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번의 금요일 -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2014~2023년의 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사단법인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 온다프레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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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6일에는 동료들과 4.16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식에 다녀왔다. 4호선 고잔역으로 가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형광 연둣빛 나무들이 아름다웠다. 고잔역에서 걸어서 기억교실로 향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있어야 할 자리마다 사진과 꽃과 이름이 있었다. 2학년 3반 교실에 들어섰을 때 나는 얼떨결에 김시연 님의 자리에 앉았다. 노란색으로 뜨개질한 방석 위에 앉아서 망설이다가 짧게 방명록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저는 은물입니다. 그곳에선 충분히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저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함께 하겠습니다. 또 만나요.”


교실 게시판엔 3반 담임 선생님인 김초원 선생님에게 아이들이 쓴 편지가 적혀있었다. 생일을 배에서 맞아서 서운하진 않냐고, 그래도 우리와 함께여서 좋으시죠? 같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4월 16일 생일을 배에서 맞았을 풍경과, 여느 날과 다름없었던 어떤 날이 영영 사라졌다는 걸 생각하자 너무 슬펐다. 


한 달간 꼬박 <520번의 금요일>을 읽었다. 책이 펼쳐져 있는 독서대를 책상으로 가져와서 낮이나 밤에 읽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읽다가 아주 많은 문장 앞에서 멈춰 섰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동거차도에 가서 보니까 너무 가까워서, 구명조끼 입고 수영 다 할 수 있는 거리예요. 배에서 나오라고만 했으면 다 살 수 있었는데 왜 굳이 못나오게 해서… 이렇게 가까운데.” (재강 엄마 양옥자)


“지난 시간들 중에 이때가 가장 처철했던 것 같아요. 모두 다 예민함이 최대치라고 해야 하나. 행진을 하는데 아주 예쁜 벚꽃길을 걷게 됐어요. 바람이 솔솔 불면서 햇빛 속에서 벚꽃이 찬란하게 떨어지고요. 마치 만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비현실적이었어요. 저희끼리 모여 있어서 힘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너무나 아팠어요. 억울하고 슬펐어요. 그 뒤로부터 벚꽃을 잘 못 보게 됐어요. 그때 기억이 마음에 팍 박혀버린 것 같아요, 산을 넘으면 또 산이고 진짜 끝이 없구나. 금방 끝날 문제가 아니구나. 그때 느꼈던 것 같아요.” (박예나)


“10월 29일이 지현이 생일이거든요. 생일 전날에 3반 지숙 엄마랑 팽목항에 갔어요. 지현이 생일 축하해 준다고 케이크랑 떡이랑 사 들고요. 그랬는데 그날 지현이가 나온 거예요. (…) 헬기가 하늘에 떠오르고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실종자 가족들이 헬기를 향해서 손을 흔들고 계셨어요. 손을 흔들고 있던 그 모습이 가슴속에 계속 남아있어요.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시연 엄마 윤경희)


4.16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에서 노숙 단식농성을 하던 유가족들을 만나러 생존학생들이 고된 행진을 하던 날,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니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시민들이 뒤에 서 있었던 장면, 참사 초기 국회 국정조사가 무엇인지, 수사와 조사가 무엇이 다르고 기소권은 또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가족들이 날마다 낯선 단어들을 새로 접하고 배우고 익히는 과정들, “맨날 우는 사람이 피해자가 아니라, 진상규명을 하는 것이, 그래서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막는 것이 피해자다움이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이게 진짜 피해자다움이다”라는 준영 엄마 임영애 님의 말.


책을 읽는 동안 유가족들과 시민들, 활동가들이 어떻게 함께 연대하고 힘이 되었는지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장면들을 그려보고 상상하면서 이제라도 다시 앞으로 계속될 그 과정을 함께 살아내고 싶다.


“우리 가족들이 처음부터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외롭다는 거였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체감하게 된 거죠.” (예은 엄마 박은희)


<520번의 금요일>을 읽으면서 은희 님이 느낀 감각이 무엇인지 감히 알게 되었다고 해도 될까. 용기 내서 읽기 시작했던 책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이제 나에게 세월호 참사는 슬프기만 일이 아니다. 참사가 일어난 후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 책을 읽고, 그 세계를 함께 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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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번의 금요일 -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2014~2023년의 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사단법인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 온다프레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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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에게 세월호 참사는 슬프기만 일이 아니다. <520번의 금요일>을 읽고 참사가 일어난 후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 책을 읽고, 그 세계를 함께 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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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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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멋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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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만 오늘 밤은 어떡하나요
연정 지음 / 발코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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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코앞까지 다가온 자정이 다 돼가는 시간에 이 책을 읽었다. 나태함 때문에, 조급한 마음 때문에 하루의 끝자락에 책을 펼쳤다는 변명이기도 하겠다. 저자의 글은 나와 닮아있기도 안 닮아있기도 했다. 당연한 소리겠지. 하지만 종종 책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게 재밌어서 책을 읽는 나에게는 중요한 지점이다. 닮은 점은 벚꽃을 좋아한다는 것, 다른 점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 농담이고, 달랐지만 이 책 안에는 내가 자주 들어앉아있었다.

