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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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동안 이 책을 읽었다. 국가 위기 상황 덕에 결혼 후 처음으로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았다. 짐을 싸며 다른 것들은 모두 두고, 이 책 한 권을 챙겼다. 오래 전부터 수차례 들어왔던 제목. 막연한 의무감이 있었지만, 매번 뒤로 미뤄왔던 이 책이 올해는 유독 간절했다.

삶의 무게가 갑자기 버거워질 정도로 무겁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였다. 부장이라는 직함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던가. 나는 자리에 맞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갑자기 놓여진 자리에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고민했다. 이게 뭐라고,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말해왔지만, 그것들이 대단치 않은 일이 되기에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일 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탈진했다. 뚜렷한 목적 없이 거센 물살에 휩쓸려 계속 항해해야 하는 것 같은 날들 속에서 두려웠고, 피곤했고, 외로웠고, 때로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가, 내가 맞게 살고 있는 것인가, 이 책에 답이 있을 것만 같았다.

거대한 청새치는 85일만에 노인에게 찾아온 행운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행운을 잡았고, 끈질기게 따라갔다. '그런데 이놈이 선택한 방법이란 온갖 올가미나 덫이나 계책이 미치지 못하는 먼 바다의 깊고 어두운 물속에 잠겨 있자는 것이지. 내가 선택한 방법이란 모든 사람이 다다르지 못하는 그곳까지 쫓아가서 그놈을 찾아내는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가지 못하는 그곳까지 말이야.'(p.51)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는 바다 위에서 그는 고기에게 말을 걸고, 그것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그것의 심리를 헤아려 본다. 때로는 '차라리 어부가 되지 말걸 그랬나 보다'(p.51) 라고 생각하고, '"난 죽을 때까지 너랑 같이 있을 테다."'(p.54) 다짐을 하기도 한다. 노인은 쥐가 나서 펴지지 않는 손을 달래가며 먼 바다를 바라보다가 새삼스럽게 고독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내 위대한 인간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늘 자신을 따르는 마놀린과 발뒤꿈치의 부상을 입고도 승부를 겨루는 디마지오, 한때 챔피언이었던 젊은 날의 기억은 끊임없이 그에게 용기를 준다. '노인은 모든 고통과 마지막 남아 있는 힘, 그리고 오래 전에 사라진 자부심을 총동원해 고기의 마지막 고통과 맞섰다.'(p.95) 그리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 고기는 수면 위로 떠올라 위력과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고기를 배에 묶고 돌아오는 길, 노인은 생각한다. 고기가 나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고기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 행운은 곧 불운으로 이어진다. 고기에게 달려드는 상어 떼의 공격을 막아내며 노인은 말한다. '"하지만 인간을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자신의 고기를 지키기 위해 많은 상어들을 죽여가며 노인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밤새 사투를 벌인다. 마침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녹초가 되었을 때 노인은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없이 배를 몰아 항구로 향한다. 무거운 짐이 없어진 배가 얼마나 가볍게 바다 위를 달리는지만을 느끼며.

'너를 이토록 녹초로 만든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는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p.121)

