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자녀
서율하 지음 / 고유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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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이방인, 알베르 까뮈)"

"동기나 절차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사람을 죽인 모양이었다.(서율하, 사람의 자녀 중 수감자)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좋은 소설들의 첫문장은 누군가의 죽음과 관련 있는 경우가 좀 있다. 아무래도 죽음이나 그와 관련된 사건은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아주 좋은 시작점인 것 같다.  작가들이 이토록 죽음에 매료되는 것은 죽음이 인간의 삶의 본질이자 이를 드러내는데 가장 좋은 장치이기 때문이다. 


이 단편집 중 처음 작품인 "수감자"의 첫문장으로 말하자면 다른 유명한 작가의 작품에 비해 손색이 없다.  내가 누군가를 죽였고 나 또한 사형을 당해 죽을 운명이다. 이러한 이중의 죽음 장치를 통해 작가는 아주 강렬하게 인간을 탐구하려고 뛰어든다.


"나는 알 수 없는 사형집행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하였다.(p8)


작가에 다르면 우선 인간은 죽을 줄 알면서도 죽음을 향애 날마다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존재이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불안감 속에서도 인간은 일상에 매달려야 한다.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전철을 타고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한다. 집에 와서 늘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같은 천장을 보고 잠을  깬다. 피할 수 없는 죽음 속에서 이러한 일상은 무의미한 반복일 뿐이다. 


"나는 엎어진 채로 계속 탄젠트 함수 그래프에 대해 생각했다. 같은 형태, 같은 주기, 계속해서 수렴하는 곡선 말이다.(p10)


평범하고 반복되는 지루하면서도 고단한 삶이 이 짧은 문장에 응축되어 있다.  쉽지만 강렬하고 무미한듯 하면서도 밀도 있는 내용이다. 재능 있는 작가다. 


작가는 죽음과 불안이라는  인간 삶의 중요한 본질을 관통하면서 개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념을 설명하고 있다. 


"파티션은 나와 타인을 분리하고 제각기 무언가로 만들어 놓은 유일한 방어책이다. ....단절은 나와 타인을 별개의 존재로 만들어 놓는다. 그 분절이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확실히 이점은 있다. (p11)


인간은 죽음과 불안을 안고 사는 병든 존재이다. 타인의 시선에 피를 흘리면서도(샤르트르), 이 세상이 내 몸과 살이라는 연대(퐁티)를 추구하는 모순과 부조리속에  살고 있다. 단절을 통해 돌립된 개체로서의 생명이 성립하지만 개체의 독립성은 불완전성이 속성이다. 


작가는 이러한 점을 깨닫고 존재의 부조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보다 더 쉽게 철학적 테제를 표혀한 문장이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정말로 그것이 싫어질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다(p11) 


죽음과 불안 , 부조리 속의 허무감에 허우적 거리는  인간만이 삶에 대한 실존적 자각을 할 수 있다. 삶이 고통스럽고 허무해도 인간은 삶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작가는 사형집행일이 언제가 되든


"삶에 대한 허무주의적 예측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 더 살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내가 내일 당장 죽지 않는다면 잘은 모르겠다만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p27)는 생각을 하면서 언제나처럼 회사로 출근을 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작가는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소설 속에 녹여내었다. <수감자>라는 제목이 내포하듯 인간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감옥에 갖혀 반복되는 일상을 행하는 존재다.  


사형을 기다리는 수감자이다.  불안과 허무는 인간의 본질이다. 바로 이순간이 삶에 대한 실존적 자각을 깨닫는 순간이다. 삶이 허무함을 느낄 때 그 허무함에서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삶을 스스로 기획해서 만들어 간다.


삶이 허무하기만 하다면 즉 색이 공하기만 하다면 결국 죽거나 열반만이 선택지이다. 하지만  무한 반복되고 고통과 허무함속에서 가치 있는 삶을 이루기 위에 노력하는 것이 실존적 깨달음이다.  색즉시공이지만 공즉시색이다.  (어떻게 보면 실존주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대표되는 웅혼하고 장엄한 불교의 대승사상을 서양적 관점에서 재해석 한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실존적 철학에 대한 이해를 짧은 단편 속에 거의 완벽하게 녹여 냈다. 문학이 이간의 삶으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라면 철학은 같은 내용은 이론으로 풀어 낸다. 


또한 작가의 놀라는 점은 쉽고 간결한 문체로 이야기 하지만 그 이야기의 내용은 매우 원숙한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물론 작가의 한계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글은 쉬우나 내용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다. 짧은 단편 속에 인간에 대한 실존적 탐구가 거의 완벽하게 들어 가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내용이 너무 밀도 있으면 읽는 이도 쓰는 이도 힘들다. 


힘을 조금 빼면 좋겠다.  맨 앞에 첫문장 예시로 인용한 정지아 작가의 글처럼 진지일색의  아버지의 죽음조차 조금 유머스럽게 표현하는 것은 어떨까.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의 일상을 조금 더 가볍게 터치하면서도 사람이라는 존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에서 문학적 감수성외에도  철학적 깊이를 보았다. 문학을 문학만으로 공부하고 해석하면 그냥 독서 감상문 수준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 문학은 철학적 이해 속에서 해석되고 쓰여져야 한다. 어쩌면 깊이에의 강요(파트리크 쥐스킨트)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작품에서 철학적 소양과 문학적 감수성을 겸비한 작가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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