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시간
해이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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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에는 다만 한 사람이 있을 뿐이죠. 나를 버릴 수 있는 한 사람 ]

그런 책들이 있다. 얇지만 읽고 나면 그 전보다 꽤 무게가 무거워졌다고 느껴지는 책들이. 해이수 작가의 탑의 시간은 나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 책이다.

무겁다못해 나를 우울감으로 한동안 짓눌렀던 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굳이 표현하자면. 마지막에 주인공들은 탁 털어버리는 기쁨을 표현하는데 비해서 나는 왜 소설이 다 끝난 마당에 이렇게 비틀거리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니 과거의 털어내지 못한 인연들이 하나둘 스멀스멀 마음 속에서 올라와서였던 것 같다. 나의 20대와 30대는 유치찬란하고 어설픈 사랑의 기억들로 그야말로 초토화되어있다.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서로에게 잔인했고 서툴렀던 사랑의 표현들은 내 몸과 마음에 찌꺼기처럼 달라붙어 있다는 생각이

문득 이 책을 읽고 나니 들었다. 주인공 연과 명처럼 어딘가로 떠나서 버리고 와야하는 걸까?

20년전 연인의 죽음 소식을 듣고 그와 가기로 했던 미얀마의 바간 지역으로 떠나는 연. 지키지 못한 약속과 부치지 못한 편지 속에서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떠난 그녀. 20년전 사랑했던 연인이 바간 지역의 한 절에 있는 불상에 감추어 두었다는 목걸이를 찾으러 왔지만 그 목걸이는 온데간데 없다.

그녀를 버리지 못해 가족을 버릴 결심까지 했던 그와 결국 함께 떠나지 못한 여행을 이렇게 혼자 오게 된 연.

5년간 사귄 약혼녀와 파혼을 하게 만든 그녀. 1년이 넘게 사귀었지만 아직도 버겁게 다가오는 그녀. 지적이고 냉철했던 약혼녀와는 결이 다른 그녀를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화해의 제스츄어로 떠나기로 한 바간 여행에

그녀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자신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그녀를 위해 약혼녀와의 파혼까지도 감행했던 명은 허탈감과 우울감을 접기 위해서 탑돌이와 절로 마음을 다스리지만 좀체 오지 않는 잠 때문에 불면의 밤을 보낸다.

이 소설은 미얀마의 바간 지역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20년전 사귀었던 연인의 죽음을 계기로 그와 헤어지게 된 장소인 바간을 찾아오는 한 50대의 여인 연과 화해하기로 한 장소에서 이별을 맞게 된 한 30대 남자 명의 이야기.

불교에서 탑의 의미가 도대체 뭘까? 탑돌이를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불교에서 얘기하는 윤회나 인연법이 떠올랐다.


삶은 비슷한 모습을 띈 채 다른 사람들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아이를 버리지 못해 힘들어하던 그를 도무지 볼 수 없어서 헤어짐을 고한 연이나 약혼녀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연인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명의 이야기가 마치 평행이론처럼 그려진다면 좀 억지스러운가?



이 책에서 기억에 남았던 부분 2가지.

명과 연 그리고 최와 희 커플이 함께 동반여행을 하는 장면에서 악어와 원숭이 이야기를 꺼내는 마부. 일종의 설화인데 원숭이하고 친하게 지냈던 남자 악어에게 원숭이를 죽이고 심장을 꺼내오라고 다그치는 여자 악어.

하지만 친구의 심장을 훔치려다 남자 악어는 우정을 잃게된다. 지독하게 연인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여자들의 모습.... 연인을 외롭게 했던 명의 얼굴과 남자 악어가 겹쳐보였다.

두번째는 미얀마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녀를 좀 더 잘 알게 되었다는 명. 비행기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그의 주름살은 굵고 깊었는데 삶에 찌들어가면서 생긴 보통 사람들의 주름과는 달랐다는 것이 명의 표현이다.

환상처럼 그에게 다가온 그 중년 남자와의 일종의 현시와도 같은 경험은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든다.

명은 그의 얼굴이 일반적인 중년의 얼굴과는 약간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외로움에 늙어간 자와 사람을 사랑해서 겪는 서글픔으로 늙어간 자는 얼굴의 주름과 표정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탑의 시간 중 160쪽

필사하고 싶은, 처연하고 아름다운 문구들로 가득한 이별 이야기 

[ 탑의 시간 ] 타로카드에는 [ 죽음 ] 카드가 있는데 시작은 반드시 끝이 나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면에서 연과 명의 여행은 일종의 [ 죽음 ] 카드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지...

탁탁 털어버린 마음 속에서 또다시 사랑의 새싹이 피어날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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