'성인이 되고 자취를 시작했다. 매달 삼십삼만 원을 내야 했기에 마음에 새기고 다녔다. 어쩌다 귤이 먹고 싶으면 삼십삼만 오천 원이 필요했다.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삼십사만 원, 치킨이 먹고 싶으면 삼십오만 원. 동네를 돌아다니며 귤을 제일 저렴하게 파는 곳을 찾아냈다.'

꼭 내가 쓴 글 같았다. 오늘도 나는 마트 말고 동네에서 가장 물가가 싼 도매시장에 갔다 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트보다 저렴하고 포장재 쓰레기가 안 나온다는 점 때문이었다. 시장이라고 하기엔 가게 몇 칸뿐이지만. 가서 오렌지 9개를 3000원에 샀다. 장갑을 끼고 박스 안에 있는 오렌지 중 9개를 열심히 고르는 아주머니께 물어봤다. "어떤 게 싱싱한 거예요?" "안 무르고 딱딱한 거." 대부분 무른 것들이었다. 그래서 하나에 400원도 안되는 가격이 될 수 있는 거구나. 소쿠리에 가득 담겨있는 햇양파는 사면 하루 만에 먹어야 될 것 같이 생겼다. 여기저기 물러있었고 군데군데 까맸다. 귤 3000원, 딸기 한 팩 2000원, 새송이버섯 700원, 광천김 2000원. 7700원을 현금으로 결제하고 집으로 털레털레 걸어오는 길이 어딘가 씁쓸했는데. 이 글을 쓴 작가도 그런 헛헛한 마음이 잦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사랑"과 "행복"에 대해 아주 오랜만에 생각해봤다. 이제는 너무 오그라들고 냉소적으로 느껴지는 저 두 단어를 이 책이 아니었다면 곱씹어 보지 않았을거다. 4년간 배운 전공은 내팽개치고 출판사를 느슨하게 준비하고 있는 내가 바란 것도 사실 행복이었던 걸까.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4년째 연애를 이어오고 있는 J와의 관계도 사실 온통 사랑이었을까. 그 답은 잘 모르겠다. 다만 이 책에 있는 글들이 내게 '행복해지고 싶어서 그랬을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작가는 '나의 쓸모를 증명하려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나는 언젠가부터 "행복해지자"라는 말에 별 감흥이 없어졌다. 행복을 목표로 할수록 종종 더 불행해지는 것 같았으니까. 작은 행복에도 종종 심드렁했다. 그럼에도 행복을 이야기하는 이 책에 마음이 갔던 건 동시에 작가가 "청승 떨기엔 부족한 서사라는 걸 안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거다. 슬픈 와중에도 농담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라서, 그 마음을 연습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 같으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잘 자길 바라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모양은 균일하지 않지만 자꾸만 먹고 싶은 쿠키 같은 글들.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웠거나 두려운 사람들에게 이 책이 가닿았으면 좋겠다. 읽기 전보단 조금이라도 더 푹 잘 수 있을 거다. 당신 곁에 가만히 앉아서 결은 다르겠지만 의미는 선명하게 닮은 채로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만 오늘 밤은 어떡하나요"라고 같이 묻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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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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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무기력한 날이 있나요, 하고 누군가에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만약 그 질문이 나를 향한 것이었다면, 나는 높은 확률로

매일 무기력과 싸우고 있어요.라고 답할 것이다. 무기력은 쉽게 나태로 이어지고 우울로 이어지기 때문에 '잘' 살아가기 위해선 무기력을 잘 다뤄야 한다. 씩씩하고 명랑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아무것도 하기 싫고 결정을 내린 일을 다시 자꾸만 망설이게 되는 우울의 날들이 이어진다. 사는 게 그런 건가, 싶다가도 어떤 날은 살아내는 게 힘겹다. 그런 일상의 반복 속에서 나는 박상영 작가의 소설을 만났다. 실은, 그의 존재를 '알았던 건' 꽤 오래전이었다. 겨울이었던가, 여름이었던가 나는 동네의 작은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고 책갈피를 받았다. 그 책갈피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공자의 말처럼 즐길 줄 아는 자가 진짜 성공을 하는 것이라면, 왕샤는 스타가 됐어야 했다.

