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가 보여주는 조화로운 세계 - 수학 이야기 지식전람회 12
이광연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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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에 대해 듣는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이다. 언제 배웠는지는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언제부턴가 기본적인 상식이 되어버린 피타고라스의 정리.......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속에는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뇌리에 너무나도 강하게 박혀있어서 피타고라스의 다른 면모는 묻혀버린것 같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자이기도 했지만 그리스사람들에게 그는 신적인 존재였다. 피타고라스와 관련된 신화들도 많고 심지어 피타고라스가 아폴론의 자식이라는 이야기까지 있다. 피타고라스가 단순히 수학자이기만 했다면 들을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들이다. 도데체 피타고라스는 어떤 인물이었던 것일까?

피타고라스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만능 지식인이었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을 기본으로 인문, 사회분야는 물론 철학적인 면까지도 두루 갖추고 있는 지식인이었다. 다만 다른 지식인들과 다른 면이 있다면 모든 지식들을 수학으로 설명하려 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이 지식을 가지고 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요즘의 학교를 세운다. 물론 여기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 피타고라스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피타고라스의 강의를 듣고싶다고 어떤 사람이 찾아오면 처음에는 그 사람을 면접을 보았다. 왜냐하면 피타고라스는 그 사람의 언행에서 그 사람의 면모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에게는 3년동안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전제로 피타고라스추종자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피타고라스는 이런 사람들을 관찰했으며 부적절한 사람들은 추방당했다. 이 과정도 통과하고 나면 5년동안 침묵을 하고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피타고라스는 혀를 놀리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것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나면 피타고라스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만약 이 과정 도중에 중도탈락자가 발생하면 그 사람은 다시 모든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로부터 모르는 사람이 됐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친다고 해서 피타고라스의 강의를 바로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이 과정을 거치면 청강자의 자격이 주어지게 된다. 피타고라스의 대부분의 제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피타고라스는 강의를 야외에서 했는데 이때 아무나 자신의 강의를 들을 수 없게 하기 위해서 장막을 쳐놓고 강의를 했다. 이때 청강자들은 장막 바로 밖에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즉 청강자들은 피타고라스의 강의소리만 들을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었다. 이 과정을 잘 견디어 내면 장막안에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피타고라스공동체의 하루 일과를 보면 굉장히 놀랍다. 나는 이 일과를 보고 흡사 스님들의 생활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다같이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서 자신의 공부를 하고 피타고라스의 강의를 듣고 또 자기 혼자 공부하고 고기도 먹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이 말이다. 

피타고라스는 말을 아끼는 것을 매우 중요시 여겼다. 말이 모든 악의 원천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을 비롯해서 피타고라스가 한 말을 보면 기원전에 살던 사람이 한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오늘날에도 공감되는 이야기들이 많다. 이런 면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피타고라스가 너무 수학자로서의 면모만 부각돼서 알려진 점이 아쉽다. 피타고라스는 더 알면 알수록 신기한 양파같은 사람인데....... 그리고 여러 방면에서 박학다식한 팔색조가은 사람이기도 하고....... 

이런 피타고라스를 신적인 존재로 여겼던 그리스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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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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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라는 제목은 어찌보면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것 같고 어찌보면 더없이 평범한 제목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 제목을 두가지의 연유에서 붙였다고 한다. 한가지는 '산시로'라는 작품의 주인공에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고 또 한가지는 이 책의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 그 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산시로'라는 작품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정말 이 책은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이 막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끝이 나 있다. 하지만 나는 왠지 주인공인 다이스케의 뒷 이야기가 궁금하지가 않다. 

