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화 위원회 - 유령과 볼셰비키, 그리고 죽음을 극복하려는 이상한 시도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태어난다고 삶의 수수께끼를 알게 되지 않듯, 죽는다고 죽음의 수수께끼를 알게 되지도 않는다. 내 경우만 해도 그렇다. – 헨리 시즈윅Henry Sidzwig이 내세에서 보내 온 편지

 

아주 오래 전에 나는,

그 나이 때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세상 궁금증을 가지게 된 나는 책을 읽으면서 호기심을 채워 나갔는데,

그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동기였던 계기는 아마 대부분의 결혼한 신혼부부들이 혼수의 일부분으로 책장에 장식용으로 구비하는 양장으로 된 고전문학전서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갖게 된 것 같다.

당시에 친척이 구비해온 그 수십 권의 장서를 정말 닥치는 대로 읽었던 것 같은데,

호기심의 범위가 종교와 심리학 같은 분야 등으로까지 넓어지면서 소설은 멀리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소설이 아니었음에도 그 책들의 저자가 각각 이야기하고 주장하는 모든 것의 귀착점은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는가 아닌가, 아니라면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또는 왜 인간은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왜 인간은 피안이나 천국으로 가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고 수천 년 전에 살던 사람부터 근대의 사람들까지 서로 다르면서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대답은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으며 잘난척하듯 말한다면 꼬리를 본 것 같은데 어디로 갔는지 확실치 않아 들판을 헤매고 있는 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그 시절에, 그러니까 책 선택의 분야가 넓어졌다 할 시기에,

고대문명에 대한 책이나, 버뮤다 삼각지, 고대 인간들에 관한 미스터리 물을 다룬 책들이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 내 나이 또래가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호기심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한데 때마침 이랄까 90년대초 조계종 성철 종정이 임종하면서 그에 관한 일대기를 다룬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는 독학으로 외국어, 과학 등의 서적을 읽으면서 독해하였으며 한 때는 심령과학에도 흥미를 가졌다는 내용이 내게는 약간 의아스러웠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님이 심령과학에 흥미를 보였다니…….

그래서 나도 덩달아서 심령과학에 관한 책을 보기 시작했지만 당시에 발간 된 책들의 수준은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충분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의문점만 증폭시키는 책들이 많았던 것 같아 결국 그 호기심은 시들어 버렸고, 조금 남은 호기심은 종교적인 개념으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십 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책방의 어느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심령술에 관한 관심 끌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이제는 영상 과학의 발전 결과를 실현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와 같은 장르에서는 유령이나 귀신 등을 영상화한 심령영화들이 발전된 화면 표현 기법의 도움을 받아 꾸준히 극장 등에서 상영되고 있는 것 같다.

그 중에 내가 처음 본 것들은 엑소시스트(1973)” 시리즈와 오 멘(1977)”이었는데, 그런 영화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청계천 세운 상가의 어느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필름을 본 것이었다. 그 다큐멘터리 필름에는 영매가 유령을 불러내면서 엑토플라즘Ectoplasm이라는 것을 입을 통하여 뿜어내는 모습. 영매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유령의 얼굴로 변이되는 모습. 영매나 귀신들린 사람이 공중 부양하는 모습, Rap현상, 심령사진 등의 모습을 엮은 영화였다고 기억한다. 그래서 그때에는 사람들 모두는 아니더라도 특별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혼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고, 힌두의 어느 집단은 영혼에게는 고유의 색이 있어 그 색으로 혼령의 계급을 나눈다는- 아마도 사자의 서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책도 읽어 영혼의 존재는 느낄 수는 없어도 부인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 후 90년대에는 서정범 교수가 출간한 무녀별곡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심령술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그래서 무녀나 박수가 보통사람과 다른, 정말로 유령이 있어 그들의 몸 속에 있거나- 그들의 증언과는 달리- 때가 되면 그들의 정신을 통제하여 미래를 맞히거나 예언을 하는 등의 행위에 대하여 미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무속이라는 민속문화의 한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녀별곡에는 저자가 직접 만나본 우리 영매들의 강령과정을 적어 놓았는데, 그 과정은 영매마다 다 다르다고 한다.

그렇게 심령술이라는 분야는 내게 신경병리나 이상심리학의 한 분야로 생각된 채 잊혀졌었다.

그런데 2012년에 “Red Light”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레드 라이트’는 직역하자면 ‘붉은 빛’이라는 뜻으로, 흔히 신호등에서 위험, 경고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적신호를 의미한다. 심령술사를 빙자해 사람들을 속이고 다니는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종의 경고와 같은 것이다. , ‘레드라이트’는 ‘심령술과 사기극을 구별하는 결정적 단서’라는 뜻이다.)

