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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화 위원회 - 유령과 볼셰비키, 그리고 죽음을 극복하려는 이상한 시도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태어난다고 삶의 수수께끼를 알게 되지 않듯, 죽는다고 죽음의 수수께끼를 알게 되지도 않는다. 내 경우만 해도 그렇다. – 헨리 시즈윅Henry Sidzwig이 내세에서 보내 온 편지
아주 오래 전에 나는,
그 나이 때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세상에 궁금증을 가지게 된 나는 책을 읽으면서 호기심을 채워 나갔는데,
그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동기였던 계기는 아마 대부분의 결혼한 신혼부부들이 혼수의 일부분으로 책장에 장식용으로 구비하는 양장으로 된 고전문학전서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갖게 된 것 같다.
당시에 친척이 구비해온 그 수십 권의 장서를 정말 닥치는 대로 읽었던 것 같은데,
호기심의 범위가 종교와 심리학 같은 분야 등으로까지 넓어지면서 소설은 멀리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소설이 아니었음에도 그 책들의 저자가 각각 이야기하고 주장하는 모든 것의 귀착점은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는가 아닌가, 아니라면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또는 왜 인간은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왜 인간은 피안이나 천국으로 가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고 수천 년 전에 살던 사람부터 근대의 사람들까지 서로 다르면서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대답은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으며 잘난척하듯 말한다면 꼬리를 본 것 같은데 어디로 갔는지 확실치 않아 들판을 헤매고 있는 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그 시절에, 그러니까 책 선택의 분야가 넓어졌다 할 시기에,
고대문명에 대한 책이나, 버뮤다 삼각지, 고대 인간들에 관한 미스터리 물을 다룬 책들이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 내 나이 또래가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호기심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한데 때마침 이랄까 90년대초 조계종 성철 종정이 임종하면서 그에 관한 일대기를 다룬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는 독학으로 외국어, 과학 등의 서적을 읽으면서 독해하였으며 한 때는 심령과학에도 흥미를 가졌다는 내용이 내게는 약간 의아스러웠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님이 심령과학에 흥미를 보였다니…….
그래서 나도 덩달아서 심령과학에 관한 책을 보기 시작했지만 당시에 발간 된 책들의 수준은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충분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의문점만 증폭시키는 책들이 많았던 것 같아 결국 그 호기심은 시들어 버렸고, 조금 남은 호기심은 종교적인 개념으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십 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책방의 어느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심령술에 관한 관심 끌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이제는 영상 과학의 발전 결과를 실현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와 같은 장르에서는 유령이나 귀신 등을 영상화한 심령영화들이 발전된 화면 표현 기법의 도움을 받아 꾸준히 극장 등에서 상영되고 있는 것 같다.
그 중에 내가 처음 본 것들은 “엑소시스트(1973년)” 시리즈와 오 멘(1977년)”이었는데, 그런 영화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청계천 세운 상가의 어느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필름을 본 것이었다. 그 다큐멘터리 필름에는 영매가 유령을 불러내면서 엑토플라즘Ectoplasm이라는 것을 입을 통하여 뿜어내는 모습. 영매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유령의 얼굴로 변이되는 모습. 영매나 귀신들린 사람이 공중 부양하는 모습, 랩Rap현상, 심령사진 등의 모습을 엮은 영화였다고 기억한다. 그래서 그때에는 사람들 모두는 아니더라도 특별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혼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고, 힌두의 어느 집단은 영혼에게는 고유의 색이 있어 그 색으로 혼령의 계급을 나눈다는- 아마도 사자의 서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책도 읽어 영혼의 존재는 느낄 수는 없어도 부인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 후 90년대에는 故 서정범 교수가 출간한 무녀별곡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심령술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그래서 무녀나 박수가 보통사람과 다른, 정말로 유령이 있어 그들의 몸 속에 있거나- 그들의 증언과는 달리- 때가 되면 그들의 정신을 통제하여 미래를 맞히거나 예언을 하는 등의 행위에 대하여 미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무속이라는 민속문화의 한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녀별곡에는 저자가 직접 만나본 우리 영매들의 강령과정을 적어 놓았는데, 그 과정은 영매마다 다 다르다고 한다.
그렇게 심령술이라는 분야는 내게 신경병리나 이상심리학의 한 분야로 생각된 채 잊혀졌었다.
