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교양 강의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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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수로서 파격적인 무대 퍼포먼스와 두 번의 입대로 인한 부정적 이미지와는 달리 두툼하고 후덕하게 생겼다고 최근 들어서 평가 받는 한 가수가 부른 노래가, 아니 노래라기보다는 퍼포먼스가 한 달여 만에 세계곳곳에서 큰 이슈를 만들어 낼 정도로 이제 지구는 적어도 인터넷상에서만큼은 같은 공간에 산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 같다.

그런 세상을 살면서도 인터넷 Google의 지도가 보여주는 지구의 곳곳에 그려져 있는 국가의 경계를 나타내는 선! YouTube를 통하여 같은 공간이라는 착각의 세상과 지도상의 선 하나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현실을 동시에 살고 있다.

그런 세상이 되면서 국가에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정권을 행하는 사람들과 세상과 더 많은 장사를 하고 싶어하는 집단은 지구화를 외치며 지구는 하나라고 선동한다.

 

지구는 자기들이 그렇게 주장하지 않아도 태양계에서 수십억 년 전부터 하나였고, 지구의 대륙이 지금처럼 형성되어 살아 온지도 2억년이나 지났는데 그 땅에 선을 그은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저 때나 지금이나 생물은 살고 있었는데 그 후에 대지가 지금까지 미세하게 움직이는 탓에 땅의

주인이 누구이던 관심 없는 다른 생물을 인류가 정복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마 집단 내에서 폐쇄성이 강한 주술사였거나, 집단의 불안을 단속하려는 누군가가 집단을 대표하면서 내 종족과 다른 종족을 구분 지운 폭력적인 권력자이거나, 그런 집단들의 모임이 많아져서 상호간의 교류를 통한 생활이 이루어질 때 내 종족과 타민족을 구분 지어 교류를 잉여자산의 수단으로 삼고자 했던 자본가들 아니었을까?

<초기 바빌로니아와 중국 문명 때부터 인간의 일은 몇 사람의 손에 집중된, 조직화된 권력에 의존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중략- 국가들 사이의 경계는 불평등을 보존, 심화시키고 있으며,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방해하고 있다.- 국가가 소멸하고 국가의 인위적인 규제와 방해가 사라진다면, 가장 큰 불안정을 겪게 될 나라는 어디일까? 이런 현상이 빨리 일어나면 날수록, 미국이 가장 먼저 변화를 맞게 될 것이다.

(James O’Donnell-마르크스가 옳았다. /위험한 생각들)>

 그랬거나 어쨌거나 이제는 본의 아니게라도 역사적으로 접촉과 교류가 많아 한 종족이 된 것 같은 유럽처럼 세상이 하나의 체계로 이루어지도록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이처럼 시간이 흐르며 변화를 거듭한, 지구에 사는 종 전체가 만들어낸 지구사가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아득한 행성에 사는 인간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여러 공동체에 따로 떨어져 살면서, 저마다의 예술과 기술, 종교와 정치체계, 재산 개념과 노동과 교환체계, 여러 세대를 부양하고 문화에 적응하도록 하는 제도를 키워왔다. 공동체는 저마다 역사가 있고 이 역사는 종종 외부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도 내부에서 꾸준히 성장했다. (중략) 그러나 다 알다시피, 현재 구름 덮개 아래에서 끊임없이 접촉하며 사는 사람들도 과거에는 서로 모르던 사이였다. (중략) 지구의 여러 공동체가 수 세기 동안 서로 떨어져 상대를 모르고 살 때도 지구사는 존재할 수 있을까? (중략)

 또 과학의 발달로 인해 훗날 인간의 모습은 지금처럼 피부색으로 구분 짓게 되는 세상에서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때의 인간의 모습은 심리학자 Victor Johnston이 자원자 수 천명의 도움을 받아 컴퓨터로 모의 진화과정을 거쳐  만든 형상’(인간 정신/Steven Pinker)처럼 하나의 비슷한 모습(모두가 매력적으로 생각하는)으로 될지도 모른단다

지난 몇 십 년처럼 계속해서 의학과 과학이 발달한다면 언젠가는 변화에 대하여 둔감해지는 시기(가령 지금처럼 성형이 지극히 당연한 인간 본연의 욕망이라는 식으로 미화한다면 언젠가는 그 성형의 범위가 신체의 전체부위로 늘어나듯이 과학의 발달과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유전자를 수정하는 시기가 된다고 할 때) 가 도래할 것이고 그때 우생학의 위험성에 대하여도 둔감해져 Designer baby가 당연한 부모들의 희망사항이 될지도 모르는 그 결과로 인류의 모습은 SF영화에서 외계인을 볼 때 느끼는 동일해 보이는 모습으로 진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술적 진화로 인한 것이건 학술적 발전으로 인한 결과이건 인류가 스스로 제3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시기가 온다면 그것으로써 인간의 지구화는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인본주의를 생각하지 않는 극단적으로 진보된 이념을 가지고 있는 과학자나 의학자의 경우

그런다고 인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달라질게 없다고 하며, 인간의 뇌에 칩을 심어 리모컨으로 움직이는(마치 영화 써로게이트(Surrogate/2009),’처럼 와이어드헤드(Wired Head)인간을 만드는 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미국에는 그런 신 인류(?)를 추종하는 단체(humanity+)도 있는 것으로 봐서는 다양성의 극단은 인간성의 종말을 예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어쩌면 그런 생각, 즉 인간의 모습이 뇌를 빼고는 모두 인공물인 사이보그로 바뀐다고 해서 자아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거나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근원은 그들의 종교에 의한 세계관 때문이 아닐까? ( 18:8~9, 12:24~25, 20:35~36). 문자로서가-“종교문서자체에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문서는 그것을 추앙하고, 숭배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는 신자들이 의미를 부여할 뿐이다. 신자가 없다면 경전은 의미 없는 하찮은 문서일 뿐이다.”(종교문맹 극복하기/Ali S. Asani/하버드 교양강의)-아닌 다른 의미로서 내가 이해하는 편은 개념으로 말하는 것 같은데 형태로써 이해한다면 영혼이 들어있다는 데카르트의 송과선만 남아있다면 모두 인간으로 보아도 무관하다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세상에는 그렇게 정치적 목적과 경제적 이유로 지구화를 외치는 사람들도 있고

정치적 욕망에 의하여 강제로 제국에 포함되었던 민족의 독립을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언젠가는 세상이 인터넷에서 벗어나 현실에서도 동일한 공간으로 살아가게 되는 현실이 오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반경이 지구라는 행성을 벗어나는 경우가 오기 전까지는, 어느 장소에서건 일정한 범위에 속한 사람들끼리는 같은 관습과 인습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지구사가 있다고 주장하려면 우리는 공동체라는 생각을 공유해야 할까? 아니면 지구에 사는 여러 민족의 개별 역사를 하나하나 연구하고 기록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중략) 가장 최근에는 지구화라 부르는 긴장된 경제, 문화, 사회 교류가 증명하듯, 국가 공동체 가운데 주변 국가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자국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나라는 한 곳도 없다. 우리 문화가 조만간 하나의 세계문화로 녹아 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비와 일의 형태가 비슷해지더라도 다양성의 많은 요소는 계속 유지될게 분명하다.

