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텔라의 인정 욕구에 트리거로 작용하는 인물로서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만난 티소엔 크랄리디안이라는 인물이 있다. 기사로서의 향상심을 매번 부르짖으면서, 에스틴이 그 좋은 실력을 가지고 치안대에서 썩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인물이다. 시험장에 있던 인물들 중에 유일하게 에스틴의 진짜 실력을 알아낸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입신양명은 전형적이어서 고결하다. 단순히 더 높은 지위를 갖기 위해 수련하는 게 아니라,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향상된 인간이어야 하기 때문에 검을 놓지 않는다. 또한 에스틴이 자기 실력을 감추고 치안대에서 비비고 있는 것을 성취욕이나 향상심 같은 것을 귀찮아하기 때문이라고 정말로 믿는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대련을 신청해 에스틴을 자극하고, 마침내는 에스틴이 유일하게 친구라고 생각하는 인물이 된다. 에스틴이 조금만 더 치안대에서 비비고 있었더라면, 이 둘은 서로가 서로의 자극제가 되어 검술과 우정을 함께 나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약하면, 티소엔 크랄리디안은 에스틴이 치안대 기사로서 '꿀보직에서 월급도둑질을 하며' 자신의 검술 실력도 보전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였다. 그러나 높으신 분들 간 권력 다툼이 일개 치안대 기사인 에스틴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자, 에스틴/에스텔라에게 입신양명과 월급도둑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곡절인즉, 차기 황후로 지목된 태자의 약혼녀가 마녀의 숲에서 살해당한 것. 여인의 비명 때문에 달려간 살해 현장에서 범인과 한참 동안 검을 맞대고 돌아온 에스틴은 그 숲에 있던 살인범이 태자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는 진부한 이야기다.하필 그 태자는 작고한 황제가 직접 공언한 후계자인 데다가 어려서 용병 생활을 하느라 전장에 익숙하기까지 하다. 이 일이 발단이 되어 에스틴과 태자 클레오르는 안면을 트고 모종의 거래를 하기에 이른다. 그 거래란 향후 5년간 에스틴 아르투르는 여장을 하고 황태자의 약혼녀로서 그의 즉위를 방해하는 세력으로부터 어떠한 생명의 위협을 받더라도 살아남을 것.
이전까지는 에스틴 자신이 생각을 어찌하느냐에 따라 입신양명과 월급도둑 둘 다를 이룩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태자의 약혼녀로 지목된 상황에서는 입신하여 이름을 날리든지 치안대에 붙어앉아 월급도둑 생활을 계속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 거래에서 미묘한 구석이라면 이것이다. 클레오르는 '에스틴 아르투르'에게 '황태자비' 자리를 제시했다는 점. 클레오르가 검을 맞댄 상대는 대외적으로 에스틴으로 근무하고 있는 치안대 기사이고, 당연히 남자이다. 그 무위를 인정하면서 그에게 대신의 자리가 아니라 '황태자의 약혼녀, 나아가 황태자비/황후'의 자리를 제시했다. 남자에게 여장을 제안했는데, 그 남자가 하필 남장을 한 여자라서 여장을 한 남자에게 여장을 제안한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살해 위협을 훌륭하게 헤쳐 나가면서 남자인 것도 여자인 것도 들키지 말아야 하는 기묘한 상황.
클레오르와 에스틴/에스텔라 둘 다에게 이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에스틴/에스텔라는 이 계약을 받아들일 경우 더는 예비 태자비 살해 사건에서 발을 뺄 수 없게 될 것이다.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입막음 조로 클레오르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 처지다.
더하여 이것은, 에스틴으로서 티소엔과 계속 교류할 것인지 에스텔라로서 클레오르와 동업할 것인지를 고르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에스틴/에스텔라의 상황이 특수하기에 일에 동원된 사람들을 빼고는 모두에게 속사정을 비밀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클레오르에게는 첫째로 아무리 개국 공신 집안이라 하나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아르투르 가를 사돈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무런 정치적 이득을 주지 못한다. 에스텔라 이후에 들어갈 새로운 태자비 또는 황후를 정하려는 움직임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가 본래의 성별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여신 앞에서 황제로 인정받는 절차 때문에 여신에 대한 모독으로 몰아갈 여지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제 한 몸 지킬 능력이 있는 에스틴을 에스텔라로서 약혼녀 자리에 세우면 약혼녀를 지키기 위해 들어가는 수고를 덜 수 있다. 또 같이 있는 동안 어느 정도는 그의 마음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에스텔라는 평생 벌어도 다 못 벌 엄청난 돈과 안정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놀아도 되는 미래에, 클레오르는 안심하고 뒤를 맡길 수 있는 동업자와 약간의 흑심에 기대를 걸고 계약을 체결한다. 한쪽은 동업자로, 한쪽은 호감을 더해서 서로를 대하니, 일정한 긴장감을 처음부터 갖고 가는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