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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ㅣ 을유세계사상고전
토머스 모어 지음, 주경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고전은 당대의 사회문제에 대한 치열한 성찰에서 온다. 그러면 그것이 건드린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과 빛나는 비전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을 주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 있다면, 아마 유토피아도 그 중 하나에 들어갈 겁니다. 사실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죠. 유토피아라는 책에는 저자가 느꼈던 당대의 사회문제, 여기에 더해서 만들어낸 자신만의 국가관, 인간관, 인생관이 종합해서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는 건 자신이 가진 모든 철학을 총집결시킬 수밖에 없는 엄청난 작업이어서 그랬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1500년대에 꿈꿨던 국가. 그것이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생각해보기 위해선 먼저 이 책이 쓰였을 당시 영국의 시대상부터 살펴봐야하겠네요.
토머스 모어가 살던 시기는 헨리 7~8세의 시기로, 이탈리아 등지에선 르네상스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고, 영국에도 그 물결이 들어와 여러 인문주의자들이 생겨나던 시기입니다. 상대적으로 교회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있었고, 왕권의 입김이 점점 강해지면서 다른 왕권들과의 충돌이 생겨나던 시기였지요. 그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과도한 군사력이 유지되고, 이를 위한 가혹한 세금 수탈이 왕의 이름으로 자행되던 시기였습니다. 더불어 경제적으로는 방직 산업이 발달하는 초기 자본주의 형태를 보이면서 대대적인 1차 엔클로저 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따른 농민의 몰락, 노동자의 도시 유입이 급속도로 진행되던 시기였죠. 바로 이 시기, 사상적으로는 교회의 부패에 저항하는 인문주의가 생겨나고,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왕권의 부작용이 부각되며, 경제적으로는 산업의 발달과 농촌의 몰락이 진행되던 혼돈의 격변기에 이 책은 씌어졌습니다. 당대의 사회를 어떤 곳으로 끌고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겠죠.
이것들은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도시민들은 의무적으로 1년씩은 교대로 농촌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어야 하며, 노동의 절대 다수는 농민들의 농사가 차지합니다. 모두는 사치를 부리지 않은 똑같은 옷을 입으며(이건 아마 엔클로저를 지켜봤기 때문에 나온 발상이겠죠?), 황금은 일부러 가장 비천한 용도에만 사용해 욕망의 제거를 유도합니다. 정치는 자치와 의회 정치의 혼합이고(지역구 국회의원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들 또한 노동을 명예로 생각하며 모두는 공동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사유재산은 일체 인정되지 않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집까지 포함해서)은 공동소유이고 이밖에 황금 같은 사치품은 전쟁이나 교역을 위해서만 따로 준비해 놓고 있을 뿐입니다. 종교의 형식에 대한 자유는 인정되며 6시간 노동 이외의 여가는 보장됩니다.
아마 토머스 모어는 이런 세상을 꿈꿨던 듯 합니다. 왕 한 명이 다스리는 것이 아닌 민주정치 - 르네상스의 오래된 미래인 고대 그리스를 본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 모두가 평등하게 노동하며 이를 명예로 생각하는, 농업이 중심인 나라.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욕망의 절제를 제도로 만들 구상까지 한 듯하군요. 사실 500년이 지난 지금 서울에서 공공주택 개념과 생활협동조합 개념, 10 몇년 전부터 논의되고 있는 식량주권 개념, 또한 공유경제가 한창 유럽에서 대안으로 떠오르는 현실을 생각했을 때 행복한 삶을 위한 국가와 경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모어의 아이디어는 꽤나 섬세한 데가 있다고 보이는군요.
묘한 구석이 있기도 합니다. 결혼을 할 때는 공증인을 대동한 상태에서 반드시 알몸으로 서로를 살핀 뒤에 한다는 것인데, 아마 엄숙하고 통제된 중에 하는 집안끼리의 결혼에 대한 인문주의자의 불만이 없진 않았을 겁니다. 때문에 이런 과격한 뒤집기를 시도했지만 아직은 강력하게 남아있는 교회의 힘과 사회분위기에 공증인이라는 타협점을 내보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노예들이 도살을 맡는다는 건 붉은 피가 정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해서 기피하던 당시 중세의 생각이 반영되었던 것 같고, 모든 가족은 일차적으로 아버지의 말을 따라야 하는 가부장적인 요소도 당시의 한계로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유토피아인들은 쾌락을 즐기나 그것이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에피쿠로스적인 철학도 길게 나오는데, 이건 아마 저자 개인의 인생관이 들어가지 않았나 합니다. 이 책은 제도를 말할 때는 정책집의 성격을, 풍속과 종교를 말할 때는 사회철학과 인생철학의 요소를 담고 있는 복합적인 책이기 때문에 이밖에 자세한 분석을 시도하면 더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을까 하네요.