노인이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그 조각배에 나도 타고 있었다. 고기에게 끌려 조금씩 더 먼 바다로 나가는 노인이 위태로워보였다. 인생의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마지막 대어를 낚아보겠다는 그의 의지에 가슴이 뛰다가도, 뜨거운 햇볕 아래 망망한 바다에서 주림과 육체적 피로를 견디는 노인을 보며 같이 지쳐갔다. 대체 무엇을 위해 그는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그의 신념이 진실하게 느껴져 마음을 울렸지만, 그것이 결국엔 뼈로만 남겨질 것을 알기에 씁쓸하기도 했다. 그의 고기 때문에 죽어간 수많은 상어들은 어떠한가. 싸움 끝에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멀리까지 다녀온 그의 이야기만 남아 있을 뿐. 그 이야기조차 변색되어 관광객들의 눈에는 놀라운 뼈조각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내가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양도 다르지 않다. 나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일을 맡았고, 그 일에 끌려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 그간의 나의 경험을 쏟아부으며 밤낮으로 달리며, 사람들을 독려하고 있지만 이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것 같기에 두렵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 낚시대에서 손을 못 떼는 이유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의 상처를 보며 엉엉 울어준 마놀린, 그의 이야기를 애써 전달하려는 마을 사람들처럼,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그들 때문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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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항재 옮김, 노에미 비야무사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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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키 아카키예비치.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났을 때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하다 결국 남편의 이름을 그대로 아들에게 준다. "아마도 이 아이의 운명인가봐요."(p.11) 결국 자신만의 이름을 갖지 못한 아카키는 운명 때문인지 이름 때문인지, 그는 정체성 없는 만년 9급 관리로 한 생을 산다. 무미건조한 아카키의 인생에서 열정이 폭발하게 된 것은 외투 때문이었다. 실내복으로나 입어야할 만큼 낡아빠진 외투를 버리고 새 외투를 마련하기 위해 아카키는 영혼까지 끌어올려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는 앞으로 생길 외투를 늘 마음속에 그리며 정신적인 양식을 섭취했다. 이때부터 그는 존재 자체가 어쩐지 더 완전해진 것 같았고, 마치 결혼이라도 한 것 같았고, 어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같았고, 혼자가 아니라 마음에 드는 어떤 인생의 반려가 그와 함께 인생길을 가기로 동의한 것 같았다. 이 인생의 반려는 다름 아닌, 두툼하게 솜을 두고 닳지 않는 튼튼한 안감을 댄 바로 그 외투였다.'(p.33) 새 외투를 입고 출근한 날, 국의 사람들은 그에게 아는 체를 했고, 한 관리의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는다. 거리를 걷는 그의 눈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에게 외투는 러시아의 추위를 막아주는 옷 한벌이 아니었다. 그의 초라한 내면을 가리고 그를 빛나게 해 줄 수 있는 것,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것, 그를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아카키의 외투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날 밤 아카키는 외투를 강도에게 빼앗긴다. 아카키는 외투를 찾기 위해 경찰서장을 찾아간다. 그리고 다른 이의 조언을 듣고 고관을 찾아간다. 그들에게 아카키의 사정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심한 질책까지 당한 후 집에 돌아온 아카키는 죽음에 이른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없는 페테르부르크는 마치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변함이 없었다.'(p.60) 그래도 작가는 아카키에게 마지막 일격을 준비해 주었다. 아카키는 유령이 되어 나타나 직위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외투를 벗겨 가다가 마침내, 그에게 모멸감을 준 고관의 외투마저 빼앗아간다. 그 후로 고관은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된다.

이 작품에서 내가 눈여겨 본 것은 선한 인간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아카키는 주변 사람들에게 괄시를 당한다. 남들과 더불어 아카키를 함부로 대하려던 한 젊은이가 문득 죄책감을 느낀다. 그는 그후로도 계속 '이마가 벗어진 작달막한 관리가 가슴을 찌르는 듯한 목소리로 "날 내러벼둬요, 왜 날 모욕하는 거요?"라고 말하는 모습'(p.14)을 떠올리며 '그후 평생 동안 인간에게 비인간적인 면이 얼마나 많은지, 세련되고 교양 있는 사교계 사람들에게조차,(중략) 잔인하고 무례한 면이 얼마나 많이 숨어 있는 를 보면서 여러 번 몸서리를 쳤다.'(p.15) 이 뿐만이 아니다. 아카키가 외투를 잃고 실의에 빠져있을 때 국의 사람들은 그를 돕기 위해 모금을 한다. 그를 내친 고관은 연민을 느끼며 아카키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를 도우려고 한다. 사후라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이런 선량한 내면을 가진 사람들이 아카키를 함부로 대한 이유는 그들이 집단에 있기 때문이었고, 그가 자신의 지위에 걸맞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의식 때문이었다. 외투 한 벌로 그 집단에 들어서고, 사회적 위치를 인정받고 싶었던 아카키는 너무 순진했다. 사람들이 집단에서 선량한 인간성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유는 초현실적으로만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한 사회 구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러시아의 겨울밤 같은 이 냉혹한 세상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선량함이라는 외투 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작품이 200년이 넘는 시간을 거쳐 고전이 된 이유는 인간사를 바라보는 통찰력과 여러 모로 읽힐 수 있는 함의성 덕분일 것이다. 고골은 이 단편을 2년에 걸쳐 다듬어서 만들어 냈다고 한다. 너무 빨리 읽고, 너무 빨리 후기를 남기는 것이 미안할 지경이다. 이 작품의 10분의 1도 제대로 못 읽은 것 같아 아쉽다. 러시아어로 읽는다면 문장에서 또 다른 깊이를 얻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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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온다, 플라스틱 와이즈만 미래과학 11
김성화.권수진 지음, 백두리 그림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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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5학년이 되는 우리집 아이들의 독서모임을 위해 책을 찾고 있다가 우연히 발견한 과학책이 '미래가 온다' 시리즈이다.