 (지구화 시대의 지구사)

 그렇다면 지구화-Global’이라는 말은 특정 세력이 인류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과거 수만 년 전에 선을 그어서 자유로움을 강제한 것처럼 이제는 개인의 행동을 그들의 욕망에 의하여 움직여지도록 문화나 종교를 이용하여 선동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어느 장소에 살고 있는 집단은 그들만의 전통이랄 수 있는 고유문화가 있을 텐데 그 전통은 좁아지는 인류의 생활로 인해 지구화라는 이름으로 자연적인 흐름이던 인위적인 개입으로서든 변화를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할 때, 시간이 지나면 환경에 의하여 변화한다고 하여 전통이 아니라고 한다고 하여도 집단무의식심리에 의한 욕구의 표현을 통해 관습으로 나타나는 문화적 현상은 보존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보존이 아니라 그냥 사라지든지 말든지 무관심 속에 놔둬야 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는 여러 현실적 상황변화에 의한 국제정치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이유로도

우리의 민족문화는 보존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잊혀진, 또는 사라져가고 있는 문화를 살려내야 한다고 본다. 일본에 이은 중국의 경제대국화는 앞으로도 한참 지속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속에서 우리나라가 MIST수준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에서 경제적으로 중국과 맞먹는 수준이 된다 하더라도 중국이 우리보다 위에 있는 수준이 지속된다면 그들의 소위동북공정은 지속발전 될 것이라고 생각되며 그것을 막으려면 자본이 아닌 문화로 지울 수 없는, 어느 한 문화에 속해질 수 없는 독자적 문화가 세계 속에서 인정 받아 전쟁이 나더라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마치 세계 대전 속에서도 보존되어온 에펠 탑이나 콜로세움처럼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미국이 언젠가처럼 선을 그어 일본으로 후퇴한다거나 중국이 돈으로 세계를 매수하여 경계선을 수정한다고 하여도 문화적 자산은 남을 것 아닐까?

2006년에 100 민족화상징을 발표했는데 그 상징들이 우리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순수성 있는 민족의식만으로, 즉 정치색을 배제한 전통문화로, 대표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숫자적으로 100개를 맞추려는 강박심리에 의한 것 같은, 억지스러워 보이는 여러 상징들 중에서도 오일장, 두레, 강릉단오제, , 미륵, , 농악, 아리랑 등의 무형문화 가치가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형태가 있는 것은 빼앗길 수도 있으나 형태 없이 민족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문화는 민족의 모습이, 현실이, 상황이 바뀐다고 하여도 수 천 년이 지나도록 보존되어 온 것처럼 남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문화는 시대가 한참 지났어도 어느 때 저절로 이어지는 그래서 누가 돌보지 않아도 저절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세태를 만드는 것을 과거에 집착하는 편협성을 가진 생각이라고, 미래를 생각하는 진취적인 생각이 아니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그 역시 서양의 종교적 전통주의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흥준교수가 전통이란 한 나라의 고유문화가 아니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만들어진다고 하며 우리 것만을 고집하는 것은 옳은 보존방식이 아니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문화의 물리적 형태에 더 많은 비중을 둔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어느 시대이든 그 문화가 보여지는 현실은 과거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할 때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정신은 주변국이나 타 공간과의 교류에서가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것 아닐까?

 

가령 유럽 문화의 상징이 전쟁 통에도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부산스럽게 변하기는 했어도 그리스의 정신과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같은 정신문화를 공유해온 결과로 인한 것 아닐까 한다. 2001년도에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 세력이 수천 년 동안 보존 되어온 바미안의 타종교문화를 파괴한 것은

그들이 수 차례의 중동전쟁으로 인해 자신들의 문화를 이교도로부터 보존하려면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는 피해의식이 깊어져 타 문명과 교류하지 않으려 했기에 폐쇄성이 깊어졌기 때문에 정신문화적 아이덴티티가 고립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그들 이슬람의 조상들은 지금의 그들과 달리 타 문화나 종교도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무슬림(복종하는 사람)이고, 이슬람(복종하는 개인적 행위)이라고 했다는데 그들이 그렇게 세계에서 스스로 고립되고자 한 것과 같은 결과가 된 것은 과학의 발달에 따른 세상의 교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근본주의, 문자주의에 물들어 있어서 그랬던 것 아닐까 한다.

이를 테면 코란은 무함마드보다 먼저 계시를 받은 예언자들이 있었다고 단언하면서, 특히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가리켜 책의 사람들이라 했다. -중략- 이 같은 관용은 나중에 스페인 아랍왕조, 북아프리카 파티마 왕조, 중동 오스만 재국의 정치에도 나타나,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 개인과 집단에게도 자치를 최대한 인정했다. 인도 무굴 제국의 악바르Akbar, 1542~1605 황제는 당시 종교우익에게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인도의 여러 종교 전통에 관용을 베풀면서, 그 곳 무슬림 전통대로 힌두교도와 불교도까지 책의 사람들범주에 포함시켰다.-중략- 비로서 평화중재자였던 당시 동료가 사용한 무슬림이란 말은 그때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단어와는 다른 뜻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파티마(이슬람교)는 엘리자베스(기독교)를 하나의 공동된 신에 복종하는 동료로 생각했고, 그래서 기독교 신자인 그녀를 영적 동료로 한껏 포용한 것이다.

(하버드 교양강의 종교문맹 극복하기. 274~275)

 하지만 그들이 바미안의 이교도 상징물을 파괴했다고 해서 그 상징이 보유한 정신은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처럼 무형의 문화를 보존하고 전통으로 계승시켜야 한다고 본다. 유흥준 교수의 답사기중에서 서양의 철학자의 한국 방문에 우리나라의 학자들이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을 두고 그 논쟁의 당사자인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가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한국 사회에는 불교가 갖고 있는 도덕적 순수성과 유교가 지닌 공동체 지향적 윤리의 전통이 있습니다. 이것을 결합시킨다면 한국사회는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 학자들은 왜 이런 것에 대해 좀더 깊이 있고 진지한 연구 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하버마스를 연구하고)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 66p)

우리 역사의 어느 부분에서 외래의 문명이 무조건 좋다는 식으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긴 하지만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는 이유 외에 정신문화를 지켜야 하는 학자나 교육을 담당하는 자들의 선비문화’(민족문화 상징의 79번째)가 누군가 또는 어떤 강압적 세력에 의해서 지워져 버렸기 때문 아닐까 한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선비로서 관직에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관직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관직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펴고 신념을 실현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관직에 나가면 상관을 받들어야 하고 더구나 가장 높은 권위인 임금을 섬겼다.그리고 아래로 백성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을 졌다.

