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는다 1 - 아나톨리아 횡단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임수현 옮김 / 효형출판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이 참 당당합니다. ‘나는 걷는다.’ 걷는다는 행위가 나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겠지요. 조금 더 나아가서 해석해보자면 걷는다는 행위를 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걷는 것일까? 걷는다는 행위가 어떻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것은 관광과 여행이 근본적으로 어떤 다른 의미를 가지는지를 두고 생각해보면 어떤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길을 걷는다는 것에서 저자는 관광과 다른 여행의 가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나를 원래의 상태 그대로 두고 다른 것들을 구경하느냐, 아니면 무언가와 접촉해서 나를 바꿔나가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접촉과 변화를 정직하고 밀도 높게 하기 위해선 나를 가두지 말고 내가 만나는 것들을 통제하려 들지 말아야 하겠지요. 이런 원칙을 가장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여행은 ‘걷기’. 그리고 누군가를 만날 상황을 만들어주는 ‘무전’. 이것들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저자가 완전한 무전여행을 하는 것은 아니며 책의 끝에 보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차를 타게 되지만, 적어도 여행의 원칙은 나를 던져서라도 미지의 것과 접촉해 그것을 새롭게 재정의 해보고자 하는 시도라는 확신이 저자의 책 제목에도, 이후의 행보에서도 곳곳에 나타납니다. 이는 저자의 첫 기획의도가 실크로드의 길을 직접 따라가 보고자 하는 거였다는 것하고 맞아떨어집니다. 한나라의 장건이 처음 실크로드를 개척했던 것도, 그 이후에 벌어진 숱한 무역과 교역도 사실 그 출발은 이 원시적인 욕망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저자는 인류사를 다양하게 만들어왔던 이 욕망을 스스로가 온몸으로 누려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역시 예전과 완벽히 같을 수는 없습니다. 서문에서 밝히듯 서양이 동양에 진 빚을 의식하며, 동서양의 만남의 과정을 다시 밟아보고 싶다는 의도야 똑같지만, 극히 제한된 정보만으로 그 만남에 도전했던 예전의 과정은 거의 순수한 미지의 상태로 서로를 만나는 과정이었겠지만, 지금은 서로에 대한 너무 많은 정보들이 돌아다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정말로 정확한 정보인지, 내게 진실을 말해주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지요. 그래서 때로 여행이라 이름 붙여진 수많은 관광은 만남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얻는 것이 아닌 편견을 확인하는 작업에 그치는 것이 일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여행은 최대한 자신의 편견을 지워내면서 만남을 통해 자기만의 새로운 편견을 만들어내야 하는 이중의 작업을 필요로 하지요. 저자가 자신이 가진 서양인의 시선으로 동양을 재단하는 오리엔탈리즘에 빠지지 않은 상태로 이 긴 여정을 무사히 마무리 지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3부작인 이 책 중 1부작밖에 읽지 않은 상태여서요. 하지만 터키에서의 저자의 만남은 단순한 관광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다층적이고 흥미롭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이는군요.

 

저자가 겪는 만남은 3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1. 인간적 만남. 2. 역사적 만남. 3. 사회적 만남입니다. 인간적 만남에서 저자는 터키 사람들의 시골 마을에서 묵으면서 그들 간의 인간적인 교류를 체험합니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터키 사람들이 가지는 서양인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손님을 성심성의껏 맞이하려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사실 흥미로운 현상인데, 우리의 시골도 예전 시절일수록 나그네를 잘 맞이해야 한다는 풍습이 강하게 남아있지 않았었나요? 정보로부터 물리적으로 떨어지고 고립된 듯 보이는 공동체일수록 새로운 존재에 대해 배타적이기보다 개방적임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온갖 새로운 것이 서로 섞여있는 대도시에서 오히려 우리는 거래 관계로 상대방으로 파악하고 본능적인 경계를 늦추지 않는 반면 이들 터키의 시골마을에선 인간이 가지는 미지의 것에 대한 원초적인 호기심이 훨씬 스스럼없이 드러나며 이방인에 대해 여유 있는 환대의 태도를 취합니다. 이는 사회적으로 생가해볼 여지가 있는 사례들이었고, 무엇보다 저자도 그 터키 사람들도 2~3일의 짧은 만남이지만 서로를 진정한 우정을 나눈 상대처럼 대한다는 데에서 관계의 밀도와 시간 사이의 관계가 꼭 정비례나, 반비례 어느 한 쪽 만으로 결정지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꼭 그들과의 만남의 그런 쪽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종갈등이 심하며 군부대와 인접한 마을에 들어설수록 변합니다. 여기서 간첩으로 오인 받아서 신고가 들어가는데, 사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오해였지요. 이 지역은 쿠르드족과의 인종갈등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시사점을 던져주는데, 가난이 폭력에 대한 공포와 만났을 때 타자에 대한 태도는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타자를 대하는 태도는 환대도 있고 공포도 있지요. 하지만 군대가 가지는 태도는 사뭇 다르면서도 제일 무서운데, 동일화에 대한 강요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타자에 대해선 내 편 아니면 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조직이란 점이 저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나지요. 그 조직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이긴 하지만, 역시 타자를 접하기 위한 여행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역사적 만남은 실크로드의 숙소를 찾아가거나, 아무것도 없는 평원에서 당시의 전쟁을 상상하는 부분 등에서 드러나지만, 사실 이 책 전체가 기나긴 역사적 만남의 과정입니다. 실크로드를 따라서 걷는다는 것 자체가 역사 속에서 그 전 사람들이 가진 정신을 접하기 위한 시도이겠지요. 재미있는 점은 역사에 대한 만남이 실크로드처럼 유목적일 때는 보거나 관찰하는 게 아니라 이처럼 직접 길을 따라 걸으며 경험해야 한다는 것인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 맞물려서 흥미 있게 느껴졌습니다. 답사와 여행의 차이가 역사가 가진 특징의 차이 또한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회적 만남은 사실 한계를 가지고 있긴 합니다. 사회 구조에 대한 통찰이라는 것이 단순히 어떤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한 번에 얻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종의 단서가 될 수 있는 것들은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어떤 마을에서 입대하는 청년들을 위해서 대대적인 환영파티를 해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터키 쪽은 군대가 가지는 인기가 상당하다고 하더군요. 아마 쿠르드족과의 분쟁, 그리스와의 갈등, 그리고 아타튀르크라는 청년 군인의 주도로 이루어진 사회개혁의 역사가 작용하는 듯싶었지만, 사실 군인 중심의 사회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박정희 때가 떠오르더군요. 군대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그에 맞춰서 사회 개발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시아 지역 개발도상국의 들의 공통점인 것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또 그렇다고 해도 터키에서 유독 군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은 이유는 무엇인지 등이 조금 궁금했습니다. 

