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 - 이정록 청춘 시집
이정록 지음, 최보윤 그림 / 사계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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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너에게,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를 읽는다는 것은,

​세상에는 읽을거리가 많고, 읽을 종류도 참 많다. 그중에서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녁을 먹고 딸아이가 줄넘기하는 놀이터에 따라 나갔다. 롱패딩으로 몸을 감싸고 모자까지 눌러쓴 후라 바람이 닿는 곳은 이마밖에 없었다. 내 좁은 이마가 온몸으로 잘 벼린 칼날 같은 바람을 혼자 맞고 있었다. 얼음 같은 칼날에 이마를 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동동걸음으로 딸아이의 줄넘기가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문득 저녁을 먹고 침대 머리에 반쯤 몸을 누이고 읽은 시가 생각이 났다.
 
활짝」
 
센서등한테
꿈을 얻었다.
 
내 꿈은, 이제
'켜지는 사람'이다.
 
어둠 속에서,
 
어둠을 뚫고 가는 이에게,
 
나는, 활짝
켜지는 사람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하나. 어두운 곳에 있었던 평범했던 대상을 향해 활짝 불이 켜지는 것을 발견하는 것일까? 현관문을 들어서고 나설 때마다 매뉴얼 대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센서등에서 꿈을 얻는 것처럼 말이다.
 
「청춘」
 
찬밥과 청춘의
공통점은?
 
그건,
물 말아 먹기 십상이라는 것.

 
 
시를 읽는다는 것은
둘, 지구 반대편쯤에 있는 너와 내가 만나서 사랑의 불꽃이 튀는 것처럼, 낯설은 대상과 대상이 만나서 불꽃을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전혀 만날 일 없는 찬밥과 청춘이 만나서 서로에게 위로가 되니 말이다.
 
「신호등」​
 
차도
사람도
여기에서는 고요해진다
초록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초록을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개를 숙이고 걷던 사람도 멈춰 고개를 든다
초록 쪽으로 걸어가야 한다
초록 쪽으로 시동을 걸어야 한다
그동안 너무 붉어졌다
다짜고짜 뜨거워졌다
해가 뜨인 쪽인 줄 알았는데
서녘 낭떠러지였다
 
지금은 초록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나는 당신이 출발한 쪽으로
당신은 내가 떠나온 쪽으로
초록의 뿌리를 내뻗어야 한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셋, 객관적인 대상 속에서 나만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도로 위의 질주하는 차들과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신호등이 때론 삶의 '출발'을 혹은 '멈춤'을 혹은 '경고'를 보내는 신이 보낸 사자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단무지」
 
백반집
온갖 반찬 가운데
단무지 세 조작은
참 보잘것없고 초라하지만,
 
중국집
짜장면 한 그릇에
단무지 한 조각은
무지무지 독보적이다.
 
너처럼 황금빛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넷, 어느 날 내가 한없이 작고 초라해져 보일 때,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너는 어디선가 어느 누구에겐가 꼭 필요한 빛나는 존재야."라는 소리없이 짦고 강렬한 외침일까? 짜장면 옆 종지 위에 놓인 단무지처럼 말이다.
 
「빵빵한 소」
 
과자보다 가벼운 소
과자가 좋아 과자 봉지에 사는 소
빵 냄새가 좋아 빵 봉지에 사는 소
늘 배가 불러서 과자와 빵은 건드리지 않는 소
유통 기한이 지나면 더 빵빵해지는 소
 
봉지를 뜯으면 어느새 날아가는 소
지는 게 이기는 거야 싸움 한 번 안 한 소
하지만 착하지 않은 소
언제나 얄미운 소
오라질, 질소

 
 
여행은 꼭 동여맨 매듭 사이로 조금씩 공기가 빠져나가 이제 흐물거리게 된 풍선같은 일상에 새 공기를 집어넣는 것이다. 무료하고 지친 몸에 링겔 한병을 맞고 병원을 나서는 발걸음 같은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을 여행에 빗대면 아마도, 지식서적은 유명한 문화유적지, 세계 100대 자연 경관 같은 곳을 여행하는 것, 소설은 룰러코스터와 같은 짜릿함이 있는 테마파크나 놀이공원을 여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음, 음, 시를 읽는다는 것은 여행지 어딘가에서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위해 제 몸을 녹이고 있는 서쪽 하늘의 해를 발견하는 것, 그런 것 아닐까? 그래서 오랫동안 몸속에 남았던 폐 속의 묵은 공기가 '아!'하면서 새어나는 것, 그런 것이 아닐까?
 
시를 읽으며 시를 생각한다. "그래, 내가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이유가 시 때문이었지." 그 생각이 났다.
 
「희망」
 
화장지
갑 티슈
 
그래
이렇게 비우는 거다
 
우는 거다
 
가슴을 키우는 거다
 
 
「네 시간」
 
스물네 시간 중에
네 시간은 너를 위해 써
스무 시간을 네 시간의 밑돌로 삼아
 
스무 시간은 밥과 버스비와 헌금을 위하여
나머지 네 시간은 고래와 새우의 사랑싸움과
별과 귀뚜라미의 연애를 위하여
 
네 시간이 네 풀잎이야
풀잎피리야
그 피리 소리에 춤을 춰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 선물해
 
스물네 시간 중에
네 시간은
오로지 네 시간이야

 
 
'아직 오지 않은 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아직 오지 않는 나'를 위해 필요한 것은 돈벌이가 되는 일을 하는 것이지.
그리고
'아직 오지 않는 나'를 위해 필요한 것은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고래와 새우의 사랑이나
하등 쓸모없을 것 같은 별과 귀뚜라미의 연애담을
밤새 듣는 것이기도 하지.
 
24시간을 쪼개고 나누어서 초단위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는,
고래와 새우의 사랑과 별과 귀뚜라미의 사랑의 후일담을 이야기해준다.
시란, 그런 것이다.

 

청춘은, 텃새가 철새로 날아오르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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