선비는 임금과 신하라는 관계에서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을 바치지는 않았다. 선비는 임금과의 사이에서 의리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의리가 없으면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이 도리였다. 바로 여기에 선비로서 관직에 나간 경우와 직업인으로서 나간 경우의 차이가 드러난다.

, 선비는 관직에 나가서도 그 직책의 성격과 임금의 역할에 대해서 언제나 성찰하며, 임금의 잘못이 있으면 간언하여 잘못을 바로 잡으려 하고, 바른 도리가 실현될 가능성이 없거나 맡은 바 직책이 도리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물러났다.)

 

펼친 부분 접기 ▲

몇 년 전에 어떤 사람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고 그 책을 그 저자와 같은 심정을 이해한다는 생각으로 제목만 보고 사서 읽은 적이 있는데, 내용은 거대한 학자를 대하는 논리적인 자세가 좀 많이 부족했던 책이라고 기억한다. 그런데 그런 책이 그 시절에 출판되었다는 것은 사회가 그런 생각에 동조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한다.

그가 바란 것은 어차피 자본주의의 이념에 속해 있는 상황에서 어느 강대국의 힘에 의하여 국가의 존립을 기대야 한다면 그런 케케묵은 유교적 이념은 버려 버리고 강대국의 속국을 넘어 강대국으로의 편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은 생각들은 하버마스가 모르겠다고 한 이유중의 하나라고 생각되는데 우리 민족의 전통이랄 수 있는 그 심성을 철학이라는 표상으로 논의하는 것은 그나마 긍정적으로 보고 그것을 심성에서 꺼내서 제자리를 찾아 주고자 논의하는 것은 종교적인 가면을 둘러쓴 제국주의자들과의 부정적 투쟁 심을 피하고자 해서 아닐까 한다. 마치 술자리에서 종교이야기와 정치, 군대이야기를 하면 싸움이 나기 때문에 피하려고 한다는 속설처럼 말이다.

 

한때 전통을 주장하면 그것은 서양을 반대한다는 의미로 생각해서 공산주의자라고 몰아세우는 어떤 시기를 너무 길게 지내왔고, 지금의 현실로도 그와 같은 표상이 존재하고 있기에 마음껏 논의하지 못해서 더 움츠러드는 우리의 전통문화 현실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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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상징 - 주술적-종교적 상징체계에 관한 시론 까치글방 137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이재실 옮김 / 까치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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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런저런 행동을 매일매일 하게 되고

그 행동의 결과로 무언가가 만들어지거나 파괴되기도 하는데 그 결과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고

자신이 만족하는 보상을 받을 때까지 행동을 수정 보완하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을 학자들은 학자의 방법대로 기술자는 기술자의 방법대로 정의하게 되는 것이 학설이고

이론이며 도그마로 발전되고 법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은 수 천년 동안의 순환 과정이 신화를 만들어내고 철학을 만들고 과학으로 발전하여

인류의 생활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하겠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간의 어떤 차이가 전쟁을 만들어 내기도 했을 것이다.

어떤 차이란 생각의 차이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그들이 처했던 동 시간대의 다른 공간에서 발생하는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식이전에 무언가 있다면 그것은 의지일까? 아니면 본능일까?

본능이라고 하더라도, 아니면 의지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결론은 그런 행위로 인하여 경험을 얻었을 것이고 그 경험은 인식을 만들어내며,

그 인식은 의지를 만들어내는 순환의 결과가 역사라는 것 아닐까?

태초에 있었던 것은 logos 이거나 이거나 관계없이 행위를 이루어 낸 것이고

그 행위가 경험을 주었고

그 경험은 개념을 탄생시켰으며 개념은 종족간의 상징과 이미지를 만들어 낸 그런 것 이라고 생각된다.

 인류라는 종이 두각을 나타내는 한 가지 지적 능력은 정의하기 어려운 상상력이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미지의 다른 어떤 능력에 힘입어 우리가 그 순간의 격변을 배제해 버리기 때문에, 상상력은 실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지도 모른다. 스티브 미센은, 인간이 대상을 타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을 진화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사물. 사람. 사건 사이의 관념 연합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 .. .. 다시 말해 관념 연합을 형성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우리는 대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의미란, 내 식으로 말해, 사람과 사물, 기타 모든 것을 경험의 견지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이 많을수록 더 많은 의미를 인식할 수 있다.

즈레인스토리 9장 가장 뛰어난 뇌의 조건

 그런데 그 근원인 생각한다는 것은 어디서 이루어지는 것인 것?

심장인가 뇌인가?

런 질문은 오래 전에 사라진 질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심리 깊은 곳에서는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느 곳에서 인간의 본원이 시작되는가가 해부학적으로는 결론이 났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그 어딘가에 다른 의미로 숨겨져 있기를 원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사람의 심장이 정지되면 뇌로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5분안에 뇌는 활동을 정지하고,

심장을 다시 살린다고 하더라도 PVS(persistent vegetative state)상태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명은 심장에 있는 것일까?

그런데 심장은 움직이고 신체의 기능은 정지상태가 아니라도 인지능력이 없고 인식불가능 상태라면

생명이 뇌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꼭 어느 한곳으로 정해야만 한다는 그 강박 증 같은 개념자체가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주입식 교육의 폐해일까?

문제는 생명이 어느 곳에 있는가가 아니라 그 생명이 무엇을 상상하고 실천하는가 아닐까?

상징을 사용하는 이런 능력, 나아가 바로 옆에 있는 대상도 상징적 어휘로 표현 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특성인 것 같다. 다른 영장류나 유아들도 막연한 지능을 사용해

조어(proto-language)라고 하는 것으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지만 두 살이 지나면 오직 인간만이

시각적 단서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복잡한 문장을 조립해낼 수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생리학자

William Calvin은 우리가 이렇게 문장을 조립해 내는 능력을 바탕으로 무한한 개념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고 창안해 낼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이야기 한다. 첫째, 우리는 사물을

다른 사물의 상징으로 본다. 둘째, 우리는 은유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브레인스토리 10장 말하는 뇌

상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사유화가 시작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사유화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은 욕망이 본능을 넘어선 것이라는 증거일 테고……

 

상징적 사고는 아이들, 시인, 정신착란 증 환자만의 독점적 영역이 아니다.

상징적 사고는 인간 존재와 공존하며, 언어와 추론적 이성에 선행한다.

상징은 다른 인식 수단으로는 전혀 포착할 수 없는 현실의 어떤 심오한 양상들을 밝혀준다.

이미지, 상징, 신화는 마음이 아무렇게나 만들어 놓은 창조물이 아니다.

이것들은 어떤 필요성에 응하고 있으며, 어떤 기능을 다하고 있다.

그 기능은 존재의 가장 내밀한 양상을 숨김없이 드러내주는 데 있다.