 

그간에 세월이 준 과학의 발전은 CG라는 기술을 얻게 되었고, 카메라 기술의 발전은 영매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순간동작을 잡아내어 그들의 행위가 준비된 사기라는 점을 밝혀냈으니 심령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심령술이나 강령술이라고 격하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3MBC TV에서 그런 이야기와 비슷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었다.

 

해리 후디니Harry Houdini / 1874~1926((본명: Erik Weisz)는 탈출묘기 전문 스턴트 행위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자신의 마술묘기 같은 능력을 이용하여 강령 술이 모두 준비된 사기임을 밝히는 것으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 계기는 그의 어머니가 죽은 뒤, 그녀의 영혼을 만나고자 영매를 찾아갔는데, 그 영매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그는 사기꾼을 적발하는데 온갖 노력을 쏟았으며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이 죽게 되면, 그 동안 자신에게 당했던 강령술사들이 자신의 영혼을 불러낸다는 구실로 사람들에게 사기를 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부인과 모종의 계획을 했다고 한다. 부인은 남긴 유언장의 내용에 따라 영매들이 불러냈다고 하는 그 영혼을 향해 본명을 말하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의 본명을 알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영혼 불러내기는 사기로 들통나고 말았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왜 영혼에 집착하며 때로는 자학을 때로는 광기를 드러내는 것일까?

공자는 산 자의 일도 모르는데 죽은 자의 일에 어찌 관여하겠는가라는 표현을 그의 제자들에게 했다지만 제자들이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막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4대 성인이라고 일컫는 자들도 역시 각기 다른 표현으로 영혼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들이 각기 말한 영혼의 개념으로 인해 그들 사후에 분파가 나뉘어지고 서로의 주장이 옳다고 내세우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인류가 죽음에 이르렀는가? 동양의 2명을 제외하고는 유일신을 주장하는 세력들에 의하여 서양의 지도는 그야말로 시체로 이루어진 대륙이라고 하면 심한 과장일까?

그런데도 영혼의 거처는 필요로 한 것일까? 아니면 정치를 하려는 자들에 의한 인류최초의 프로파간다이며 협잡일까?

 

심령학자들이 연구한 초자연 현상 중 어떤 것도 개인 영혼이 사후에 지속된다는 점을 증명해 보이지는 못했다. 심령연구의 고전으로 꼽히는 [살아있는 자들의 환영 Phantasms of the living(1866)], 유령을 죽어가는 사람이 보내는 텔레파시 메시지에 의해 촉발된 환영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영매를 통한 소통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인간이 현대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면 초자연 현상을 굳이 죽은 자의 통신으로 설명해야 할 이유도 없다. 모든 초자연 현상이 살아있는 자들에 의해 촉발된 것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 불멸화 위원회; 존 그레이/2012.10 도서출판 이후 1교차통신, 유령과 나누는 대화: 57P>

 

그레이John N. Gray (1948~)의 책(화성남자 금성여자를 쓴 존 그레이가 아닌)은 의식하지 않은 채로 사게 되고 읽은 경우에 속한다.

처음에 그의 책을 읽은 것은 Black Mass라는 원제의 추악한 동맹이라는 책이었다.

내용은 이름에서 내포하고 있듯이 종교와 정치의 뒷거래를 파헤치는 책이었다.

그 책은 그의 다소 치밀해 보이는 성향으로 음모론이 아닐 것 같은 느낌으로 읽으면서 지루함 없이 빠른 시간 안에 읽은 책이었다.

그 후에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환상False Dawn: The Delusions of Global Capitalism이었고 국내의 책방에 나온 4가지 책 중에 3가지를 읽은 셈이 되어버렸다. 3가지의 책 모두 어쩌면 음모론을 제기할 수 있는 이야기 들일 수 있으나 내게는 논리적으로 보였으며 상당히 많은 공감을 얻은 책들이었다.

 

지금 이 책 불멸화 위원회는 볼셰비키 혁명이 진행되는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신-인간을 만들어 가는 建神 主義者bogostroitel'stvo들이 어떻게 인간의 이성을 말살시키며 잔혹한 악마적 성향을 보일 수 있는지를 자신들의 종교적 뿌리인 정교회와 어긋나게 되는지를 추적한다.

막심 고리키Aleksey Maksimovich Peshkov)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꼽히는 '민중의 아들'로 불리며 혁명에 직접 참여하여 큰 고초를 겪었고, 혁명의 전 과정에서 줄곧 사회의 부정과 부조리를 매섭게 공격하며 러시아 인민의 삶을 옹호했고, 러시아의 비판적 리얼리즘을 발전시켜 문학을 민중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서 보이는 그의 문학적 비판 개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소위 현자라는 사람들이 사회 개혁을 할 수 있다는 자기 기만에 빠져 정치와 손을 잡으면 얼마나 추락하는지를 볼 수 있다.

