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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에서 배워라 - 해나 개즈비의 코미디 여정
해나 개즈비 지음, 노지양 옮김 / 창비 / 2023년 3월
평점 :
스탠딩 코미디를 즐겨보는 한국인이 많을까? 한 명의 코미디언이 나와 한 시간 넘게 재담을 늘어놓으면, 정해진 듯한 시점에 관객 모두가 아하하 웃는다. 그게 재미있나? 왜 그걸 듣고 있지? 의구심을 갖고 보기 시작한 해나 개즈비의 ‘나네트’(한국 제목 ‘나의 이야기’)는 코미디를 섞어놓은 강연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오, 이래서 보나? 그냥 강연은 재미가 없으니 웃음을 섞여내는 건가 싶었다.
얕은 깨달음은 해나의 두 번째 넷플릭스 스탠딩 코미디 ‘나의 더글라스’를 보고 산산이 부서졌다. 나네트를 보고 ‘강연이냐?’며 비꼬는 남성의 “의견”이 많았다는거야. 스탠딩 코미디가 진심으로 재미를 위해 관람하는 장르라면, 나네트가 서구 사회에 던진 충격은 상당히 컸겠구나 싶었다. 예상치 못한 맞는 말을 듣고 머리가 아주 띵했을 테니까.
해나는 그리 부유하지 못한 집에서 태어난 막내딸이고, 동성애자이고, 거구인데다거구인 데다, (아주 늦게) 자폐 진단을 받았다. 작은 사회에서 특별했던 해나가 제대로 fit-in 하기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어쩌다가 예술사에 관심이 생겨 간신히 대학에 갔다. 이후로도 몇 년을 더 그럭저럭 살다 우연한 기회에 코미디 업계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스스로의 상처를 끝내주는 웃음으로 승화시켜 시청자에게 촌철살인을 날리는 세계적인 코미디언이 되었다.
코미디 쇼와 책을 통해 내가 느낀 해나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여러분, 저는 남자로 오인 당해 맞을 뻔한 웃긴 일화가 있습니다. 마초였던 그 남자는 제가 여자인 걸 알고 진심으로 사과했죠. 그런데 이 이야기의 끝은 뭔지 알아요? 그 남자가 나의 정체성을 알아채고는 결국 때려눕혔다는 거예요. 와하하. 그런데 사실, 이 일을 이렇게 우습다며 말하지만 상처는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어요. 그건 모두에게나 그래요. 그런 상처를 신경 쓸 필요조차 없던 사람들은 몰랐겠지만요.
해나 개즈비의 ‘차이에서 배워라’는 나네트가 대성공한 이후 해나가 정리한 본인의 인생과 코미디를 하게 된 여정이 담겨있다. 자폐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 세상에 적응하려 애쓴 해나의 인생은 어땠을까. 동성애자를 혐오하다 못해 불법으로 규정한 곳에서 성장한다는 건 어떤 일이었을까. 시종일관 가볍게 설명하는데도 읽는 사람의 마음은 무겁기가 한이 없다. 해나가 웃음으로 승화하기까지 그 모든 고통을 어떻게 버텼을까 싶어서.
해나의 쇼를 보며 처음에는 저 대사를 외우고 하는 건지 순발력을 발휘하는 건지 궁금했고, 어느 시점이 되니 철저하게 모든 것을 준비했겠다고 느꼈고, 그리하여 얼마나 완벽히 준비했으면 자연스럽다 못해 즉흥적으로 보이는 극을 저리도 길게 표현할 수 있는지 존경스러웠다. 빛나는 사람이 어둡고 초라한 시기를 지나왔다며 참으로 솔직한 이야기를 펼쳤다. 나는 혹시 내가 그 시기를 더 혹독하게 만드는 사람은 아닌지, 편협과 오만으로 뒤덮인 사람은 아닌지 반성하며, 또 나는 나의 초라한 시기를 얼마나 어떻게 잘 극복했는지 되돌아보며 책을 읽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한다. 서로를 공격하기보다는 서로에게 건승을 빌어주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해나 개즈비의 두 쇼를 보시고, 책까지 읽으시라. 해나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며 일갈을 날려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