따라서, 이미지, 상징, 신화에 대한 연구는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여러 조건과 아직 타협하지 않은

생긴 그대로의 인간을 한층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역사적 존재는 모두 역사 이전 인류의 많은 부분을 자신 속에 품고 있다.

이점은 실증주의가 한창 혹심하던 시기에도 사람들이 결코 잊은 적이 없는 사실이다.

인간은 그 형제인 동물과 똑같이 본능에 의해서 규정되고 지배 받는 동물이라는 것을

실증주의자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

이미지와 상징: 서문/ Mircea Eliade

 이와 같은 입장에서 역사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되는 칸트로부터 최근의 역사주의적, 실존주의적 철학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실현된 사변의 진보를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적, 구체적, 본원적 존재로서 인간은 상황속에 있다. 인간의 진정한 실존은 역사 속에서, 시간 속에서, 아버지의 시대가 아닌 자신의 시대 속에서 실현된다. 또한 그것은 다른 대륙, 다른 나라에 사는 동시대인들의 시간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 일반의 행동을 어떻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인간 일반이란 추상일 따름이다. 그것은 우리 언어의 불완전성에서 오는 오해 때문에 존재한다.

이미지와 상징 제 1중심의 상징

 미국의 철학자 존 설이 지적한 것처럼, 현재의 의식 상태를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것과 의식이

전혀 없는 것 사이에는 분명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설의 말을 들어보자맹시 연구는 정말이지

매혹적이다. 그러나 나는 맹시 연구만으로 의식의 문제를 풀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정상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과 맹시인 사람의 차이점을 검토함으로써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맹시 연구는 언제나 의식이 있는 피험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맹시를 드러내는 사람은 이미 의식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의식하는 뇌와 의식이 없는 뇌의 차이가 무엇 인가이다

285p 11장 의식의 수수께끼

 

요즘 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Incognito”와 같이 그 동안의 생각들이 부질 없는 것 아닐까라고

 의심하게 만들어 버린 것 같다.

수 많은 철학자들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의식하는 뇌와 의식이 없는 뇌의 차이가 무엇 인가이다라는

질문으로 바뀌게 된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 한다는 사고에서 드디어 자유를 맞게 되는 의식의 전환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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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 스토리 - 뇌는 어떻게 감정과 의식을 만들어낼까?
수전 그린필드 지음, 정병선 옮김, 김종성 감수 / 지호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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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런저런 행동을 매일매일 하게 되고 그 행동의 결과로 무언가가 만들어지거나 파괴되기도 하는데 그 결과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고 자신이 만족하는 보상을 받을 때까지 행동을 수정 보완하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을 학자들은 학자의 방법대로 기술자는 기술자의 방법대로 정의하게 되는 것이 학설이고 이론이며 도그마로 발전되고 법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은 수 천년 동안의 순환 과정이 신화를 만들어내고 철학을 만들고 과학으로 발전하여 인류의 생활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하겠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간의 어떤 차이가 전쟁을 만들어 내기도 했을 것이다. 어떤 차이란 생각의 차이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그들이 처했던 동 시간대의 다른 공간에서 발생하는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식이전에 무언가 있다면 그것은 의지일까? 아니면 본능일까?

본능이라고 하더라도 아니면 의지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결론은 그런 행위로 인하여 경험을 얻었을 것이고 그 경험은 인식을 만들어내며 그 인식은 의지를 만들어내는 순환의 결과가 역사라는 것 아닐까? 태초에 있었던 것은 logos 이거나 이거나 관계없이 행위를 이루어 낸 것이고 그 행위가 경험을 주었고 그 경험은 개념을 탄생시켰으며 개념은 종족간의 상징과 이미지를 만들어 낸 그런 것 이라고 생각된다.

인류라는 종이 두각을 나타내는 한 가지 지적 능력은 정의하기 어려운 상상력이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미지의 다른 어떤 능력에 힘입어 우리가 그 순간의 격변을 배제해 버리기 때문에, 상상력은 실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지도 모른다. 스티브 미센은, 인간이 대상을 타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을 진화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사물. 사람. 사건 사이의 관념 연합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 .. .. 다시 말해 관념 연합을 형성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우리는 대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의미란, 내 식으로 말해, 사람과 사물, 기타 모든 것을 경험의 견지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이 많을수록 더 많은 의미를 인식할 수 있다.

248p 9장 가장 뛰어난 뇌의 조건

그런데 그 근원인 생각한다는 것은 어디서 이루어지는 것인 것? 심장인가 뇌인가? 이런 질문은 오래 전에 사라진 질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심리 깊은 곳에서는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느 곳에서 인간의 본원이 시작되는가가 해부학적으로는 결론이 났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그 어딘가에 다른 의미로 숨겨져 있기를 원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사람의 심장이 정지되면 뇌로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5분안에 뇌는 활동을 정지하고, 심장을 다시 살린다고 하더라도 PVS(persistent vegetative state)상태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명은 심장에 있는 것일까? 그런데 심장은 움직이고 신체의 기능은 정지상태가 아니라도 인지능력이 없고 인식불가능 상태라면 생명이 뇌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꼭 어느 한곳으로 정해야만 한다는 그 강박 증 같은 개념자체가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주입식 교육의 폐해일까?

문제는 생명이 어느 곳에 있는가가 아니라 그 생명이 무엇을 상상하고 실천하는가 아닐까?

 

상징을 사용하는 이런 능력, 나아가 바로 옆에 있는 대상도 상징적 어휘로 표현 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특성인 것 같다. 다른 영장류나 유아들도 막연한 지능을 사용해 조어(proto-language)라고 하는 것으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지만 두 살이 지나면 오직 인간만이 시각적 단서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복잡한 문장을 조립해낼 수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생리학자 William Calvin은 우리가 이렇게 문장을 조립해 내는 능력을 바탕으로 무한한 개념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고 창안해 낼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이야기 한다. 첫째, 우리는 사물을 다른 사물의 상징으로 본다. 둘째, 우리는 은유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264p 10장 말하는 뇌

 

상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사유화가 시작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사유화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은 욕망이 본능을 넘어선 것이라는 증거일 테고……

상징적 사고는 아이들, 시인, 정신착란 증 환자만의 독점적 영역이 아니다. 상징적 사고는 인간 존재와 공존하며, 언어와 추론적 이성에 선행한다. 상징은 다른 인식 수단으로는 전혀 포착할 수 없는 현실의 어떤 심오한 양상들을 밝혀준다. 이미지, 상징, 신화는 마음이 아무렇게나 만들어 놓은 창조물이 아니다. 이것들은 어떤 필요성에 응하고 있으며, 어떤 기능을 다하고 있다. 그 기능은 존재의 가장 내밀한 양상을 숨김없이 드러내주는 데 있다. 따라서, 이미지, 상징, 신화에 대한 연구는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여러 조건과 아직 타협하지 않은 생긴 그대로의 인간을 한층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역사적 존재는 모두 역사 이전 인류의 많은 부분을 자신 속에 품고 있다.