그런데 2012년에 “Red Light”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레드 라이트’는 직역하자면 ‘붉은 빛’이라는 뜻으로, 흔히 신호등에서 위험, 경고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적신호를 의미한다. 심령술사를 빙자해 사람들을 속이고 다니는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종의 경고와 같은 것이다. 즉, ‘레드라이트’는 ‘심령술과 사기극을 구별하는 결정적 단서’라는 뜻이다.)
그간에 세월이 준 과학의 발전은 CG라는 기술을 얻게 되었고, 카메라 기술의 발전은 영매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순간동작을 잡아내어 그들의 행위가 준비된 사기라는 점을 밝혀냈으니 심령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심령술이나 강령술이라고 격하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3월 MBC TV에서 그런 이야기와 비슷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었다.
해리 후디니Harry Houdini / 1874~1926(『(본명: Erik Weisz』)는 탈출묘기 전문 스턴트 행위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자신의 마술묘기 같은 능력을 이용하여 강령 술이 모두 준비된 사기임을 밝히는 것으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 계기는 그의 어머니가 죽은 뒤, 그녀의 영혼을 만나고자 영매를 찾아갔는데, 그 영매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그는 사기꾼을 적발하는데 온갖 노력을 쏟았으며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이 죽게 되면, 그 동안 자신에게 당했던 강령술사들이 자신의 영혼을 불러낸다는 구실로 사람들에게 사기를 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부인과 모종의 계획을 했다고 한다. 부인은 남긴 유언장의 내용에 따라 영매들이 불러냈다고 하는 그 영혼을 향해 본명을 말하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의 본명을 알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영혼 불러내기는 사기로 들통나고 말았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왜 영혼에 집착하며 때로는 자학을 때로는 광기를 드러내는 것일까?
공자는 산 자의 일도 모르는데 죽은 자의 일에 어찌 관여하겠는가라는 표현을 그의 제자들에게 했다지만 제자들이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막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4대 성인이라고 일컫는 자들도 역시 각기 다른 표현으로 영혼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들이 각기 말한 영혼의 개념으로 인해 그들 사후에 분파가 나뉘어지고 서로의 주장이 옳다고 내세우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인류가 죽음에 이르렀는가? 동양의 2명을 제외하고는 유일신을 주장하는 세력들에 의하여 서양의 지도는 그야말로 시체로 이루어진 대륙이라고 하면 심한 과장일까?
그런데도 영혼의 거처는 필요로 한 것일까? 아니면 정치를 하려는 자들에 의한 인류최초의 프로파간다이며 협잡일까?
“심령학자들이 연구한 초자연 현상 중 어떤 것도 개인 영혼이 사후에 지속된다는 점을 증명해 보이지는 못했다. 심령연구의 고전으로 꼽히는 [살아있는 자들의 환영 Phantasms of the living(1866)]은, 유령을 죽어가는 사람이 보내는 텔레파시 메시지에 의해 촉발된 환영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영매를 통한 소통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인간이 현대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면 초자연 현상을 굳이 죽은 자의 통신으로 설명해야 할 이유도 없다. 모든 초자연 현상이 살아있는 자들에 의해 촉발된 것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 불멸화 위원회; 존 그레이/2012.10 도서출판 이후 刊 1장 – 교차통신, 유령과 나누는 대화: 57P>
존 그레이John N. Gray (1948~)의 책(화성남자 금성여자를 쓴 존 그레이가 아닌)은 의식하지 않은 채로 사게 되고 읽은 경우에 속한다.
처음에 그의 책을 읽은 것은 Black Mass라는 원제의 “추악한 동맹”이라는 책이었다.
내용은 이름에서 내포하고 있듯이 종교와 정치의 뒷거래를 파헤치는 책이었다.
그 책은 그의 다소 치밀해 보이는 성향으로 음모론이 아닐 것 같은 느낌으로 읽으면서 지루함 없이 빠른 시간 안에 읽은 책이었다.
그 후에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환상False Dawn: The Delusions of Global Capitalism” 이었고 국내의 책방에 나온 4가지 책 중에 3가지를 읽은 셈이 되어버렸다. 3가지의 책 모두 어쩌면 “음모론”을 제기할 수 있는 이야기 들일 수 있으나 내게는 논리적으로 보였으며 상당히 많은 공감을 얻은 책들이었다.