 

고리키는 늘 러시아 농민을 하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러시아가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던 1921년 어느 인터뷰에서 고리키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아로 영향을 받는 35백만 명 대부분은 죽을 거라고 생각한다.] 1년 뒤에 고리키는 이렇게 언급한다. [러시아 시골에 있는 반쯤 야만인에, 멍청하고, 비협조적인 사람들은 죽어 없어질 것이다. (……) 그리고 그 자리는 학식과 지성이 있으며 열정적인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1930, 고리키는 {프라우다}적이 항복하지 않으면 제거해야 한다.”는 글을 썼는데, 이는 농장 집단화 기간 동안 가장 많이 쓰인 슬로건이 되었다. 2– 175P]

 

그들이 그들이 가진 문학적 재능을 통해 세상을 유토피아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스탈린과 레닌의 사상에 손을 들어주면서 나치의 유태인 학살보다도 더 많은 민중을 학살했는지,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그들도 생전에 그 장면들을 어떤 형태로든 접했다면 정말 이세상의 모든 유일신교는 용서받지 못할 일을 인류역사에 저질렀다고 보여진다.

 

인류가 그 존재의 불안이나 기타 사유로 인하여 영혼을 필요로 한다면 불멸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 일까? 아니면 언젠가는 소멸되는 물리적 형상 변화의 일종일까?

불멸의 존재라면 인류탄생을 어느 시점으로 보아야 하나?

자의든 타의든 창조적 진화를 따르는 과학자가 -내 생각에 그들 중 일부는 학자적인 욕심이 도덕이나 윤리적인 양심보다 앞선 탓에 금전의 유혹을 버리지 못한 - 생각하는 진화적 관점으로 생각한다면 유인원에서 갈라지는 136억년전의 어느 때일까? 아니면 뇌의 용량이 지금과 비슷해진 몇 백만 년 전의 그 어느 시기 이후에 탄생된 인류부터일까? 그리고 그 영혼들은 다 어느 공간에 있는 것일까? 단테의 상상대로 지구의 대지 속에 피라미드의 모양으로 쌓여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채로 매 순간 쌓여만 가고 있는 중일까?

그게 아니고 기원전 4004년전부터 만들어진 인간들에 한한 것이라고 해야 하나?

 

책 속의 건신주의자들은 불멸의 방법으로 과학을 추종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들이 부활시키려는 자는 왜 마르크스가 아니고 레닌이었을까?

 

(사람을 저온 냉동의 방법으로 보관하였다가 먼 훗날 인간의 모든 것을 복제할 수 있을 정도의 과학 기술을 지닌 인간들이 그 서투른 방법으로 저온 냉장된 인간을 녹여서 살려내거나 복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2건신주의자, 과학으로 죽음을 정복하려 한 사람들: 184P~194P)

 

아니면 레닌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복제된 레닌이 학습과 경험을 통해 얻은 단기기억들이 모두 장기기억으로 변하여 유전자화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또 다시 걸리적거리는 황인종, 흑인종,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고자 하는 재미를 위해서일까?

 

효율성이라는 새로운 욕구를 물려받지 못한 검은, 갈색의, 더러운 흰색의, 황색의 사람 무리들은 어쩔 것인가? 글쎄, 세상은 세상이지 자선기관이 아니다. 나는 그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겠다. (…) 죽어서 사라지는 것이 그들이 맡은 역할이다. /H.G Wells Anticipations(Anticipations of the Reactions of Mechanical and Scientific Progress upon Human Life and Thought (1901)* 1902 317P <2건신주의자, 과학으로 죽음을 정복하려 한 사람들>

 

공상과학 소설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쥴 베른Jules Verne과 함께 유명한 웰스가 이런 생각을 가졌다는 게 사실이라면 영화로도 상영된 타임머신(The Time Machine: 1895/ 2002년 개봉)”, “우주전쟁/1898:(War of the worlds; 2005년 개봉)”을 어떤 느낌으로 다시 봐야 할까?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개의치 말아야 할까?

불멸이라는 것이 과학의 힘을 빌어 또 다른 영화 서로게이트Surrogates: 2009)”에서의 인간들처럼 복제인간에게 생활을 맡긴 채 침대에서 죽어가야 할까? 아니면 영화 “Matrix”처럼 복제인간의 배아인 채로 꿈 속에서만 살아가야 할까? 아니면 아일랜드에서와 같이 복제인간에게 장기를 이식 받아가면서 살아 가는 방법을 택해야 할까?