이점은 실증주의가 한창 혹심하던 시기에도 사람들이 결코 잊은 적이 없는 사실이다. 인간은 그 형제인 동물과 똑같이 본능에 의해서 규정되고 지배 받는 동물이라는 것을 실증주의자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서문. 이미지와 상징 Mircea Eliade

 

이와 같은 입장에서 역사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되는 칸트로부터 최근의 역사주의적, 실존주의적 철학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실현된 사변의 진보를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적, 구체적, 본원적 존재로서 인간은 상황속에 있다. 인간의 진정한 실존은 역사 속에서, 시간 속에서, 아버지의 시대가 아닌 자신의 시대 속에서 실현된다. 또한 그것은 다른 대륙, 다른 나라에 사는 동시대인들의 시간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 일반의 행동을 어떻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인간 일반이란 추상일 따름이다. 그것은 우리 언어의 불완전성에서 오는 오해 때문에 존재한다.

  1중심의 상징

 미국의 철학자 존 설이 지적한 것처럼, 현재의 의식 상태를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것과 의식이 전혀 없는 것 사이에는 분명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설의 말을 들어보자맹시 연구는 정말이지 매혹적이다. 그러나 나는 맹시 연구만으로 의식의 문제를 풀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정상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과 맹시인 사람의 차이점을 검토함으로써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맹시 연구는 언제나 의식이 있는 피험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맹시를 드러내는 사람은 이미 의식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의식하는 뇌와 의식이 없는 뇌의 차이가 무엇 인가이다

285p 11장 의식의 수수께끼

 요즘 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Incognito”와 같이 그 동안의 생각들이 부질 없는 것 아닐까라고 의심하게 만들어 버린 것 같다. 수 많은 철학자들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의식하는 뇌와 의식이 없는 뇌의 차이가 무엇 인가이다라는 질문으로 바뀌게 된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 한다는 사고에서 드디어 자유를 맞게 되는 의식의 전환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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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과 유물론 - 인간의마음을탐구하는총서 6
E.프롬 지음 / 선영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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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나라가 넓고 좁고를 논할 필요도 없이 그야말로 하나의 문화적 공간에 갇혀 있는 섬나라라고 할만 하겠다. (육지를 이용하여 나라를 벗어날 방법은 없으니 물리적공간 역시 섬이라 해도……)특히 매스컴이나 공공의 방면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의 면면들을 보면 도대체 특색, 개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요즘에는 기업이 정부의 Demagogy에 찬 프로파간다를 따라 하는 것이 유행인지 예전처럼 기업의 주 생산품을 홍보하는 것이 아니고 기업의 이미지, 그것도 소비자 측의 이미지가 아닌 기업주가 요구하는 이미지를 광고(C. I. ad)의 주제로 하는 것이 유행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광고들을 보면 뭔 소리를 하는 것인지,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인지, 그런 카피문구들이 자신들이 만드는 생산품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그 미사여구로 도배된 문구가 실업자들을 얼마나 구제하고 비 정규직을 얼마나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야근에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아픔을 얼마나 공유하고 있는 것인지 하나도 알려주지도, 알 수 있도록 힌트도 주지 않는다.

쥐꼬리만한 봉급이라도 받으려고 눈치 보는 비 정규직이나, 취직의 가능성에 목을 메 달고 대가는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며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수습 인턴들이 흘린 땀과 눈물. 그럼에도 산업재해를 인정 받지 못하는, 그들로부터 착취한 광고비로 그런 환상 같은 그림과 꿈꾸는 듯한 문구로 도배하는 기업이미지 광고와 정부가 주관하는 광고..

 

그 기업들은 복지국가로 만들려면 세금을 더 내고 고용을 늘리라는 시민단체의 목소리에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 결국 우리는 아직 선진국은커녕 중진국도 아니라는 것이며 국민소득이 몇 만 달러이니 하는 것도 다 거품이라는 말 아닌가? 소외된 층에게 소득을 분배하는 것에 반대할 정도로 돈을 쓸 수 없다면 그 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마치 버는 수입이 다 내 것인 양 흥청망청하도록 시민에게 환상을 보여주는 선동가(프로파간다)들의 나라가 결국 우리나라란 말인가?

고통을 잊으라고 상처에 마약을 뿌려주며 환각상태를 유지하도록 미사여구와 환상적인 그림으로 눈을 가리고자 하는 광고들로 시민의 눈과 귀를 덮어버리는 자본가와 정부.

 

참 짜증나는 요즘의 광고 중 몇 가지를 보면 그게 과연 기업주의 생각으로만 이루어진 것인지. 기업주의 눈에 들어 몇 번의 광고를 더 얻으려고 자신의 문학적, 미적 능력을 과시하는 광고업자의 알 수는 없지만 정말 기가 막히게 된다.

그 광고는 항상 예측 가능한 인간”(두산)이 훌륭한 인간이라고 하는 광고랑, 중국의 미래가 밝은 것은 아이가 2억 명이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광고이다.

첫 번째의 광고에서 모범생의 표준인 듯해 보이는 예측 가능한 인간이 사측에서 원하는 노예일지는 모르겠으나 교육에서 또는 미래지향적인 사회에서 요구하는 창조적이며 진취적인 인간은 아니라고 보인다. 오늘날 인류가 하나의 시공으로 가까워지게 된 동기인 인간의 사회. 과학적 발달은 예측 가능한 인간이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기성적 틀에 반하여 창조 진보적 사고로 획기적이면서도 발전적 행동을 해온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정신분석과 유물론

조직인은 그가 복종하고 있는 대상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는 다만 합리적이고 실제적인 것에 따를 뿐이라고 믿고 있다. 사실상조직인들의 사회에서는 불복종이란 것이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든 간에 거의 사멸되어 버렸다. 그러나 불복할 수 있는 복종의 능력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덕목임을 기억해야 한다. 히브리 및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역사는 불복종이라는 행위와 더불어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하…...

(제2부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 10장 몇 가지 연관된 개념들)

기업도 그런 틀에 박힌 인간을 얻어서 무엇을 얻어낼 수가 있을 것인가? 조그만 음식점에서도 발상의 전환을 따지고 있는데 말이다. 아마 상사의 말에 토 달지 않고 시키는 것만 열심히 해대는 기계를 만들어낼지는 모르겠다.

 

두 번째는 아주 기회주의적인 냄새가 풀풀 난다. 얼마 전까지도 아니 지금도 국방색의 컨테이너나 변두리의 거리에는 미국을 싫어하는 사람은 빨갱이라고 몰아세우는 의미의 플랜카드가 휘날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미국이 아니었으면 한반도자체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부산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의 나라는 싫어하면서 미국에게 당한 같은 방식으로 1. 4후퇴라는 치욕의 동기를 준 중국에 대하여는 이중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같은, 마치 그 동안의 미국바라기를 버리고 잘나가는 중국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는 듯한 그 카피. 우리도 중국처럼 2억 명의 아이를 낳자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13억의 2억에 맞춘 5천만의 1천만 아이를 만들자는 것인지 참 짜증이다.