지금 이 책 “불멸화 위원회”는 볼셰비키 혁명이 진행되는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신-인간을 만들어 가는 “建神 主義者bogostroitel'stvo”들이 어떻게 인간의 이성을 말살시키며 잔혹한 악마적 성향을 보일 수 있는지를 자신들의 종교적 뿌리인 정교회와 어긋나게 되는지를 추적한다.
“막심 고리키Aleksey Maksimovich Peshkov)”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꼽히는 '민중의 아들'로 불리며 혁명에 직접 참여하여 큰 고초를 겪었고, 혁명의 전 과정에서 줄곧 사회의 부정과 부조리를 매섭게 공격하며 러시아 인민의 삶을 옹호했고, 러시아의 비판적 리얼리즘을 발전시켜 문학을 민중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서 보이는 그의 문학적 비판 개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소위 현자라는 사람들이 사회 개혁을 할 수 있다는 자기 기만에 빠져 정치와 손을 잡으면 얼마나 추락하는지를 볼 수 있다.
“ 고리키는 늘 러시아 농민을 하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러시아가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던 1921년 어느 인터뷰에서 고리키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아로 영향을 받는 3천5백만 명 대부분은 죽을 거라고 생각한다.] 1년 뒤에 고리키는 이렇게 언급한다. [러시아 시골에 있는 반쯤 야만인에, 멍청하고, 비협조적인 사람들은 죽어 없어질 것이다. (……) 그리고 그 자리는 학식과 지성이 있으며 열정적인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1930년, 고리키는 {프라우다}에 “적이 항복하지 않으면 제거해야 한다.”는 글을 썼는데, 이는 농장 집단화 기간 동안 가장 많이 쓰인 슬로건이 되었다. 2장 – 175P]
그들이 그들이 가진 문학적 재능을 통해 세상을 유토피아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스탈린과 레닌의 사상에 손을 들어주면서 나치의 유태인 학살보다도 더 많은 민중을 학살했는지,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그들도 생전에 그 장면들을 어떤 형태로든 접했다면 정말 이세상의 모든 유일신교는 용서받지 못할 일을 인류역사에 저질렀다고 보여진다.
인류가 그 존재의 불안이나 기타 사유로 인하여 영혼을 필요로 한다면 불멸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 일까? 아니면 언젠가는 소멸되는 물리적 형상 변화의 일종일까?
불멸의 존재라면 인류탄생을 어느 시점으로 보아야 하나?
자의든 타의든 창조적 진화를 따르는 과학자가 -내 생각에 그들 중 일부는 학자적인 욕심이 도덕이나 윤리적인 양심보다 앞선 탓에 금전의 유혹을 버리지 못한 - 생각하는 진화적 관점으로 생각한다면 유인원에서 갈라지는 136억년전의 어느 때일까? 아니면 뇌의 용량이 지금과 비슷해진 몇 백만 년 전의 그 어느 시기 이후에 탄생된 인류부터일까? 그리고 그 영혼들은 다 어느 공간에 있는 것일까? 단테의 상상대로 지구의 대지 속에 피라미드의 모양으로 쌓여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채로 매 순간 쌓여만 가고 있는 중일까?
그게 아니고 기원전 4004년전부터 만들어진 인간들에 한한 것이라고 해야 하나?
책 속의 “건신주의자”들은 불멸의 방법으로 과학을 추종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들이 부활시키려는 자는 왜 마르크스가 아니고 레닌이었을까?
(사람을 저온 냉동의 방법으로 보관하였다가 먼 훗날 인간의 모든 것을 복제할 수 있을 정도의 과학 기술을 지닌 인간들이 그 서투른 방법으로 저온 냉장된 인간을 녹여서 살려내거나 복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2장 – 건신주의자, 과학으로 죽음을 정복하려 한 사람들: 184P~194P)
아니면 레닌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 복제된 레닌이 학습과 경험을 통해 얻은 단기기억들이 모두 장기기억으로 변하여 유전자화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 또 다시 걸리적거리는 황인종, 흑인종,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고자 하는 재미를 위해서일까?
