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과 유물론 - 인간의마음을탐구하는총서 6
E.프롬 지음 / 선영사 / 199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는 나라가 넓고 좁고를 논할 필요도 없이 그야말로 하나의 문화적 공간에 갇혀 있는 섬나라라고 할만 하겠다. (육지를 이용하여 나라를 벗어날 방법은 없으니 물리적공간 역시 섬이라 해도……)특히 매스컴이나 공공의 방면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의 면면들을 보면 도대체 특색, 개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요즘에는 기업이 정부의 Demagogy에 찬 프로파간다를 따라 하는 것이 유행인지 예전처럼 기업의 주 생산품을 홍보하는 것이 아니고 기업의 이미지, 그것도 소비자 측의 이미지가 아닌 기업주가 요구하는 이미지를 광고(C. I. ad)의 주제로 하는 것이 유행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광고들을 보면 뭔 소리를 하는 것인지,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인지, 그런 카피문구들이 자신들이 만드는 생산품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그 미사여구로 도배된 문구가 실업자들을 얼마나 구제하고 비 정규직을 얼마나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야근에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아픔을 얼마나 공유하고 있는 것인지 하나도 알려주지도, 알 수 있도록 힌트도 주지 않는다.

쥐꼬리만한 봉급이라도 받으려고 눈치 보는 비 정규직이나, 취직의 가능성에 목을 메 달고 대가는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며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수습 인턴들이 흘린 땀과 눈물. 그럼에도 산업재해를 인정 받지 못하는, 그들로부터 착취한 광고비로 그런 환상 같은 그림과 꿈꾸는 듯한 문구로 도배하는 기업이미지 광고와 정부가 주관하는 광고..

 

그 기업들은 복지국가로 만들려면 세금을 더 내고 고용을 늘리라는 시민단체의 목소리에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 결국 우리는 아직 선진국은커녕 중진국도 아니라는 것이며 국민소득이 몇 만 달러이니 하는 것도 다 거품이라는 말 아닌가? 소외된 층에게 소득을 분배하는 것에 반대할 정도로 돈을 쓸 수 없다면 그 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마치 버는 수입이 다 내 것인 양 흥청망청하도록 시민에게 환상을 보여주는 선동가(프로파간다)들의 나라가 결국 우리나라란 말인가?

고통을 잊으라고 상처에 마약을 뿌려주며 환각상태를 유지하도록 미사여구와 환상적인 그림으로 눈을 가리고자 하는 광고들로 시민의 눈과 귀를 덮어버리는 자본가와 정부.

 

참 짜증나는 요즘의 광고 중 몇 가지를 보면 그게 과연 기업주의 생각으로만 이루어진 것인지. 기업주의 눈에 들어 몇 번의 광고를 더 얻으려고 자신의 문학적, 미적 능력을 과시하는 광고업자의 알 수는 없지만 정말 기가 막히게 된다.

그 광고는 항상 예측 가능한 인간”(두산)이 훌륭한 인간이라고 하는 광고랑, 중국의 미래가 밝은 것은 아이가 2억 명이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광고이다.

첫 번째의 광고에서 모범생의 표준인 듯해 보이는 예측 가능한 인간이 사측에서 원하는 노예일지는 모르겠으나 교육에서 또는 미래지향적인 사회에서 요구하는 창조적이며 진취적인 인간은 아니라고 보인다. 오늘날 인류가 하나의 시공으로 가까워지게 된 동기인 인간의 사회. 과학적 발달은 예측 가능한 인간이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기성적 틀에 반하여 창조 진보적 사고로 획기적이면서도 발전적 행동을 해온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정신분석과 유물론

조직인은 그가 복종하고 있는 대상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는 다만 합리적이고 실제적인 것에 따를 뿐이라고 믿고 있다. 사실상조직인들의 사회에서는 불복종이란 것이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든 간에 거의 사멸되어 버렸다. 그러나 불복할 수 있는 복종의 능력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덕목임을 기억해야 한다. 히브리 및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역사는 불복종이라는 행위와 더불어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하…...

(제2부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 10장 몇 가지 연관된 개념들)

기업도 그런 틀에 박힌 인간을 얻어서 무엇을 얻어낼 수가 있을 것인가? 조그만 음식점에서도 발상의 전환을 따지고 있는데 말이다. 아마 상사의 말에 토 달지 않고 시키는 것만 열심히 해대는 기계를 만들어낼지는 모르겠다.