와이즈만북스 출판사는 예전에 아들이 '빨간 내복의 초능력자'라는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기억에 남는 출판사이다. 시리즈가 끝나고 아들은 무척 아쉬워했다. 어설픈 수학이나 과학 동화답지 않게, 재미와 과학지식을 잘 버무려서 나도 재미있게 읽었다. 책을 고를 때 출판사도 살펴보는 편인데, 그 때의 기억으로 이 책도 쉽게 손이 갔다.

 

책이 배송되자마자 바로 앉아서 읽었는데, 손을 뗄 수 없었다. (우리 애들도 이렇게 읽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읽자마자 서평쓰는 중) 플라스틱에 대해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았다니, 새로운 정보를 얻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는 척하기를 좋아하는 우리 집 두 녀석은 이 책을 읽고나면 주변에 널린 플라스틱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할 것이기에 한동안 귀가 따가울 것 같다.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술술 읽히는 문장, 그리고 글과 잘 어울리는 일러스트이다. 그림으로 풀이된 플라스틱의 구조를 보면서 쉽게 이 물질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물질의 어마무시한 능력에 대해서도!!

 

좋은 어린이책 한권은 엄마의 노동을 크게 덜어준다. 이 책 한 권을 읽는 것으로 화학자라는 직업, 환경 문제, 분리수거 방법,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70% 이상의 이 플라스틱이라는 물질에 대해 나는 더 설명해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사실 그 점이 더 신이 난다!

2020년에 과학자들이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를 분해하는 세균을 발견했어. 언젠가는 세균이 페트병을 분해할지 몰라. 과학자들은 세균의 플라스틱 분해 효소를 플랑크톤 유전자에 합성하는 데도 성공했어. - P144

사람들은 세제 통과 페트병을 똑같이 플라스틱 수거함에 넣지만 그 둘은 완전 다른 물질이야. 알루미늄 캔과 종이만큼 다르다고!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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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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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란 다 말라붙은 작은 딱지도 일부러 떼어내고 후벼파서 고통을 음미하는 때이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누구와든 싸울 수 있을 만큼 전투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도오루가 다카코를 쏘아보던 날카로운 눈빛도 이해할 수 있었고, 이유 없는 죄책감에 마음을 졸여야하는 다카코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다른 아이를 동시에 임신 시킨 아버지라는 설정은 어떻게 이해를 하려고 해도 너무 잔인하다. 도오루는 아버지가 사랑 없이 자신을 만들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우월해 보이기까지 하는 다카코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묘사는 도오루가 느꼈을 열패감을 더 고스란히 전해준다. 한밤의 보행제로 그런 엄청난 심리적 퇴적물을 걷어내게 하다니, 이건 정말 소설이다. 다카코는 또 어떠한가. 사춘기 소녀의 떨림처럼 도오루에게 끌리고, 그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해 마음을 쓴다. 구시대 하이틴 로맨스에서나 봤던 근친상간 같은 느낌이랄까. 주인물들은 모두 매력젹이다. 주변 인물들은 이들의 매력을 빛내주고, 이들의 사이를 연결해줄 악역도 있고, 얼빠진 녀석도 하나 있다.

정리하자면 가족(태생)의 비밀, 전형적인 캐릭터, 비밀이 하나씩 벗겨지는 플롯. 딱 소년소녀들이 빠져들만한 만화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나도 흥미롭게 봤다. 만화와 다른 점이라면 섬세한 심리묘사랄까. 인물들 간의 관계 속에서 미묘하게 사춘기적인 감수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과장된 것 같기도 하고 날 것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감정선이 마치 밤의 분위기처럼 서술된다. 어쩌면 이런 면이 청소년 소설로 적합하게 느껴지는 부분일 수도 있겠다. 그들의 심리를 이처럼 정확하게 묘사해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분명 작가는 그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텐데말이다.)