“효율성이라는 새로운 욕구를 물려받지 못한 검은, 갈색의, 더러운 흰색의, 황색의 사람 무리들은 어쩔 것인가? 글쎄, 세상은 세상이지 자선기관이 아니다. 나는 그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겠다. (…) 죽어서 사라지는 것이 그들이 맡은 역할이다. /H.G Wells Anticipations(Anticipations of the Reactions of Mechanical and Scientific Progress upon Human Life and Thought (1901)* 1902년 317P <2장 – 건신주의자, 과학으로 죽음을 정복하려 한 사람들>
공상과학 소설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쥴 베른Jules Verne과 함께 유명한 웰스가 이런 생각을 가졌다는 게 사실이라면 영화로도 상영된 “타임머신(The Time Machine: 1895/ 2002년 개봉)”, “우주전쟁/1898:(War of the worlds; 2005년 개봉)”을 어떤 느낌으로 다시 봐야 할까?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개의치 말아야 할까?
불멸이라는 것이 과학의 힘을 빌어 또 다른 영화 “서로게이트Surrogates: 2009년)”에서의 인간들처럼 복제인간에게 생활을 맡긴 채 침대에서 죽어가야 할까? 아니면 영화 “Matrix”처럼 복제인간의 배아인 채로 꿈 속에서만 살아가야 할까? 아니면 “아일랜드”에서와 같이 복제인간에게 장기를 이식 받아가면서 살아 가는 방법을 택해야 할까?
만약 그런 과학의 힘을 빌지 않고 불멸하려면 인간이 아닌 초자연적인 무엇의 개입을 필요로 할 것이다. 과학이 인간의 삶을 개조할 수 있을 시기가 되지 못했던 과거에는 분명히 그런 개입을 필요로 하였기에 유일신이나 영혼의 존재가 필요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본성적으로 영원히 자극을 받으며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진 존재로 진화되었는가?
아니면 자극이 욕망의 지속을 요구했고 뇌는 그 욕망의 성취를 위하여 영혼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고 봐야 할까?
“과학은 인구증가를 가능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인간이 생존을 위해 의존하고 있는 환경을 뒤흔든다. 인간의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과학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과학 진보의 아이러니다. 과학은 인간에게 다른 어떤 동물도 갖지 못했던 수준의 자연 지배 능력을 주었다. 하지만 과학은 인간에게 지구를 인간의 소망에 맞게 재구성할 능력은 주지 못했다. 지구는 우리 맘대로 태엽을 감거나 멈출 수 있는 시계가 아니다. 살아있는 시스템인 지구는 틀림없이 자기 자신의 균형을 다시 찾을 테지만 그 과정에서 딱히 인간을 보살펴 주지는 않을 것이다. 3장 – 달콤한 필멸 246
최근에 본 영화 “아이언 맨3(2013)“에서는 그런 과학의 신봉자들이 새로운 테러리스트로 나온다.
그들이 테러리스트인 이유는 주류에 포함되지 못한 과학단체인 AIMS가 식물의 재생능력을 인간의 유전자와 신경세포에 이식시켜 뇌나 심장이 파괴되지 않는 한, 팔이며 다리들이 무한히 재생되는 능력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신체 자체가 파괴되지 않는 무기인 인간이 되었음에도, 선한 일을 하지 않고 금융과 정치를 장악하여 인간세상의 새로운 지배자로 나서고자 하는 반대세력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학의 발전으로 정말 재생능력을 가질 정도의 기술을 가졌더라도 그 기술을 자유의지에 의하여 조절할 수 있으면 선이고, 부정적이며 반항적인 상태이면 악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자유의지가 아니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믿음은 우리의 문화에 깊이 스며들어 있으며 이를 믿을 때 사회 구성원과 사회가 더 선하게 행동할 거라는 사실이 그 믿음을 강화하고 있다.” (……) “이들은 자유의지를 믿으면 자기도 모르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려는 충동이 크게 감소하며 상당량의 지기통제와 정신 에너지가 이기적 충동과 공격적 충동을 억누르는데 사용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뇌로부터의 자유; 마이클 가자니가Michael S. Gazzaniga / 4장-무엇이 우리의 행동을 조종하는가? 176~178)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자유의지에 대하여 뇌 생리학적인 의미가 아닌 관점으로 본다면 이렇다.