 

두 번째는 아주 기회주의적인 냄새가 풀풀 난다. 얼마 전까지도 아니 지금도 국방색의 컨테이너나 변두리의 거리에는 미국을 싫어하는 사람은 빨갱이라고 몰아세우는 의미의 플랜카드가 휘날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미국이 아니었으면 한반도자체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부산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의 나라는 싫어하면서 미국에게 당한 같은 방식으로 1. 4후퇴라는 치욕의 동기를 준 중국에 대하여는 이중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같은, 마치 그 동안의 미국바라기를 버리고 잘나가는 중국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는 듯한 그 카피. 우리도 중국처럼 2억 명의 아이를 낳자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13억의 2억에 맞춘 5천만의 1천만 아이를 만들자는 것인지 참 짜증이다.

우리 땅이 중국의 20%의 크기만큼이나 되던가? 중국 면적 9,596,961: 우리 면적 99,720

100분의 1정도에 불과한 면적에 인구를 늘려야 한다는 발상을 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극단적인 생각이겠지만 그런 자들의 생각을 유추해 본다면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워줄 사람의 수가 늘지 않고 기존의 인간들에게는 더 뺏어갈 자본이 없으므로 새로운 손님과 노예를 만들어내라고 하는 중세 유럽의 악덕 영주를 생각하게 한다. 아무리 성장위주의 정책이 살아남기 위함이라고 하여도 지금 이런 역사적 시간 속에서 인간의 수로 뭔가를 만들어 낸다는 생각은 얼마나 과거 지향적인가? 예컨대 영국은 바다 건너니 놔 두고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사이에 끼어 있는 조그만 나라.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처럼. 벨기에나 룩셈부르크처럼 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 나라처럼 된다면 국가의 위상이 적어진다고 할 것인가? 그들 나라보다 더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고 민족적 능력도 뒤지지 않는 문화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말이다.

지금도 사회 속에서, 정치적으로 소외 당하는 국민이 많은 우리나라임에 인구의 수가 늘어나면 계층간의 위화감은 그만두고라도, 비 정규직이나 수습 인턴 등의 현대적 노예 해방은 그만두고라도, 대중 속에서 자리잡지 못하는 소외된 군상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늦은 독서 탓에 시대를 거꾸로 인식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책방의 신간코너에 가보면 내가 읽고 있는 책들에 대한 내용을 재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뭐 그다지 거꾸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될 것 같다고 혼자 생각해 본다.

책의 내용은 20여 년 전의 시대상을 말하며 그 시절의 관점으로 미래를 말하고 있는데 그 예측을 지금 관점으로 본다고 해서 틀렸다고 하기에는 너무 억지스럽다고 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소외된 사회에서 인간의 욕구가 어떻게 타락하며 진정함 약점이 되는가 하는 것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보고 있듯이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새로운 욕구를 불러 일으키고 그로 하여금 새로운 희생물이 될 것을 강요하며, 새로운 종속자가 되게 하고서 새로운 쾌락에 빠지도록 유혹하고 마침내는 경제적 파멸로 유도하는 것이다.’ <경제적, 철학적 소고>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에 대한 만족을 찾기 위해 소외의 힘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도록 시도하게 된다. 따라서 대상물의 양이 늘어가면 인간이 예속되는 소외되는 실체의 영역도 증가한다. 모든 새로운 생산물은 서로 속이고 약탈할 수 있는 새로운 잠재력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점점 더 빈곤해진다. 인간은 적대적인 존재를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게 된다. 돈의 위력은 생산량의 증가에 따라 줄어든다. 따라서 돈에 대한 욕구도 돈의 힘이 증가함에 따라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돈에 대한 욕구는 현대 경제에 의해서 창조된 진정한 욕구이며, 현대경제가 만들어 내는 유일한 욕구이기도 하다. 화폐의 양도 점차적으로 그 유일한 중요 특성이 된다. 돈의 모든 실체를 추상적 개념으로 몰아넣는 것과 마찬가지로, 돈은 개발되는 과정에서 자기 스스로를 양적인 실제로 몰아넣는다. 과잉상태나 무절제가 돈에 대한 진정한 표준이 되고 만다. 이런 사실은 주관적으로 나타난다. 즉 생산과 욕구의 확대가 재주를 부리게 되고 비인간적인 것에 타산적으로 추종하게 되며, 타락하고 부자연스럽게 되고 공상적인 욕구에 빠지게 된다. 사유재산은 본래의 욕구를 인간적인 욕구로 변화시킬 줄 모른다.

사유재산의 이상주의는 환상이요, 변덕스러움이요, 공상에 불과하다. 전제군주의 사랑을 받기 위해 내시는 비열하게 아첨을 하거나 군주의 지나친 성욕을 자극하기 이해, 또는 호감을 사기 위해 파렴치한 수단을 추구하게 된다. 이런 것은 산업의 내시라 할 수 있는 기업가들이 자기의 절친한 이웃사람의 돈지갑으로부터 몇 푼의 은화나 금화를 얻기 위해 행위만도 못하다.

