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상하게도 내게 그리스는 러시아와 겹쳐져서 읽힌다. 그러니까 영화에 있어서는 타르코프스키와 앙겔로폴로스가 겹치고, 소설에 있어서는 카잔차키스와 토스토예프스키가 겹치는 것이다. 아마도 앙겔로폴로스와 카잔차키스는 내가 그리스를 살펴보는 두 개의 창문일 것이다.그리고 다음. 이 두 명의 그리스인들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 시적 영감의 원천인 호메로스의 신화에 기대어 이야기를 풀어낸 바 있다. 앙겔로폴로스는 '율리시스의 시선'으로 카잔차키스는 '오딧세이'로. (율리시스는 문학에 있어서 꺼지지 않는 모티프이다. 이미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모더니즘의 최고봉으로 올라섰다......고 그런다. ^^)
그리스인 조르바는 역시 남성 화자의 입을 빌기 때문에 여성에 관한 관점은 내가 읽기에는 단지 성적 욕구의 대상, 그리고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거기에 조르바의 어떤 변명을 고려한다고 치더라도 말이다.) 그것이 나를 무척이나 불편하게 만든다.그렇지만 그렇게만 읽고 끝내기에는 이 소설의 파워는 정말이지 대단하다. 마지막에 화자와 조르바가 모든 것이 끝장나고 난 최대의 절망후에 해변에서 양고기를 구으면서 함께 춤추는 장면은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이다.
조르바를 읽으면서 나는 카잔차키스가 니체와 베르그송에 경도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곤했다. (후기를 보니 역시 그랬다) 머 니체, 베르그송 하니까리 복잡한 거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니체와 베르그송은 하나의 아이콘이다. 치열한 생의 긍정이라는. (니체는 허무주의의 대명사 아니냐....라고 여쭙는 분이 계시다면 니체의 초인 사상을 어떻게 해명하실 건지 다시 친절하게 여쭙고 싶다. 니체에 있어 허무주의는 없음이 아니라 없음을 긍정하는 힘이다~~~~라고 들뢰즈가 말했던가? 가물가물~~~)
조르바가 감동적인 것은 지금 이곳에서의 삶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랬다. 춤과 산투리로 풀어내는 언어들 -이래서 예술은 위대한 것이여~~ 그리고 나는 아직도 학삐리의 티를 못벗어났는지 이 대사가 눈물이 찡하도록 와닿았다.두목 사람들 좀 그대로 놔둬요, 그 사람들 눈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그래, 띄어 놓았다고 칩시다. 뭘보겠어요? 비참해요! 두목, 눈감은 놈은 감은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만일에 ..... 만일에 말이죠 만의 하나, 그사람들이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지금의 암흑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면...... 보여줄 수 있나요? 나 역시 궁금하다. 우리모두가 다 같이 행복할 수 있는 세계가 말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유토피아가 없는 지도는 볼 필요가 없다고. 거기에는 가야할 곳이 없기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