우리 땅이 중국의 20%의 크기만큼이나 되던가? 중국 면적 9,596,961: 우리 면적 99,720

100분의 1정도에 불과한 면적에 인구를 늘려야 한다는 발상을 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극단적인 생각이겠지만 그런 자들의 생각을 유추해 본다면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워줄 사람의 수가 늘지 않고 기존의 인간들에게는 더 뺏어갈 자본이 없으므로 새로운 손님과 노예를 만들어내라고 하는 중세 유럽의 악덕 영주를 생각하게 한다. 아무리 성장위주의 정책이 살아남기 위함이라고 하여도 지금 이런 역사적 시간 속에서 인간의 수로 뭔가를 만들어 낸다는 생각은 얼마나 과거 지향적인가? 예컨대 영국은 바다 건너니 놔 두고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사이에 끼어 있는 조그만 나라.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처럼. 벨기에나 룩셈부르크처럼 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 나라처럼 된다면 국가의 위상이 적어진다고 할 것인가? 그들 나라보다 더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고 민족적 능력도 뒤지지 않는 문화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말이다.

지금도 사회 속에서, 정치적으로 소외 당하는 국민이 많은 우리나라임에 인구의 수가 늘어나면 계층간의 위화감은 그만두고라도, 비 정규직이나 수습 인턴 등의 현대적 노예 해방은 그만두고라도, 대중 속에서 자리잡지 못하는 소외된 군상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늦은 독서 탓에 시대를 거꾸로 인식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책방의 신간코너에 가보면 내가 읽고 있는 책들에 대한 내용을 재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뭐 그다지 거꾸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될 것 같다고 혼자 생각해 본다.

책의 내용은 20여 년 전의 시대상을 말하며 그 시절의 관점으로 미래를 말하고 있는데 그 예측을 지금 관점으로 본다고 해서 틀렸다고 하기에는 너무 억지스럽다고 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소외된 사회에서 인간의 욕구가 어떻게 타락하며 진정함 약점이 되는가 하는 것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보고 있듯이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새로운 욕구를 불러 일으키고 그로 하여금 새로운 희생물이 될 것을 강요하며, 새로운 종속자가 되게 하고서 새로운 쾌락에 빠지도록 유혹하고 마침내는 경제적 파멸로 유도하는 것이다.’ <경제적, 철학적 소고>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에 대한 만족을 찾기 위해 소외의 힘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도록 시도하게 된다. 따라서 대상물의 양이 늘어가면 인간이 예속되는 소외되는 실체의 영역도 증가한다. 모든 새로운 생산물은 서로 속이고 약탈할 수 있는 새로운 잠재력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점점 더 빈곤해진다. 인간은 적대적인 존재를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게 된다. 돈의 위력은 생산량의 증가에 따라 줄어든다. 따라서 돈에 대한 욕구도 돈의 힘이 증가함에 따라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돈에 대한 욕구는 현대 경제에 의해서 창조된 진정한 욕구이며, 현대경제가 만들어 내는 유일한 욕구이기도 하다. 화폐의 양도 점차적으로 그 유일한 중요 특성이 된다. 돈의 모든 실체를 추상적 개념으로 몰아넣는 것과 마찬가지로, 돈은 개발되는 과정에서 자기 스스로를 양적인 실제로 몰아넣는다. 과잉상태나 무절제가 돈에 대한 진정한 표준이 되고 만다. 이런 사실은 주관적으로 나타난다. 즉 생산과 욕구의 확대가 재주를 부리게 되고 비인간적인 것에 타산적으로 추종하게 되며, 타락하고 부자연스럽게 되고 공상적인 욕구에 빠지게 된다. 사유재산은 본래의 욕구를 인간적인 욕구로 변화시킬 줄 모른다.

사유재산의 이상주의는 환상이요, 변덕스러움이요, 공상에 불과하다. 전제군주의 사랑을 받기 위해 내시는 비열하게 아첨을 하거나 군주의 지나친 성욕을 자극하기 이해, 또는 호감을 사기 위해 파렴치한 수단을 추구하게 된다. 이런 것은 산업의 내시라 할 수 있는 기업가들이 자기의 절친한 이웃사람의 돈지갑으로부터 몇 푼의 은화나 금화를 얻기 위해 행위만도 못하다.

 

< 2부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 5장 병적인 개인과 병적인 사회>

 

이 글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과연 요즘의 시대상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구 공산주의체제가 베를린의 장벽과 같이 무너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 공산주의와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했던 사회주의는 다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말 많은 종북 세력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어줍잖게 흉내 내고자 하는 그것과도 다르다고 생각되는 그 이념은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학자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관료적이고 권위적인 억압의 체제로 변한 탓에 실패한 것이지 이 책에서 바라는 것 같은 휴머니즘적 사회주의는 북구의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아직 실현해보지도 못한 것 아닐까?

 

예를 들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발전에 다라 대중의 빈곤이 증대한다고 예상했을 때, 그는 매우 특수한 사실을 지적한 데 불과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논파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대신 만약 그가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의 증대와 불안감의 증대 및 불합리성을 예견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일까? 그의 예언은 사소한 점에서는 몇 가지 잘못을 범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원칙적으로는 실현되었다고 하는 유력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 1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제5장 이론의 적용 >

 

잘은 모르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인류의 공통 선()이라고 하며(J.S. 플라톤과 유사한 입장에서 “행위에 있어서 올바름의 기준이 되는 것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계하는 만인의 행복이다”라고 말했다. 그 이념이 자본주의와 관련 있는 개념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방법상의 문제라는 것 아닐까?

 

사회주의는 정신분석이론보다 훨씬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이론의 반대자나 적에 의해서도 결코 파괴된 일이 없었다. 이 세상에는 마르크스 사회주의를 표명하고 개선하려고 하는 급진적인 휴머니즘적 사회주의자들이 있어서 이들이 소련의 공산주의자들과도 판이한 휴머니즘적 사회주의를 성장 발전시키는데 애쓰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정신을 부르짖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는 아직도 미약하고 고립되어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만일 인류가 핵전쟁이라는 최고의 광기를 피하고자 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국제 사회주의자 운동이 동서양의 휴머니즘의 원리화 약속을 실현시켜 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줄 수도 있다.

 

<2부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 제9장 두 가지 이론의 숙명 >

 

그것은 인간을 물건을 위해서 사용하기보다는 인간을 위해서 새로운 기술력을 사용하는 새로운 서구사회의 출현, 즉 휴머니즘의 부흥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의 해방을 위한 기준이 맹목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경제적 이해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적. 정치적 과정보다는 경제를 지배하는 새로운 사회이다.