'일상생활은 의외로 세세한 스케줄로 구분되어 있어 잡념이 끼어들지 않도록 되어 있다. 벨이 울리고 이동한다. 버스를 타고 내린다. 이를 닦는다. 식사를 한다. 어느 것이나 익숙해져 버리면 깊이 생각할 것 없이 반사적으로 할 수 있다.

오히려 장시간 연속하여 사고를 계속할 기회를 의식적으로 배제하도록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생활에 의문을 느끼게 되며, 일단 의문을 느끼면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촘촘히 구분하여 다양한 의식을 채워 넣는 것이다. 그러면 의식은 언제나 자주 바뀌어가며 쓸데없는 사고가 들어갈 여지가 없어진다.' (p.61)

'눈 깜짝할 사이에 어이없이 보행제는 끝나버린다. 벌써 3분의 2는 끝났다. 남은 3분의 1. 아침 햇살도 낮의 자외선도 바닷바람도 쑥떡도 언덕길도 돈지루도 기념촬영도 모두가 과거의 것. 지금은 어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열에 들뜬 듯이 기세를 몰아붙여 어느 틈엔가 여기까지 와버렸다....(중략) 뭐, 생각해 보면 매년 이랬던 것 같군. 행사 당일까지는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에 우물쭈물하지만, 막상 시작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 마음에 남는 것은 기억의 웃물뿐, 끝난 후에야 겨우 여러 장면의 단편이 조금씩 기억의 정위치에 자리 잡아가며, 보행제 전체의 인상이 정해지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p.176,177)

다소 작위적이고 유치한 흐름도 있지만, 철학적인 문장도 보인다. 딱 사춘기의 아이들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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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삼촌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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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고향을 찾은 나는 순이 삼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일 년 동안의 원만하지 못했던 우리 집에서의 생활이 이유가 된 것이 아닌가 싶어 나는 죄책감이 든다. 순이 삼촌은 신경과민으로 인해 아내와 갈등을 겪었고, 결국 일 년을 못 채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순이 삼촌의 신경과민은 30년 전 동네에서 있었던 소각 사건으로 인해 생긴 것이다. 공비를 소탕한다는 명목 하에 제주도 전역에서 소각 작전이 벌어졌고 우리 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동네가 모두 불타고 육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총살을 당했다. 그 와중에 간신히 살아온 순이 삼촌은 혼자 몸으로 딸을 낳고 억척스럽게 살아왔다. 그러나 삼십년이 지나서까지도 늘 환청에 시달렸고, 결국 사람들이 무수히 죽은 자신의 밭에서 다 늦은 나이에 자살을 한 것이다.


현기영은 여러 작품을 통해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의 어두운 역사를 그려낸다. 이 작품 역시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아픈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삼만에서 오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 4․3사건은 우리 역사의 어두운 부분이다. 이것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은 겨우 십년도 채 되지 않는다. 권력자들의 이념 아래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후, 위령제 한 번 지내지 못하고 숨죽여 살아온 제주도민들의 비극적인 역사가 이 작품에서는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진행되는 사건은 당시 참혹한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그것을 반성하게 한다. 또한 그렇게 아픈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답답한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평범했던 일상의 공간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살육의 현장으로 바뀌는 모습은 어린이의 시각을 통해 더욱 공포스럽게 그려진다.

다른 나라의 힘을 얻어 단기간에 민주주의를 향해 달려간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짧은 역사의 과정에서 많은 시련을 겪어왔다. 무고한 수많은 민중들의 죽음은 오늘의 역사에 초석이 되었으나, 감추어져서 제대로 평가받지 부분들이 많다. 문학은 이야기로 남아 이런 감추어진 사건을 파헤쳐내고 그러한 진실들 앞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 작품의 서술자가 고향을 대할 때의 불편함은 덮여온 역사에 대한 불편함일 것이다. 불편하지만 자꾸 들추어내어서 직시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해야 하는 것, 그것이 잘못된 역사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유채꽃의 노란 빛깔과 조랑말이 뛰어노는 푸른 목장, 옥빛 바다의 제주도의 화면 아래에는 아픈 역사의 그림자가 있다. 그리고 제주의 땅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거친 야생의 풀과 같은 제주도민들의 생명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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