 

< 2부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 5장 병적인 개인과 병적인 사회>

 

이 글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과연 요즘의 시대상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구 공산주의체제가 베를린의 장벽과 같이 무너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 공산주의와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했던 사회주의는 다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말 많은 종북 세력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어줍잖게 흉내 내고자 하는 그것과도 다르다고 생각되는 그 이념은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학자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관료적이고 권위적인 억압의 체제로 변한 탓에 실패한 것이지 이 책에서 바라는 것 같은 휴머니즘적 사회주의는 북구의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아직 실현해보지도 못한 것 아닐까?

 

예를 들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발전에 다라 대중의 빈곤이 증대한다고 예상했을 때, 그는 매우 특수한 사실을 지적한 데 불과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논파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대신 만약 그가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의 증대와 불안감의 증대 및 불합리성을 예견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일까? 그의 예언은 사소한 점에서는 몇 가지 잘못을 범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원칙적으로는 실현되었다고 하는 유력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 1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제5장 이론의 적용 >

 

잘은 모르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인류의 공통 선()이라고 하며(J.S. 플라톤과 유사한 입장에서 “행위에 있어서 올바름의 기준이 되는 것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계하는 만인의 행복이다”라고 말했다. 그 이념이 자본주의와 관련 있는 개념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방법상의 문제라는 것 아닐까?

 

사회주의는 정신분석이론보다 훨씬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이론의 반대자나 적에 의해서도 결코 파괴된 일이 없었다. 이 세상에는 마르크스 사회주의를 표명하고 개선하려고 하는 급진적인 휴머니즘적 사회주의자들이 있어서 이들이 소련의 공산주의자들과도 판이한 휴머니즘적 사회주의를 성장 발전시키는데 애쓰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정신을 부르짖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는 아직도 미약하고 고립되어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만일 인류가 핵전쟁이라는 최고의 광기를 피하고자 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국제 사회주의자 운동이 동서양의 휴머니즘의 원리화 약속을 실현시켜 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줄 수도 있다.

 

<2부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 제9장 두 가지 이론의 숙명 >

 

그것은 인간을 물건을 위해서 사용하기보다는 인간을 위해서 새로운 기술력을 사용하는 새로운 서구사회의 출현, 즉 휴머니즘의 부흥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의 해방을 위한 기준이 맹목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경제적 이해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적. 정치적 과정보다는 경제를 지배하는 새로운 사회이다.

 

<2부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 제10장 몇 가지 연관된 개념들>

 

요즘 대선을 앞에 두고 이벤트가 만연하는 정치 쇼의 장에서 투표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 나는 말로만 통합을 외치며 실제로는 자신들의 입장에 서길 바라는 자들만의 통합을 바라는 프로파간다에 대하여 지금의 정권이 과거의 정권보다 더 나빠졌다고 보는 편이다.

그런 이유로는 과거 당시에는 정치적 선전이나 이념에 관심을 두고 살기보다는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의 정부들은 권력을 사유화하고 계급으로, 친분으로, 경력으로 나눠먹는 시기였기에 좌우에 대한 개념이 노골적이어서 지금처럼 대립이 표면화되던 적은 별로 없었다고 보는 면도 있다.

그런데 요즘의 정치적, 정책적 홍보의 방향이나 설정은 감성을 부추겨서 상대를 이성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며 동 시간대의 같은 공간에 함께하기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이렇게 되는 이유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기득권 자들이나 자본가들이 지향하는 인식이 종교적 자본주의에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만의 특색이 세계화될 수도 있음이 아니라 강대국과 동일화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매스미디어를 이용하는 정치 선전이라는 것이 아전인수격의 통계적용과 가장 허무맹랑한 공약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서 대중은 어차피 거짓말이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으므로 꿈이라도 크게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의 거짓말에 부화뇌동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시대를 거스르는 강대국의 종교적 색채를 기본으로 편협적인 가르기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말로는 평등을 외치면서 모두가 1등이 되라고 외치는 광고.

돈 많은 원조 국이 되어 나라의 위상은 커졌다고 하면서 보편적 복지에 대하여는 시기상조라고 하는 광고.

집 없는 서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부동산 가격 안정을 말하면서 투기지역을 해제한다는 광고.

바쁜 세상살이에 그런 광고에 누가 귀를 기울이나 할지 몰라도 대답 없는 메아리는 자신들의 목소리가 천상의 제일인줄 아는 자들을 만들고 그들은 그렇게 계속하여 성벽을 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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