 

만약 그런 과학의 힘을 빌지 않고 불멸하려면 인간이 아닌 초자연적인 무엇의 개입을 필요로 할 것이다. 과학이 인간의 삶을 개조할 수 있을 시기가 되지 못했던 과거에는 분명히 그런 개입을 필요로 하였기에 유일신이나 영혼의 존재가 필요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본성적으로 영원히 자극을 받으며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진 존재로 진화되었는가?

아니면 자극이 욕망의 지속을 요구했고 뇌는 그 욕망의 성취를 위하여 영혼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고 봐야 할까?

 

과학은 인구증가를 가능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인간이 생존을 위해 의존하고 있는 환경을 뒤흔든다. 인간의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과학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과학 진보의 아이러니다. 과학은 인간에게 다른 어떤 동물도 갖지 못했던 수준의 자연 지배 능력을 주었다. 하지만 과학은 인간에게 지구를 인간의 소망에 맞게 재구성할 능력은 주지 못했다. 지구는 우리 맘대로 태엽을 감거나 멈출 수 있는 시계가 아니다. 살아있는 시스템인 지구는 틀림없이 자기 자신의 균형을 다시 찾을 테지만 그 과정에서 딱히 인간을 보살펴 주지는 않을 것이다. 3달콤한 필멸 246

 

최근에 본 영화 아이언 맨3(2013)“에서는 그런 과학의 신봉자들이 새로운 테러리스트로 나온다.

그들이 테러리스트인 이유는 주류에 포함되지 못한 과학단체인 AIMS가 식물의 재생능력을 인간의 유전자와 신경세포에 이식시켜 뇌나 심장이 파괴되지 않는 한, 팔이며 다리들이 무한히 재생되는 능력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신체 자체가 파괴되지 않는 무기인 인간이 되었음에도, 선한 일을 하지 않고 금융과 정치를 장악하여 인간세상의 새로운 지배자로 나서고자 하는 반대세력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학의 발전으로 정말 재생능력을 가질 정도의 기술을 가졌더라도 그 기술을 자유의지에 의하여 조절할 수 있으면 선이고, 부정적이며 반항적인 상태이면 악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자유의지가 아니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믿음은 우리의 문화에 깊이 스며들어 있으며 이를 믿을 때 사회 구성원과 사회가 더 선하게 행동할 거라는 사실이 그 믿음을 강화하고 있다.” (……) “이들은 자유의지를 믿으면 자기도 모르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려는 충동이 크게 감소하며 상당량의 지기통제와 정신 에너지가 이기적 충동과 공격적 충동을 억누르는데 사용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뇌로부터의 자유; 마이클 가자니가Michael S. Gazzaniga / 4-무엇이 우리의 행동을 조종하는가? 176~178)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자유의지에 대하여 뇌 생리학적인 의미가 아닌 관점으로 본다면 이렇다.

가자니가의 주장이나 에릭 캔들과 같은 다른 뇌 관련 학자들의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지는 유전자가 가진 선천적 능력과 환경이 주는 자극에 따라 얻게 되는 경험이 만들어 내는 집합적 요소로 표현되는 그 무엇, 전의식, 무의식, 그런 자극에 의해 뇌가 이미 결정지어진 대로 행동하게 하는 그것이 자유의지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보다는 무의식, 뇌가 행동으로 옮기기 전까지의 전의식 과정에 따르는 불안을 감추고자 하는 무의식적 행동을 자유의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 그 자체로 절대적이거나 자유의지를 가진 정신은 없다. 다만 이렇게 하겠다거나 저렇게 하겠다고 마음먹도록 정해진 정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정해진 이유는 그보다 선행하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며, 이 원인에는 또 선행하는 원인이 있다. 이런 식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원인이 있는 것이다. 185P)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서 생각하면, 과학의 진보가 의식의 발생과정을 밝히고 물리적으로 식물세포와 파충류의 유전자를 골고루 조합하여 죽지 않는 재생의 능력을 가진 인간으로 만들어 내는 식으로 불멸을 원하는 욕망이 지속된다면 그로 인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것이 현실로 우리가 주위에서 늘 듣고 보고 사는 현실임에도 그것이 내세와 연장된다거나 하는 의지는 불안을 감추고자 하는 뇌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한다. 만약 그런 방어기제라도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고민하는 어느 시점에 다다를 때, 더 이상 봄 향기 가득한 꽃들과, 쏟아져 내릴 듯한 밤하늘의 별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할 상황으로 스스로 내몰 것이다. 인간이 살아야 하는 이런 저런 이유를 아무리 들이댄다고 하여도 각 개인 모두 어느 때인가는 어떤 방식, 어떤 모습으로든 현실에서 사라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이으려는 욕망은 인간을 각기 하나의 개체로 보려는 이기적인 선천적 의지의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세가 물리적 실재일 수도 있다. 불멸을 추구한 빅토리아시대 사상가 중에는 내세가 존재한다면 그 내세 역시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체계의 일부일 거라고 생각한 무신론자나 불가지론 자도 있었다. 사후에도 영혼은 지속될 수 있지만 숨겨진 능력을 개발해 낸 소수의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일 거라고 생각한 신비주의자도 있었다. 또한, 진화라는 과학적 사실이 내세가 실재한다는 점을 암시한다고 믿은 마이어스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심령주의 지지자이며 저명한 이집트 학자이며 시인인 제럴드 매시Gerald Massey심령주의는 다윈주의를 받아들여서 그것을 저 세상에서 완성시킬 것이라고 말해다. 1  - 45P

