해서. - P7
이제 네 이야기를 너에게 할게. 그러니까 네가 태어났을 때 내가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경고했다는 이야기. 조심하라고, 네가 나를 필요하다 느끼는 마지막날까지 나는 살아 있어야 한다고.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내가 필요하다.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에 대한 네 마음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불리건 그게 내가 너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다를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으로 45년을 살았고 누군가의 아버지로 아홉 달을 살았을 뿐이지만, 그 아홉 달 만에 둘의 차이를 깨달았다. 너로 인해 그것을 알게 됐으니, 그것으로 네가 나를 위해 할 일은 끝났다. 사랑은 내가 할 테니 너는 나를 사용하렴. 나에게는 아버지가 없었지. 그래서 내 어머니는 두 사람 몫을 하느라 죽지도 못했어. 너의 할머니처럼, 나는 조심할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각오할 것이다. 빗방울조차도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죽지 않을게. 죽어도 죽지 않을게. - P26
슬라보예 지젝은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신의 일방적인 발언을 이렇게 냉소한다. "쩌렁쩌렁 울리는 신의 말 때문에의 침묵, 욥의 묵묵부답이 더욱 잘 들린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평결한다. "신은 정의롭지도 불의하지도않다. 다만 무능할 뿐이다." - P43
아이가 보는 세계는 경이롭다. 세계 그 자체가 본래 경이롭다기보다는 세계를 경이롭게 볼 줄 아는 아이의 눈이야말로 경이로운 것이다. 그런 아이를 보며 시인은 바로 그 문장을 적는다.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비록 깨어지기 쉬운 아름다움이지만 삶은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 훗날 아이가 자라면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에 출근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아이에게 주어진 삶은 아름답기만 해야 마땅하다는 것. - P69
천사가 껴안으면 바스러질 뿐인 우리 불완전한 인간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를 ‘살며시 어루만지는‘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자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누구도 상대방게 신이 될 수 없다. 그저 신의 빈자리가 될 수 있을 뿐. - P90
우리는 가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어떤 시와 만난다.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장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느 날 어떤 문장을 읽고 내가 기다려온 문장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 - P112
하기는 바다로 가라앉는 학생들이 방치되는장면을 함께 지켜봐놓고도 그것을 ‘교통사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산사람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이미 죽은 사람도 다른 원인으로 한번 더 죽어야 하는 고초를 겪는 곳이 우리가 사는 여기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이 아직 미처 다 죽지 못한 채 끌려다니고 있는 형국이니 그 죽음에 합당한 애도는 엄두를 내기도 어렵다. - P128
이런 말을 덧붙이자.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건 일어났다‘가 맞다." 이 말과 비슷한 충격을 안긴 것이 히라노게이치로의 다음 말이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것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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