 

그 밖에도 가부장적인 터키인들의 태도, 마치 우리나라의 60년대를 생각나게 하는 문화재에 가해진 조잡한 시멘트 보수 등의 난개발 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만, 역시 90년대 말 터키의 가장 사회적 이슈는 쿠르드 저항군의 리더 오잘란이 체포된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검색해보니 아직도 오잘란은 처형되진 않고 감옥에 있는 상태로 조직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태라는데, 당시는 재판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잘란에 대해선 특히 민감하고 말을 조심하는 저자와 다른 사람들의 태도, 그 와중에도 선생님 같은 식자층들이 지적하는 오잘란에 대한 언론의 왜곡보도 태도 등등이 중간 중간 던져집니다. 아무래도 여행자로서 내부의 깊숙한 문제에 대해서까지 어떤 가치판단을 내리는 게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세세하게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국제적 분쟁이란 건 어딜 가나 있는 문제인 것 같더군요. 우리나라도 결코 분쟁에서 자유로운 지역은 아니니만큼, 온전한 만남이란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묻게 됩니다. 저자는 왜 걸었던 것일까요? p.203에서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홀로 외로이 걷는 여행은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만들고, 육체의 제약에서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안락하게 사고하던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순례자들은 아주 긴 도보여행을 마친 후엔 거의 예외 없이 변모된 자신의 모습을 느낀다. 이는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스스로를 직면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발견할 수 없었을 자신의 일부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혼자 걷는 것을 선호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여정에서 친구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왜 걷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저자가 명확한 가치관을 가지고 여행을 시작한 것이라 아니라, 강한 충동에 의해서 시작한 다음 왜 이런 충동이 들었을까를 찾아가는 식이기 때문에 1권을 읽은 것을 가지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왜 만남의 방식에 있어서 만나는 시간보다 홀로 있는 시간이 대부분인 걷는 방식을 택했는지에 대한 나름의 느낌은 듭니다. 만난다는 것은 먼저 자신을 만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랫동안 혼자 있을 수밖에 없는 경험은 의외로 많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방에 혼자 있다고 해서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들만을 더욱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더 좁아질 위험도 있죠. 걷는다는 것은 나를 혼자 있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통제되지 않은 자극 속에 나를 놓아두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랬을 때에야 나를 생각해볼 수 있고, 그 다음에야 진정한 남들과의 만남이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요. 이 책이 어떤 사진도 없지만 흥미로울 수 있었던 것은 저자의 책에서 중요했던 것이 경치가 아니라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며, 그 사람들의 모습이 몸의 이동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변해가는 것이 느리지만 확실한 리듬으로 제게 전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같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감각이 아닐까요. 변화가 지나치게 빠르게 다가와 이 사람과 내가 단절된 듯이 느껴지는 게 아니라 내 몸으로 변화를 천천히 느끼면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된 끈을 알아가는 것. 걷기는 그래서 세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나름의 방식일 수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게 나를 온전히 직면하는 방법일 수도 있겠네요. 그것이 아마 저자가 진정으로 함께하고 싶었던 실크로드의 정신, 그 과거의 정신이 아닐까요. 건강뿐만 아니라 이런 의미에서 걷기를 한다면 더 가치 있는 일이지 않을까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