 다이스케는 거의 대부분의 일에 소극적이고 무기력하다. 물론 다이스케자신은 이렇게 행동하는데 다분히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이스케는 무직, 쉽게 말하자면 실업자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대단한 재력가이고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어 직업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다이스케는 탐미주의자이다. 직업을 가지는것보다 꽃, 향기, 색채등을 즐기는것에 더욱 우선순위를 두고 자신이 게으름을 피는 것을 정당화한다. 아버지와 형은 이런 다이스케를 한심하게 여긴다. 나이는 차 가는데 결혼할 생각도 없고 직업을 가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이스케는 이런 형과 아버지를 오히려 더 한심하게 여긴다. 아버지는 '성실, 근면'을 삶의 모토로 여기고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비리의 온상이다. 회사의 경영을 위해 온갖 비리들을 서슴지 않는 아버지가 다이스케의 눈에는 위선자로 보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다이스케는 아버지가 주선하는 신붓감들을 모두 거부한다. 하지만 그렇게 도덕적인것을 고귀하게 여겼던 다이스케는 결국 친구의 아내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뭔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이스케는 자신의 삶이 가장 고귀한 삶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무시하면서 살아간다. 물론 다이스케의 생각도 이해 할 수는 있지만 다이스케 자신이 살아가는데 쓰이는 모든 물질적인 부분은 모두 자신이 그렇게 무시하고 경멸하는 아버지가 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이다. 만약 정말 아버지의 비리가 나쁘다고 생각한다면 아버지가 번 돈도 쓰면 안되는게 아닐까? 그리고 다이스케가 무시하는 사람들은 다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이스케의 삶도 나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다이스케는 영원히 홀로서기를 할 수 없다. 다이스케의 삶은 이 삶을 지탱해 줄 누군가가 있을때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는 뭔가 완전하다고 할 수 없는 삶이다. 
 다이스케의 삶은 친구인 히라오카의 아내 미치요를 자신이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모순으로 치닫는다. 사실 다이스케는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당당하기 그지없다. 여느 사람들처럼 죄책감을 찾아 볼 수 없다. 이유는 히라오카가 미치요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유는 보통사람들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설사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이 그의 아내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부터는 이 전의 다이스케가 그랬던것 만큼 당당하지는 못하다. 자신도 모순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다이스케의 이후 삶이 궁금하지 않은 이유는 다이스케의 무기력한 삶의 태도때문이다. 다이스케와 미치요는 원래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었던 사이였다. 하지만 다이스케는 그 기회를 놓쳐 버렸고 너무 늦어버린 후에 와서 그 기회를 되찾으려 한다. 게다가 다이스케는 혼자 자립하지도 못하고 그럴 생각조차 없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주선한 신붓감을 거절하자 아버지가 다이스케에게 "나도 더이상 노를 돌봐주지 않을 테니까."라고 한다. 다이스케는 이 말을 듣고 아버지가 더이상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직업을 구하러 방황한다. 하지만 이 결심은 형수가 경제적으로 조금 보태줌으로써 미뤄진다.
 다이스케의 삶을 보면 무엇인가 부족하다. 삶의 열정도 부족하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힘도 부족하다. 이런 점들때문에 나는 다이스케의 '그 후'가 별로 기대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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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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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지상주의자이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허용가능해야 한다는 것이 내 입장이다. 하지만 여기에 사람들은 '그 일이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일인가?'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에 답을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리'에 관해 정확한 정의를 내려야 할 것이다. '윤리'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라 나온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는 정의도 매우 모호하다. 그래서 이 책에서 칸트는 정언명령 두가지를 제시한다. 첫번째는 '당신의 행동준칙을 보편화하라'이고 두번째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첫번째 정언명령은 모순없이 보편화할 수 있는원칙에 따라서만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들어 내가 돈을 갚을 능력이 없음에도 다른 사람에게 갚겠다는 거짓약속을 하고 빌리는 것은 모순이 생기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나도 동의 하지만 조금 다른 이유로 동의한다. 돈을 빌린다는 행동은 나의 행동이 남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동이다. 내가 남에게 돈을 안갚는다면 내가 그 사람에게 금전적으로 피해를 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내 행동이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두번째 정언명령은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이랑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기때문에 그 삶과 항상 가이 다닌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그 사람을 내 기분을 좋아지게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내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인가? 이 정언명령의 근거로 매춘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 매춘은 인간을 단순히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삼은 행동이기에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칸트는 결혼을 통한 성행위만을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럼 결혼을통한 성행위는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닌걸까? 이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결혼후에 하는 성행위는 자손번식을 위해 하는 것이라 대답한다. 그렇다면 이것도 아이를 낳는다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은 행동이 아닌가?

매춘이외에 또 문제삼는것은 장기매매이다. 자신의 몸을 이윤의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내가 중,고등학생때 여학생들 사이에서 손톱, 머리카락을 파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적이 있었다. 어짜피 잘라서 버릴것을 팔면 용돈벌이가 되므로 1석2조였기 때문이다. 이 또한 칸트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자신의 몸을 수단으로 사용하기에 비난받아 마땅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머리카락이 쓸모 없어서 잘라버리고, 어떤 사람은 머리카락이 필요해서 만든다면 쓸모없는 사람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왜 해서는 안되는 일인지 납득할 수 없다. 장기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콩팥이다. 평범한 사람은 콩팥이 한개여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신의 콩팥에 문제가 생겨서 콩팥이 한개가 더 필요하다. 그래서 필요없는 사람이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칸트는 아마도 여기에서 금전적인 거래가 오고가는 것에 불만을 표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금전적 목적에 이용된 수단이 된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파는것이 왜 그리 큰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단지 내 신체의 일부라는 이유로 내가 소유하고있는 책이나 연필과 다르게 생각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책은 여기에 문제를 제기한다. 누구나 다 공평한 시점에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콩팥을 팔아서 생기는 돈으로 명품백을 사기위해 콩팥을 팔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정말 당장 오늘먹을 끼니를 해결하기위해 콩팥을 팔 수도 있다. 이 두 경우모두 자유로운 자기의사에 맡겨도 되냐는 질문을 던진다. 물론 공평하지 않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경제적인 배경을 논외로 두더라도 타고난 재능부터 각양각색이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하는 재능을 타고 태어났고 어떤 사람은 글을 잘쓰는 재능을 타고 태어났다. 이렇게 태어날때부터 공평하지 않게 태어난 사람들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기때문에 막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판단하는 것이 공평한 판단인가?