즐기는 사람은 그저 즐길 줄 아는 사람일 뿐이고 잘하는 사람은 그저 잘할 뿐이며, 정작 잘 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중에서, 박상영

문장에 묻어있는 짙게 깔린 회의와 단호함이. '그때는 알지 못했다.'라는 끝맺음이 내가 꼭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묘한 기분으로 그 문장을 몇 번 곱씹어 보다가 박상영 작가를 그때 알게 됐다. 그의 첫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를 읽게 된 건 그로부터 몇 개월 후였다. 책이나 읽으러 갈까, 하고 발걸음을 옮긴 서점에서 우연히 저 책을 사게 됐고 단숨에 읽었다. 그의 글을 읽고 무기력을 느낄 때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글을 읽을수록 나른한 무기력감이 밀려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아마 엉망진창인 주인공에게 내 모습이 겹쳐 보여서 였을거다.

그런 그가 올해 여름, 단편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을 냈다. 친구와 부산에 놀러 갔다 와서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었다. 기차가 어두운 철로를 달리는 밤에 그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 속 주인공은 여전히 엉망진창이고 무기력한데 이상하게 웃기고 공감이 갔다.

이야기는 클럽에서 술에 취한 주인공이 바텐더 '규호'에게 키스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실은 취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전에 사귄 애인때문에 에이즈에 걸리고 마는데 절망도 잠시, 자신의 병명에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인 '카일리'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그의 특기는 독창적 별명 짓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할 에이즈의 무게를 애써 가볍게 만드려고 노력한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채. 규호는 키스를 하고 잊어달라고 했던 주인공의 말이 무색하게 주인공이 일하는 곳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일이 끝날 때까지 인근 카페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전하고 돌아간다.

대답도 하기 전에 저벅저벅 공연장을 나가버린 그.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서 단 한 권도 팔리지 않은 프로그램북을

요리조리 다시 진열도 해보고, 물티슈를 뽑아다가 먼지 한 톨 없는 쇼케이스를 닦고 또 닦고 그랬지.

그런데 이상하다. 나 왜 웃고 있니. 주책맞게.

대도시의 사랑법 P.18 ,박상영

이 문장에서 나는 사랑이 시작되려 할 때의 간질거림이 떠올랐다. 숨기려 해도 새어 나오는 웃음 같은 것들. 그런 걸 잘 표현한 것 같아 좋았다. 그 후 몇 번의 만남을 지나 주인공과 규호는 사귀게 되고 3년동안 연애를 하게 된다.

일단 한 번의 직장 생활을 겪고 나니, 뭔가를 이루거나 성취하고 싶다는 동기가 사라져버렸다. 결국에는 자리만 옮긴 채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겠지. 짜증과 분노와 희망에 수반되는 절망과 매일 반복되는 일과를 땀처럼 뒤집어쓴 채로. 그것은 연애라는 사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이제는 난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어. 취업도 글쓰기도 연애도 무엇도 권태롭지 않은 게 없고.

그런데도 나는 왜 이상하게, 자꾸만 네 이름을 쓰고 싶은 걸까. 지독히 일상을 닮아 있는 또 다른 한 명에 불과한 규호 너의 이름을 말이야.

대도시의 사랑법, P.26, 박상영

나는 이상하게 그가 나의 서울인 것만 같다. 아름다운 서울 시티 시끄러운 음악소리. 까만 눈. 빡빡머리.

대도시의 사랑법, P.31, 박상영

괜히 세상의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를 괴롭혀 주고 싶은 마음과

세상 모든 것들을 다 주고 싶은 마음이 번갈아가며 들었다.

대도시의 사랑법, P.39, 박상영

어쩌면 연애는 일상과 무척 닮았다.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곳에 함께 가고, 그러다 서로의 일상에 한자리씩 차지하게 되는 애인도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사랑하는 애인의 이름은 일상의 순간마다 마음속으로 괜히 불러보게 된다. 힘들거나 즐겁거나 외로운 날에.