내세가 현세의 연장이라면, 우리가 너무나 고통스럽도록 잘 알고 있는 현세의 딜레마들이 내세에서 사라질 거라 믿을 근거는 없다. 우리가 죽어서 들어갈 세상도 정의롭지 못하고, 무질서 하며, 현세만큼이나 파악할 수 없는 세상일 것이다. 현생이 그렇듯이, 사후의 삶도 인간의 지능으로는 기껏해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교차통신, 유령과 나누는 대화 55P

 

후디니가 영매들의 거짓을 밝히려는 그 시기보다 앞서 과학을 신봉했던 Society for Physical ResearchHenry Sidgwig, Arthur Belfour, Henri Bergson 같은 사람과 H.G Wells, 고리키와 같은 사람들은 언젠가 과학의 발전이 사람의 불멸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고, 그것이 자신들의 종교관에서 비롯된 영혼의 개념은 아니더라도 내세에서 뭔가가 이승에서의 뭔가와 연결된다는 생각을 마이어스Frederic W.H. Myers는 이렇게 했다고 한다.

 

과학은 인간 영혼의 지속을 증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이었다. 과학은 죽는다는 것이 더 이상 물리적인 재앙으로 중단되지 않고 무한히 먼 목적(우주가 더 완전하고 더 높은 형태로 진화해 나가도록 돕는 우주적 목적)을 향해 계속 움직여 나가는 도덕의 진화과정상에 있는 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줄 터였다. 마이어스에게 진화는 지상의 세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과학을 테러에 이용하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아직 우리는 진보단계에 있고 진화가 완성되었다고 생물학자들이 말한다고 한다면 그것도 재생능력을 이용할 줄 안다고 세상을 지배할 힘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자니가는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화살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일은 선행하는 사건에서 비롯된다는 개념을 가지면 우리는 상호보완성이란 개념을 놓치기 쉽다고 했다.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공자의 말처럼 산 자의 일을 모르는데 죽은 자의 일을 알려 하는 것은 나는 사람들이 화살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꽃들이 꺾여서 소녀에게로, 소녀가 남편에게로, 남편이 전쟁으로, 전쟁이 무덤으로, 무덤에서 다 시 꽃으로 이어지는 순환의 세상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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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마도 누구나 하루의 대부분을 스마트-, PC등의 첨단기기를 통하여 인터넷이나 SNS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접하고 있다고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세상과 소통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WWW(World Wide Web)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에는 그야말로 세상의 공간이 PC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가상현실에 놀라워하고 저절로 세상의 통일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지금은?

국가가 정보를 통제하는 이란, 중국 등의 곳에서는 그들이 접하는 웹 속의 정보가 현실의 정보와 동시성을 가질 수 있도록 다른 방식의 가상이 존재할까? 그런 국가를 제외한다면 다른 국가에서는 지금 과연 인터넷이 사람들에게 WWW에서 소통하며 꿈꾸는 세계를 가상이 아닌 현실에서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매 순간 쏟아지기만 하고 걸러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온갖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골라 접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게 됨으로써 현실에서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요즘 많이 이용하는 SNS는 또 다른 브랜드의 디지털 액세서리가 아닐까?

 

하버마스는 키에르케고르가 살았던 시기를 극찬했습니다. 이 시기의 특징을 요약하면 카페와 신문이 유럽전역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민주화된 공론이 형성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지나치게 많은 의견들이 돌아다니고, 무수하게 많은 천박한 이유로 사람들을 조롱하기가 너무 쉬우며, 아무도 뭔가를 강력하게 믿지 않은 현상을 우려했습니다. 사람들이 목숨을 바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에브게니 모로조프 Evgeny Morozov /디지털 파워와 그 반론자들>

모두가 비슷한 문장과 단어를 사용하여 동질감을 나타내고, 한 사람의 문장을 복사하고 복사하며 칭송하고 찬양하는 듯하지만 정말로 목숨을 바칠만한 것이 없는현실성이 없는, 뭔가를 강력하게 믿지 않는세상에서 사람들의 이성은 점점 더 석화되고 감정만이 꿈틀대는 것 아닐까?