그런데 문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그저 묘한 구석이 있다는 정도로만 끝나면 좋겠지만 솔직히 이 책을 다 읽었을 때의 제 심정은 이게 정말 유토피아라면 나는 절대 여기에 살기 싫다는 거였습니다. 우선 너무 금욕적입니다. 혼전성교와 간통을 제도적으로 강력히 통제해서 최고형을 사형까지 처한다는 그 생각 - 사람들 개개인의 도덕과 가치관을 법으로 강제하는 숨막힘을 그냥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인구조절을 정부가 간단히 지시만 하면 이동이 가능한 걸로 간주하는 것, 모두가 강제인지 자발적인 참여인지 모르겠지만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집에서 살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나 황금 등을 일부러 비천한 물품으로 만든다는 식으로 인간의 욕망까지 제도로 유도와 통제가 가능한 걸로 생각하는 독선과 오만이 저한텐 너무 끔찍해 보였습니다. 한 사람의 머리 속으로 만드는 국가라는 게 사실 독선이 전제로 깔려있지 않고선 불가능한 것입니다. 한 세상은 틀렸고 나 하나가 옳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확신, 이걸 해낼 수 있고 해내면 반드시 좋아질 거라는 확신이 은연중에 깔려있지 않으면 사실 어떻게 그런 글을 써서 책까지 낼 수 있었겠습니까. 서구의 이상향과 우리의 이상향은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몽유도원처럼 꿈을 꾼 한 사람이 선계에 들어가서 즐거이 놀다가 깨어난다는 식의 도피와 위로의 장이라면, 서구의 이상향은 현실에 발 붙이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과 동력을 제공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장입니다. 바로 그랬기에 그 무서운 추진력으로 한 때 세계를 자신들의 발 아래 두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만, 저는 추진력보다 독선과 오만이 먼저 보였습니다. 뒤에 참고자료에 나오는 다른 다양한 서구의 이상향 텍스트들도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어떤 무서움을 느꼈고요. 어쩌면 이게 서구의 텍스트를 읽는 동양인의 시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오만은 전쟁, 종교, 과학에 가서는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서구의 기독교 - 유일신 사상이라는 게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은 종교와 과학입니다. 어떤 의례를 지내는지, 어떤 형식의 기도를 하는지에 대한 자유는 열려있다는 대목에선 얼핏 교회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르네상스의 분위기가 묻어나는 듯 싶지만, 그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유일신 사상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종교이고, 이 외의 우상 숭배 등은 법으로 강력히 금지하고 있다는 대목을 바로 집어넣습니다. 과학과 학문 또한 이 세상을 만든 신의 능력을 찬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쓰이는 것이라는데, 기독교적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하는 서구인의 한계를 느꼈다고 해야 하나, 저한텐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비판받을 부분은 전쟁과 식민지입니다. 살 땅이 모자라면 다른 나라 원주민이 쓰지 않는 땅을 뺏으면 되는데, 이는 자연 법칙 상 당연한 것이고, 교역을 하는 다른 나라의 상인이 입은 피해까지 신경 써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대목, 그리고 그 전쟁에 사제들까지 종군한다는 인식 등은 빼도 박도 못하는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이로군요. 재미있는 건 저희가 배운 바로는 제국이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그 생산품이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독점적 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식민지를 만들어가면서 생기는 것인데, 바로 그 자본주의의 초기 단계에서 이를 뛰어넘는 공산주의적 이상향을 꿈꾼 모어에게도 식민지는 낯설거나 배척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던 겁니다. 사실 다른 얘기지만 맑스도 아시아 민족에 대한 시각은 굉장히 편협하고 오류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하죠. 식민지의 시대였던 19세기가 아닌 무려 16세기부터 이들에게 이런 인식이 자연스러웠던 걸 보면 자본주의건 공산주의건 이런 시각과 사상이('나'와 내가 속한 집합인 '내' 국가가 무한히 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조화로운 관계보단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서구인들의 근본인 게 아닌가 하는 회의마저 들었습니다. 사실 그게 이 책에 별을 세 개밖에 안 준 이유이기도 합니다.
유토피아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많은 부조리한 것들이 있었지만 몇 가지는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있는 듯 보였다고, 실컷 말해놓고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이게 몽유 소설의 기본 문법이라고 하더군요. 자신이 꿈꾸는 것과 현실 간의 괴리를 이렇게 농담처럼 얼버무리는 거라고. 하지만 좋게 생각해서, 저는 이게 저자도 잘은 모르지만 내게도 무슨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인정하는 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눈으로 자신이 찾아낼 수 없는 잘못을 후대에 맡기는 장치를 집어넣은 거였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읽었을 때 이 책은 조금 더 편하고 유연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