나는 박상영 작가 특유의 유쾌함과 자조 섞인 문장이 좋다. 두 번째 문장에서 그 유쾌함이 잘 드러나 있는데, 까만 눈. 빡빡머리, 라니. 유명한 노래 가사를 통해 주인공의 설레는 마음과 규호의 모습을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넣을 수가 있을까. 읽다가 풋, 하고 웃었다. 언제나 조금 빠르게 사랑이 시작되고 나면 느끼게 되는 사랑스러운 이중적인 마음. 상대방을 괴롭히고 싶기도 하지만, 세상 모든 것들을 다 안겨주고 싶은 마음도 알 것 같다. 연애라는 건 어쩌면 찰나의 감정과 마음을 스스로 잘 들여다보고 서로 알아봐 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으레 대부분의 연인이 그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규호와 주인공도 권태로워지지만 결코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끔 섹스를 할 때 깨닫게 되는 '카일리'로 인해 섹스와 조금은 자연스럽게 멀어진 그들을 지켜보는 수밖에. 취업을 하던 순간에도, 좋은 기회가 생겨 함께 중국을 갈 수 있었던 순간에도 '카일리'는 불현듯 등장한다. 주인공은 정말 신경 쓰지 않으려 하지만 카일리로 인한 제약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결코 '에이즈에 걸린'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과 규호가 살아가고 사랑하는 이야기임에는 분명하다. 나는 그 점이 좋았다.

오래전, 규호와 함께 이른 아침 낙산공원에 올라간 주인공은 떠오르는 해를 보며, 막 시작한 아침과 아주 늦은 밤이 꼭 맞닿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 후, 주인공은 규호와 함께 가기로 한 중국행을 카일리 때문에 못 간다는 현실을 맞닥뜨린다. 주인공은 자신이 따라갈 주제가 안된다고 인정하며 그 마음을 규호에게 전한다. 규호가 중국으로 떠나기 전, 그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이어나간다.

이 설렘도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밤이 끝나는 시점과 해가 뜨는 시점은 이어져 있으니까.

지금 이렇게 설레는 감정이 이는 것은, 결국 우리가 완벽히 끝날 때가 되어간다는 의미겠지.

대도시의 사랑법 P.72, 박상영

규호가 애틋한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도 주인공은 '이 설렘도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며 다가오는 규호와의 이별의 슬픔을 짐짓 모른척하고 자조한다. 실은 그게 아니면서, 함께 떠나고 싶으면서. 그런 마음쯤은 밤이 끝나는 시점과 해가 뜨는 시점과 이어져 있는 것과 같다고, 설레는 감정이 이는 것은 결국 우리가 완벽히 끝날 때가 되어간다는 의미라고 되뇐다. 이는 낙산공원에서 처음으로 규호에게 제대로 만나자는 말을 듣고 자신이 에이즈 환자라는 것을 밝힌 때를 회상하게 한다. 해가 뜨는 순간이었고 규호는 그런 주인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시작이었다. 그런 순간과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 닮아있다는 사실은 어쩐지 슬프다. 떠나는 규호에게 기다리고 싶다는 진심을 전하지 못한 채, 공항을 떠나 다시 '대도시' 서울로 돌아가는 주인공에게 실은 규호는 정말로 필요한 존재다. 배터리가 떨어지면 조용히 보조 배터리를 내밀고, 입술이 갈라지면 립밤을 발라주고, 방에 암막 커튼을 달아주고, 간지러운 등도 긁어주고, 먼저 욕실에 들어가 공기를 데워놓는 규호가.

그럼에도 연애라는 것의 끝은 아주 늦은 밤과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가 돌아갈 '서울'이라는 시끄럽고 복잡한 도시에는 규호가 없다. 주인공에겐 규호가 서울이었으니까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 사라진 걸지도 모른다. 대도시로 돌아가 주인공은 잘 살아갈까. 그가 터득한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주 늦은 밤은 막 시작한 아침과 맞닿아있으니까. 무기력하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에이즈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퀘스트를 깨듯 계속 살아가는 주인공과 어리바리하지만 솔직하게 살아가는 규호의 모습을 보았으니까.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도, 삭막한 대도시 속에서 매일 피곤에 절며 일해도 결국은 계속 살아갔으니까. 그래서 이 이야기가 내 이야기 같기도 했다. 소설 속, 꼭 어딘가 살고 있을 것 같은 그들이 살아가고 있다면, 앞으로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순간이 오더라도 조금은 더 살아봐야지 하고 되뇌어 볼 수 있었으니까. 나의 늦은 밤과 막 시작한 아침도 그들의 밤과 아침처럼 맞닿아있을 테니까, 계속 살아갈 수 있을거라고.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나처럼 그들도 다시 사랑할 수 있다고 어영부영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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