 

나는 점점 더 첨단을 달려가는 인터넷의 전성시기를 살고 있다고 할만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에 걸맞은 발달된 소통의 문화를 즐기고 있지는 못하고 있지만 WWW가 주는 일방적 개방의 덕을 보면서 살고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거 같다.

글을 쓰는 것을 즐기는 나는 손가락의 활동이 장애를 겪으면서 손으로 펜이나 연필을 들고 그림은 그릴 수 있어도 글을 쓰는 행동에는 제약을 받으며 산다.

그러나 독수리타법이라는 방법으로 워드 프로세서를 통해 이렇게나마 내 머리 속의 생각을 WWW에 옮기고 있으니, 아직 일방적으로 열려있기는 하나 그래도 글을 쓰고 난 후의 카타르시스를 얻을 때가 있으니 인터넷의 도움을 받고 산다고 하겠다.

만약 예전처럼 노트에 필기를 하는 식으로 글을 썼다면?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 것은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굉장히 야릇한 통증을 주기 때문에 아마 중도에 그만 두었을 것이다.

내가 워드프로세서를 통한 글을 쓰면서 인용하는 WWW속의 정보는 글을 쓰는데 필요한 정보를 얻는 역할 이외에는 별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수준이지만 그 정보의 어느 것이 옳고 그릇된 것인지는 잘 판단이 서지 않으므로 주로 다수의 의견을 수긍하는 편에 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다수의 의견이란 블로거나, 지식코너, 포탈사이트의 사전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우리에게 죽은 백인 남자들이 하의한 것을 말해주지만, 위키피디아는 살아 있는 인터넷 사용자들이 현재 뜨겁게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해준다.” <엣지 대담 코리 닥터로 Cory Doctorow 301p>  

그래서 죽은 자들의 의문은 백과사전에서, 살아있거나 비교적 근대라고 생각되는 자들의 의문은 위키피디아에서 인용하거나 정보를 얻고 판단하고 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매일 매일 인터넷에 올리는 글들은 그 동기 면에서 볼 때 시작은 나처럼 자신만의 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의도였을 테지만, 그런 행위가 누구에게는 이타적인 행위로 이어지고 있을 수도 있는 정보로 나타날 수도 있음을 생각한다면, 죽은 위인들의 브리태니커 보다는 위키피디아가 살아있는 정보의 구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Hive Mind라는 우려가 현실과 이어지지는 않을 수도 있음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워드 프로세서 덕분에 우리글의 품격이 높아졌다기 보다는 우리 글의 양이 늘어났을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반적인 사회를 뜻한다. 한편 인터넷 덕분에 우리가 얻는 정보의 질이 향상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얻는 정보량이 증가했을 뿐이다. 양 늘리기는 질을 향상시키는 것보다 훨씬 쉽다. 이제는 쉬운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에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인터넷을 이용할 때가 되었다.

……

인터넷이 인간의 정신을 대신하진 못하겠지만, 우리가 사고방식을 바꾸고 더 나아가 시대정신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꿔가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런 변화의 순간이 위험하다. 가상 대학들은 바람직하지만, 예컨대 가상 국가는 바람직하지 않다. 구성원이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가상 국가는 인류를 산산조각 낼 위험이 있다.

……

따라서 전 세계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개인적인 정보로 가득해서 안타깝지만 누구도 그 이야기를 완전히 들을 수 없다. <인터넷을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되었다./ David Gelernter>

 

그런데 이런 인터넷의 진화에 대하여 이 책 속의 나타나는 학자들의 의견은 여러 가지다.

긍정적 반응이 대부분이지만 이제 그 역할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반응, 더 진화된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의견 등. 그들의 전문 분야에 따라 생각도 여러 가지다.

그런 관점으로 나도 뭔가 한마디를 보탠다면 인터넷으로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현실의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과 혼동되는 공간을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는 냉소적인 의견에 더 솔깃하다. 인터넷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분명 존재하지만 실천하지 않고 방관적인 태도를 가진 인간은 그곳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즉 현실의 또 다른 거울일 뿐인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발전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것이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날지 파멸로 이르게 할지는 아직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강대국의 Hot Button으로 영화 오블리비언에 나오는 모습의 세상은 되지 않을 네트워크로 자라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기억의 양면을 가지고 갈등에 직면한 채 살고 있지만 지금처럼 공간을 이어주고 시간도 붙잡아 둔 WWW의 공간에서는 경험하는 자아 보다는 기억하는 자아가 미래를 예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므로 지금 불편해 보이고 거추장스러울지 모르는 과학적 진보에 대하여 양면을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런 면으로 앞으로의 WWW에서 정보는 살아있어야 하며 통제되거나 프로파간다에 의한 왜곡이 되는 것을 스스로 걸러낼 수 있는 인공지능이라도 필요로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런 과학적 사회적 미래를 위한 진보 발전에 대하여 정보를 나누고자 할 때

보수는 그들의 약점을 누군가 지적이라도 할라치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에 위험해 보인다.