 

<2부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 제10장 몇 가지 연관된 개념들>

 

요즘 대선을 앞에 두고 이벤트가 만연하는 정치 쇼의 장에서 투표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 나는 말로만 통합을 외치며 실제로는 자신들의 입장에 서길 바라는 자들만의 통합을 바라는 프로파간다에 대하여 지금의 정권이 과거의 정권보다 더 나빠졌다고 보는 편이다.

그런 이유로는 과거 당시에는 정치적 선전이나 이념에 관심을 두고 살기보다는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의 정부들은 권력을 사유화하고 계급으로, 친분으로, 경력으로 나눠먹는 시기였기에 좌우에 대한 개념이 노골적이어서 지금처럼 대립이 표면화되던 적은 별로 없었다고 보는 면도 있다.

그런데 요즘의 정치적, 정책적 홍보의 방향이나 설정은 감성을 부추겨서 상대를 이성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며 동 시간대의 같은 공간에 함께하기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이렇게 되는 이유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기득권 자들이나 자본가들이 지향하는 인식이 종교적 자본주의에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만의 특색이 세계화될 수도 있음이 아니라 강대국과 동일화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매스미디어를 이용하는 정치 선전이라는 것이 아전인수격의 통계적용과 가장 허무맹랑한 공약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서 대중은 어차피 거짓말이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으므로 꿈이라도 크게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의 거짓말에 부화뇌동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시대를 거스르는 강대국의 종교적 색채를 기본으로 편협적인 가르기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말로는 평등을 외치면서 모두가 1등이 되라고 외치는 광고.

돈 많은 원조 국이 되어 나라의 위상은 커졌다고 하면서 보편적 복지에 대하여는 시기상조라고 하는 광고.

집 없는 서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부동산 가격 안정을 말하면서 투기지역을 해제한다는 광고.

바쁜 세상살이에 그런 광고에 누가 귀를 기울이나 할지 몰라도 대답 없는 메아리는 자신들의 목소리가 천상의 제일인줄 아는 자들을 만들고 그들은 그렇게 계속하여 성벽을 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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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체험판)
크리스 임피 지음, 박병철 옮김 / 시공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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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주 어렸을 적의 기억을 망각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럴 경우 어느 정도의 과거까지를 기억해낼 수 있을까? 간혹 3~4살 정도의 기억이라고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은 있지만

그 내용의 진위여부를 알 수 없으니 정말로 기억하는 것인지, 본인의 상상인지, 스스로 편집한 각색 물인지는 모를 일이다.기억의 양에만 한정을 두지 않고 질적인 면에서도 단편적인 기억이 아니라 구체적이면서도 광범위한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면 견딜 수 있을까?

 

나의 경우에는 책을 2~3페이지만 넘겨도 아니 한 쪽에서 아랫부분을 읽을 때 윗부분의 구절이 생각나지도 않을 정도의 기억력이고,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기억력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몇 십 페이지만 읽으면 머리가 아파 현기증이 나는데 뇌의 기능이 이제껏 읽은 책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며(내용의 이해와는 별개로) 망각이라는 기능이 없이 자신의 주변을 스쳐간 사람들과 풍경 그리고 사건들 모두를 기억하고 있다면 신체의 다른 부분이 버틸 수 있을까?

(이후 인터넷 기사에 뜬 과잉기억증에 대한 기사)

 

영화 리미트리스(Limitless,2012.7)비밀리에 개발된 신약으로 인간 뇌의 기능을 순식간에 증가시켜 무능한 작가지망생이었던 주인공을 상위 0.1%의 슈퍼맨으로 변하게 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고 있다.

인간의 뇌가 20%정도만 사용된다는 점을 동기로 삼아 100%의 기능을 발휘하게 만들어 주는 신약을 개발한 제약회사. 그러나 임상실험의 허가가 나지 않아 비밀리에 마약을 유통하는 방법으로 인간에게 임상실험을 하다가 주인공에게 그 약이 건네지고, 그 약을 먹은 주인공은 한번 보는 것만으로 모든 언어나 학습과정을 통달하게 되어 사채업자에게 빌린 천 만원으로 27억을 만드는 기가 막힌 능력을 보여준다.

 

글 쓰는 능력도 3~4시간 만에 몇 백 쪽의 재미있는 책을 출판사에 넘기고……

 

영화는 그런 과정에서도 복용을 자제함으로써 인생역전을 하는 주인공과 약을 남용하여 죽음에 이르는 경쟁자,

그리고 사채업자에서 무기수출업자로 한몫 챙기려는 양아치등을 통해 욕망을 조절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짐을 말한다.

 

그런데 그런 신약을 다룬 주제가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하기에는 과학의 발전은 이미 많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과학자들은 앞으로 10년 정도면 인류에게 불치의 질병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유전공학이 인본주의적이든 종교적이든 통제력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2011)에 나오는’시저(Caesar)’같은 유인원이 동물원에서 자신의 동료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와 같지 않은 우리의 뇌는 무언가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한번에 입력된 정보량 중 7±2바이트만 처리할 수 있다고 한다. 컴퓨터에 비하면 형편 없는 처리능력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컴퓨터가 기억용량이 크다고 해서 사채업자에게 쫓기면서 큰손과의 약속을 이행하여야 하는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약을 중단해가며 적응능력을 키우며 중용을 지키는 판단을 하거나

상황을 반전시키거나 상대의 역습을 제지할 수 있는 결단력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답과 다르게 실행할 수 있는,

즉 자기헌신이나 이타적인 희생을 할 수 없을 테니 기억의 양이 얼마나 큰가와 기억을 얼마나 잘 사용하는 가는 다른 문제이다하지만 앞으로의 미래는 컴퓨터가 발전하여 자기 복제를 하는 ‘매트릭스 영화 같은 일이 조만간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주어진 과제를 처리하는 것을 넘어서 사건을 계획하고 만들어 내고 정리할 수 있으며

결과에 대하여 오류를 판단, 수정하는 과정까지 진화할까? 책에서는 가능한 일이고 외국의 어느 부류에서는 컴퓨터의 복합지능인 사이보그가 상용화되는 것을 넘어서 로봇에게 마음을 이식하는(영화 로스트 인 스페이스(Lost in Space, 1997), 그래서 그런 사이보그도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영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2012)고 인정하자는 모임도 있다고 한다. 하기야 지금도 성형중독 공화국이라는 우리나라에서는 머지않아 영화 ‘Face-off’처럼 얼굴을 바꿔버리는 기술을 턱을 돌려 깎는 기술처럼 상용화할 날이 가까웠을지도 모르니 인간의 장기를 모두 이식하는 날도 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화재로 복원 건축을 한 숭례문은 조선시대의 그 숭례문인가?

 

테세우스의 배

 

테세우스와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탄 배는 서른 개의 노가 달려 있었고,

아테네인들에 의해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우스의 시대까지 유지 보수되었다.