'정의'라는 것은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 곧 사회전체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법과 질서를 바로세우고 구성원의 기회나 권리를 공평하게 보장하는 일'이다. 이런 정의를 한마디로 '무엇이다.'라고 할 순 없겠지만 내 생각에는 사회구성원들에게 최대한의 선택권을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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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 자연선택의 신비를 밝히다 주니어 클래식 1
윤소영 풀어씀 / 사계절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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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때 나는 원숭이가 점점 사람으로 진화하는 그런 이미지가 생각난다. 아마도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것이 내게 적잖은 충격이었기 때문인것 같다. 다윈이 진화론을 처음 발표했을때 그 발표를 들은 사람들도 비슷한 심정이었을것 같다. 이제까지 인간이 동물보다는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인간들의 오만을 깨버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다윈은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것 처럼 "인간은 원숭이로붜 진화했다."라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윈자신도 그 말이 불러일으킬 파장이 얼마나 클지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다윈은 다만 "모든 동식물이 모든 시간과 공간에 걸쳐 서로 유연한 관계를 맺고 있다."라고 하며 생명의 큰 나무를 그려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 나무 속에 사람도 포함된다는것을 알아차렸으리라.

종의 기원에는 진화론이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좀 더 깊게 들어가면 다윈의 핵심적인 주장인 "자연선택"이 나온다. 다윈은 처음에 인위적선택에서 아이디어를 고안해 냈다. 인위적 선택이란 말 그대로 인간들의 선택에의한 것이란 말이다. 이 예는 흔히 볼 수 있다. 야생에서크는 과일과 식용으로 사람이 재배하는 과일은 크기,맛,품질 등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사람이 크기도 크고 맛도 있고 품질도 좋은 과일들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런 품종만 교배를 하므로 그렇게 품종개량이 된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자연선택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 다윈의 주장이다. 자연에 적응하기 더 적합하게 품종개량이 된 종이 살아남아 번식에 성공하므로 이후 자손은 그와 비슷한 형질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반복되다 보면 자연에 잘 적응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간다는 것이다.

이 책은 진화론을 가급적이면 다가가기 쉽게, 그리고 이해하기도 쉽게 풀어쓰려고 노력한 책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하고. 생물전공자들보다는 좀 더 대중들이 다윈과 진화론에 다가가기 쉽게하기위해 쓰여진책이므로 이런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읽기를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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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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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이 어떤 이론을 발표할 때마다 항상 그 근거를 첨가한다. 근거는 다른 사람들이 학자의 의견을 좀 더 수월하게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근거없는 주장은 말도안되는 억지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이처럼 어떤 주장을 하는데에 근거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때 흔히 쓰는 근거는 바로 실험이다. 실험은 어떠어떠한 원인을 제공했을때 특정한 결과가 도출되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므로 그 주장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런 실험을 할 때 문제가 생긴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인간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실험을 인간 혹은 인간과 비슷한 유인원에 실시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런 실험이 인간의 호기심때문에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에 나오는 실험 중 해리할로의 '사랑의 본질에 관한 실험'이 있다. 해리할로는 사랑에 작용하는 변수를 찾기위해 원숭이들을 실험에 사용했다. 여러 원숭이들을 희생한 이 실험의 결과는 '영장류에겐 어머니의 사랑이 필요하다.' 였다. 이 실험은 결과자체도 너무나 허무하기 짝이 없지만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 수많은 원숭이들의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시켰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해리할로는 이 실험을 크게 두번에 걸쳐서 진행했다. 처음엔 새끼원숭이들을 어미원숭이로부터 떼어내어 천으로 만든 원숭이에 데려다 놓으면서 스킨십이 중요하다는 실험을 진행했다. 긔고 천으로 만든 어미가 아무리 학대해도 새끼원숭이들은 천으로 만든 어미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결론도 얻어냈다. 하지만 천으로 만든 어미 밑에서자란 새끼원숭이들은 정상적으로 자라나지 못했다. 자폐증에 시달리고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등의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이때문에 놀란 해리할로는 추가적인 실험을 진행했다. 천으로 만든 어미가 이젠 새끼원숭이들과 놀아주는 것까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해리할로는 진짜 어미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 냈다.

물론, 실험을 통해 찾아낸 결과가 미국사회의 아이양육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실험을 하는데 희생된 원숭이들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호기심, 아니 어쩌면 이기심때문에 수많은 원숭이들의 삶을 망친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대신 희생당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생각자체가 인간의 오만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반대의 의견을 가진 사람은 그래도 사람에게 실험을 진행 할 수 없지 않느냐고 되물을 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권을 무시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실험을 하는것 자체가 나는 인간의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행착오를 겪으며 알게 될 수 있는 것을 더 미리 알기 위해 실험을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리 알아 그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인간의 목숨이 중요한 만큼 원숭이와같은 영장류의 목숨도 중요한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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