진보라는 쪽 역시 장점을 아우르지 않고 약점과 어두운 면을 밝히는 방법론을 사용할 때 스스로 약자이거나 소수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위험해 보인다.

정치가는 그 둘의 관계를 정립하고 처리하는데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투표로 한쪽을 매몰시키려 하기에 위험해 보인다.

투표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어느 한쪽을 선택한 대가로 매장된다면 아무도 민주주의 꽃을 들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과학자들은 그들이 하는 일이 사물에서 뭔가를 분리하여 증명하려는 특성 때문에 위험해 보인다.

분명 과학자들은 논리적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론을 증명하기 때문에 그 이론의 실행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지만 철학자처럼 전부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점, 사회학자들처럼 네트워크적인 오류를 고려하지 않고 무시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실증적이다라는 점 때문에 그들의 이론과 실험을 지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의 가상 실험 재료나 경우의 수를 수학적으로 계산할 때 누락시키지 않았으면 할 뿐이다.

 

전 지국적 관점은 단순한 미학의 문제가 아니며, 단순한 관점의 문제도 아니다. 전 세계적인 규모의 해결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아직 마련하지 못한 형태의 거버넌스Governance가 필요하고, 우리가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테크놀로지도 필요하다. 생태학자들이 생태공학이라고 칭하는 것도 동원되어야 한다. 비버가 그렇게 하고, 지렁이가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동물들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방향으로 가는데 환경운동의 감상주의와 미학주의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 우리는 신으로 존재하므로 그 역할을 잘해야 한다./ Stewart Brand>

 

이의 주장은 그럴 듯 하다, 아니 모두 맞는다고 해도 무리하지 않다.

다만 세상을, 시간을, 역사를 본다면, Brian Arthur처럼 다소 道學的인 느낌으로 본다면 과학도 쉬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 쉼이나 느림에 반기를 들 사람은 호전적 정치인이나 탐욕적인 장사꾼을 제외하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철학으로서의 도교에 심취하면서 만물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변한다는 道敎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도교 철학의 핵심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움켜질 수 있는 안정된 것은 없다. 온 세상이 끊임없이 변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바람직하게 사는 방법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순응하며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다. <테크놀로지는 진화하는가? William Brian Arthur>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주장한 것이 충분히 근거가 있다면 인류가 지금의 상황에 이른 것이 총과 균 그리고 쇠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움직인, 그 문명의 도구들을 움직이고 사용하고 승리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스튜아트 브랜드가 걱정하듯이 환경론자들의 감상주의와 미학주의가 유전자공학을 더디게 만들어 제3세계의 굶주림을 비롯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맞는 말일지는 모르지만,

핵 원자로의 발전을 반대하는 그린피스의 반대가 화석에너지를 사용하게 하여 온난화를 가중시키는 것이 맞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유전공학의 피해나 핵에너지의 폐기물 걱정을 덜어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또 다른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령 Belle Époque시기처럼 말이다.

 

식량의 걱정이 없고 에너지의 걱정이 없으면 가장 먼저 늘어나는 것은 무엇일까를 역사의 한 면에서 배우며 생각하고 배려했다면 그 시대 이후의 폭력과 광기의 시기는 있었을까? 없었을까?

책을 보며 요즘의 머릿속을 정리해놓은 듯한 글이 있어 반가웠다. 이런 글들의 느낌이 거의 그렇지만 뭔가를 더 달아내면 안될 것 같다. –사실은 독수리 타법에 통증이 심해지는 탓에 싫증이 난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 -

 

Dawkins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비유전적 문화요소, 즉 밈(Meme)을 기생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밈은 기생충 같은 벌레보다 단순한 바이러스에 가깝다. 밈은 유전자와 유사한 것으로, 문화매개물(Culture medium) 의 반복하는 단위다. 그러나 밈에도 외부로 들어나는 표현형이 있다. 하지만 밈은 완전히 발가벗은 유전자 같은 것이 아니다. 밈은 바이러스와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바이러스는 어떤 모양을 띤 핵산의 띠에 불과하며, 단백질로 뒤덮여 있다.

바이로이드(Viroid)는 훨씬 발가벗겨진 유전자다. 밈도 어떤 모양을 띤 정보 다발이다. 밈에 입혀진 표현형이란 옷이 세상에 영향을 주며, 그 영향에 따라 밈의 복제가능성이 달라진다. 밈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 밈은 정보로 이루어지며, 그 정보는 물리적인 매개체를 통해 전달된다.