부식된 헌 널빤지를 뜯어내고 튼튼한 새 목재를 덧대어 붙이기를 거듭하니,

이 배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자라는 것들에 대한 논리학적 질문’의 살아있는 예가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배가 그대로 남았다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배가 다른 것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 플루타르코스

그런데 학자들은 여기에 덧붙인다. 워싱턴 대학의 마크 코헨은 테세우스가 항해를 떠날 때 모든 교체부품을 싣고 떠난 후, 배가 고장 날 때마다 교체를 하여 다시 항구로 돌아올 때는 배의 모든 부품을 교체하였다고 할 때는 어떤가? 또, 테세우스가 떠날 때 고철수집상이 그를 따라가면서 모든 부품을 교체할 때마다 그 부품을 수집하여 배를 조립하여 테세우스의 원래 배를 복원하였다면? 이런 식으로 인간의 부품을 과학의 발달로 생체화된 기계부품으로 하나하나 교체하여 뇌만 남아 있는 상태라면? humanity+ 라는 단체에서는 그래도 인간이라고 주장한단다.

"섣부른 생각 같지만,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인류가 21세기 중반에 마주치게 될 문제들을 이미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을 배척하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인간을 위해 훨씬 더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펼치는 운동은 결코 인간 중심적이지 않다.

이들의 목표는 인간을 비롯하여 인조인간과 미래형 인간,

그리고 모든 동물의 삶에 ‘웰빙’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떠오른다. 미래란 ‘무엇’인가?

아니 미래는 과연 누구인가?

<제 8장 : 한줌의 재만 남다>

 

앞으로 먼 훗날, 죽는 것을 연장하는 인간들과 그들을 수발하는 사이보그들로 인하여 주거환경 공간이 좁아지는 바람에 지구의 환경을 벗어나고자 하는 여러 능력 등이 계발되어 화성에 식민지를 개발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 내어 ‘R2D2’를 데리고 STARWARS에 나오는 별들을 관광하는 시절이 온다면 그 때 인간의 정신은 지금과 비교하여 어떤 변화가 생기게 될까?

 

‘리미트리스’와 같이 한 사람만의 특출한 재능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도 역사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기록을 남겼을까? 의식이 형성되는 시기를 지나서부터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해도 인간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며 보려고 하는 것만 보는 맹점을 지닌 채 관점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호전적인 성질을 간직할까?  모든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테고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은 각자가 다를 것이니 기억의 양과 관련 없이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다. 'StarWars'에서도 여전히 쌈질이고 'Avatar'에서도 여전히 파괴적인 것을 보면 미래에도 인간의 습성은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상태를 유지할까?

영화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변화들이 언제고 생겨날 일이라면 인간의 욕망을 영화에서만 있을 법한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생각 아닐까?

 

질병이 없는 세상. 죽음을 통제하고 싶은 욕망. 에너지의 전쟁에서 해방된 인류. 전쟁을 잃어버린 민족.

 

이런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인본주의적인 희망은 과학자들에게 사명감을 주기도 하겠지만 사람이 어디 그런 사명감과 윤리 도덕으로만 존재할까! 리미트리스에서 향상된 뇌의 기능으로 세상에 평화를 만들어보겠다고 하는 주인공이 있으면 그 기능으로 돈과 권력을 갖고 암흑가의 보스로 크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갱도 있는 것처럼

과학을 이용하여 부를 거머쥐고 싶은 목적만 가지고 있는 사람도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냉전시대의 핵무기가 지금 잠자고 있다고 해도 강대국에 끼고 싶어하는 어느 나라는 지금도 강력한 핵을 만들고자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SETI" 프로그램이 지구와 같은 행성을 찾아냈다는 소식을 듣기도 전에 인류는 되살아 군비경쟁으로 종말을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과학의 발전이 양날을 번뜩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어디에서건, 또 어떤 목적으로든 탄생된 신과학기술은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현실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생명과 창조물과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아니면 그런 경계가 무의미하게 생각 될 미래를 향하고자 하는 것이 과학 기술의 본능이라면

오히려 첨단과학의 집합체인 우주개발로 집중력을 몰아주도록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제 막 읽기를 마친 책은 천문학을 다룬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천문학 교수이면서 우주 생물학을 한다는 저자는 여러 방면의 학문을 다루면서 인간의 고민이 우주적 관점에서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기우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우주로 향하는 인간의 노력이 결국 인간의 생명을 궁극적으로 연장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주장하는 듯 하다.

 

책은 사람들이 어떤 사유를 하건, 어떤 행동을 하건, 지구는, 우주는 제 갈 길을 가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우주에 대한 시선도 지구의 환경에 대한 시선도 결국은 이 세계가 각 개인의 사고에 투영된 관념에 불과하다는 주관적 관념인 유아론(唯我論)적 사고일 뿐임을 생각하게 해준다.

  

서양과 동양의 사상적 출발점은 우주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는가에 있는 것 같다.

 

“신의 마음속에는 존재 가능한 우주가 무수히 많았으나, 실제로 존재하는 우주는 단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신이 지금과 같은 우주를 선택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같은 책: 제12장 새로운 우주로>

 

그런데 과학자들은 그런 관점을 바꾸어 평가하는 것 같다.

 

 “우리는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우주만을 관측할 수 있다.” -브랜든 카터

“그것은 아주 간단한 역설이다. 우주는 매우 크고 오래되었지만 인간은 그에 비해 너무나 작고 아주 최근에 등장했다.

그런데 우주가 크고 오래되었다는 것은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여기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임을 잘 알고 있다.” -마이클 프레인

“우주가 생명체에게 알맞게 미세 조정되어 있다는 주장은

소시지가 핫도그용 빵에 들어가기 알맞도록 길고 가늘게 생겼다며 무릎을 치는 것과 같다” -스티븐 제이굴드

< 같은 책: 354p>

 

나는 앞으로 과학이 발전되어 사이보그인지 사람인지 구별이 힘들어질 정도로 변화된 세상에서 사는 상황이 오더라도 사람들의 사회는 Nomos를 잃지 않을 것으로 본다. 아무리 인간과 타 생물과의 이종교배가 이루어지고 로봇이 자기 복제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하더라도 사회는 스스로 통제할 것으로 본다.

물론 그 통제력도 진화 할 수는 있겠지만, 2~3천 년 전의 윤리와 도덕의 개념이 지금 시대에도 따라야 할 덕의 본질로서 여겨지는 것처럼 인간 스스로 타락의 행렬을 따르진 않을 것으로 희망한다.

 

“우리는 지금 이상한 꿈을 꾸고 있다.

기술이 미천한 상태에서 살았던 과거의 인간과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살게 될 미래의 인간 사이에서 짧은 과도기를 거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지구는 성능이 더욱 개선되고 뛰어난 경쟁력을 갖춘 생명체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간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생체 공학의 혜택을 받는 것은 물리적 외형뿐이기 때문이다.” 

 

<제 4장 진화의 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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