가자니가의 주장이나 에릭 캔들과 같은 다른 뇌 관련 학자들의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지는 유전자가 가진 선천적 능력과 환경이 주는 자극에 따라 얻게 되는 경험이 만들어 내는 집합적 요소로 표현되는 그 무엇, 전의식, 무의식, 그런 자극에 의해 뇌가 이미 결정지어진 대로 행동하게 하는 그것이 자유의지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보다는 무의식, 뇌가 행동으로 옮기기 전까지의 전의식 과정에 따르는 불안을 감추고자 하는 무의식적 행동을 자유의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 그 자체로 절대적이거나 자유의지를 가진 정신은 없다. 다만 이렇게 하겠다거나 저렇게 하겠다고 마음먹도록 정해진 정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정해진 이유는 그보다 선행하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며, 이 원인에는 또 선행하는 원인이 있다. 이런 식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원인이 있는 것이다. 185P)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서 생각하면, 과학의 진보가 의식의 발생과정을 밝히고 물리적으로 식물세포와 파충류의 유전자를 골고루 조합하여 죽지 않는 재생의 능력을 가진 인간으로 만들어 내는 식으로 불멸을 원하는 욕망이 지속된다면 그로 인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것이 현실로 우리가 주위에서 늘 듣고 보고 사는 현실임에도 그것이 내세와 연장된다거나 하는 의지는 불안을 감추고자 하는 뇌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한다. 만약 그런 방어기제라도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고민하는 어느 시점에 다다를 때, 더 이상 봄 향기 가득한 꽃들과, 쏟아져 내릴 듯한 밤하늘의 별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할 상황으로 스스로 내몰 것이다. 인간이 살아야 하는 이런 저런 이유를 아무리 들이댄다고 하여도 각 개인 모두 어느 때인가는 어떤 방식, 어떤 모습으로든 현실에서 사라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이으려는 욕망은 인간을 각기 하나의 개체로 보려는 이기적인 선천적 의지의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세가 물리적 실재일 수도 있다. 불멸을 추구한 빅토리아시대 사상가 중에는 내세가 존재한다면 그 내세 역시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체계의 일부일 거라고 생각한 무신론자나 불가지론 자도 있었다. 사후에도 영혼은 지속될 수 있지만 숨겨진 능력을 개발해 낸 소수의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일 거라고 생각한 신비주의자도 있었다. 또한, 진화라는 과학적 사실이 내세가 실재한다는 점을 암시한다고 믿은 마이어스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심령주의 지지자이며 저명한 이집트 학자이며 시인인 제럴드 매시Gerald Massey는 “심령주의는 다윈주의를 받아들여서 그것을 저 세상에서 완성시킬 것이라고 말해다. 1장 - 45P
“내세가 현세의 연장이라면, 우리가 너무나 고통스럽도록 잘 알고 있는 현세의 딜레마들이 내세에서 사라질 거라 믿을 근거는 없다. 우리가 죽어서 들어갈 세상도 정의롭지 못하고, 무질서 하며, 현세만큼이나 파악할 수 없는 세상일 것이다. 현생이 그렇듯이, 사후의 삶도 인간의 지능으로는 기껏해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장 – 교차통신, 유령과 나누는 대화 55P
후디니가 영매들의 거짓을 밝히려는 그 시기보다 앞서 과학을 신봉했던 Society for Physical Research의 Henry Sidgwig과, Arthur Belfour, Henri Bergson 같은 사람과 H.G Wells, 고리키와 같은 사람들은 언젠가 과학의 발전이 사람의 불멸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고, 그것이 자신들의 종교관에서 비롯된 영혼의 개념은 아니더라도 내세에서 뭔가가 이승에서의 뭔가와 연결된다는 생각을 마이어스Frederic W.H. Myers는 이렇게 했다고 한다.
“과학은 인간 영혼의 지속을 증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이었다. 과학은 죽는다는 것이 더 이상 물리적인 재앙으로 중단되지 않고 무한히 먼 목적(우주가 더 완전하고 더 높은 형태로 진화해 나가도록 돕는 우주적 목적)을 향해 계속 움직여 나가는 도덕의 진화과정상에 있는 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줄 터였다. 마이어스에게 진화는 지상의 세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과학을 테러에 이용하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아직 우리는 진보단계에 있고 진화가 완성되었다고 생물학자들이 말한다고 한다면 그것도 재생능력을 이용할 줄 안다고 세상을 지배할 힘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자니가는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화살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일은 선행하는 사건에서 비롯된다는 개념을 가지면 우리는 상호보완성이란 개념을 놓치기 쉽다”고 했다.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공자의 말처럼 산 자의 일을 모르는데 죽은 자의 일을 알려 하는 것은 나는 사람들이 화살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꽃들이 꺾여서 소녀에게로, 소녀가 남편에게로, 남편이 전쟁으로, 전쟁이 무덤으로, 무덤에서 다 시 꽃으로 이어지는 순환의 세상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