밈의 세계에서 궁극적으로 이익을 얻는 대상, 즉 최종적인 비용-수익계산이 적용되는 수혜자는 밈 자체이지 밈의 전달자가 아니다.

…….

그렇다면 밈에 감염된 우리 뇌의 분비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려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에게 스며든 밈들의 일부만 우리 자신과 동일시 하는 것이 문제다.

왜 그럴까? 우리에게 스며든 밈들 중에는 그런 일부의 밈과만 동일시하도록 부추기는 밈이 있기 때문이다. 밈을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을 갖지 않는 한, 우리는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터전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밈들이 있다. 그런 밈들이 우리의 지금 모습을 만들어 냈다.

<문화의 진화/Daniel Dennett (Culture Shock/EDGE재단 와이즈베리 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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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 - 악의 시대, 도덕을 말하다
샘 해리스 지음, 강명신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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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삭제. 그리고 자각하지 못하는 기억과 의식을 지닌 인간 남녀.

그 부분에서 영화는 시작되었다. 그 동안의 많은 영화에서 외계인의 침략을 다루어와서 침략의 과정을 묘사함은 흥미를 잃었을 수도 있고 따분한 반복을 위한 투자가 아까워서도 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굳이 기억을 삭제한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누군가의 기억을 삭제할 수 있다면 언제부터 어디까지이고 지워진 기억으로부터 연관된 어느 부분은 어떻게 메워 놓을까?

시간은 직선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을지라도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평행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기억의 삭제나 기억의 재 구성을 다룬 영화들에는 그 지워진 기억의 다른 연관부분의 재생에서부터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것을- 그래야 영화의 반전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보여주고 있다.

지구에서의 임무가 끝나기 2주전!

불현듯 뇌리에 번쩍이는 희미한 흑백의 기억들.

뭔지 뚜렷이 연관되는 사실은 없지만 행복을 떠올릴 수 있는 흑백 필름의 기억.

심리학자 대니얼 카네만은 삶에서 어느 순간에 얼마나 행복한가를 말하는 것을 경험하는 자아라고 하며, 삶을 전반적으로 구성하여 행복을 말하는 것을 기억하는 자아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두 자아가 갈등을 지속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나는 아무래도 어느 자아가 옳은지 우리는 아무도 단정지은 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삶의 매 순간마다 자신의 판단이 옳았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만약 어긋난 결과를 보게 될 경우 틀린 판단을 한 자아는 미래를 보상 받을 수 있다는 예정된 기억으로 투사한다. Sam Harris문제는 과학을 하는 것과 인생을 사는 것 모두에서, ‘기억하는 자아만이 과거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자아만이 과거 경험에 비추어서 의식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그의 책”the Moral Landscape”의 마지막 부분에 썼다.

 

영화 속의 상상을 그려낼 때, 많은 과학자들이 각기 다른 의견을 내고 있지만, 나의 상상은 만약 우리가 외계인을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를 고민하기보다는 외계인이라는 개념부터 통일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영화 등에서 상상하는 외계인은 꼭 지구가 아닌 항성, 행성 등에서 뭔가의 이동 수단을 타고 온다는 이미지가 고정된 듯 한데 그것은 과학자들이 정의하는 외계생물과는 차이가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과거 냉전시대나 이념이 주요 관심사였던 시기에는 우주인은 테러리스트이거나 침략자로 상상하여 악을 물리치는 선의 대립으로 그려내는 서구인의 종교상을 표현하곤 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환경과 자원이라는 문제에 사람들의 고민이 부각되자 최근의 외계인 영화는 ‘Transformer 3”처럼 지구의 인력을 사용하려는 상상이나 지구의 자원이 부족하여 외계 행성에서 자원을 약탈하려는 “Avatar”나 우주의 곳곳을 누비면서 행성의 자원을 탈취하여 다른 외계의 생물에게 판다는 해적이 나오는 “Star Trek; The beginning”과 같이 행성의 자원을 에너지화하는 상상이 Trend인가 보다.

아마 우리 모두의 상상의 근원은 인간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습성으로 하여 모든 문제를 내부에서 외부로 모방한다는 ‘Gabriel’의 법칙을 지원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외계인이 있다면 우리와 같은 진화의 과정을 거쳤을 테고 같은 생체근거와 목적을 가져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우리 보다 발전한 이동수단이나 무기를 가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는 법칙도 그럴듯하게 상상하게 한다.

그래서 그들이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발전한 과학 수준과 무기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며 그 불안감을 이용하는 호전적인 정치가들로 하여금 무기경쟁을 하는 것으로 자기 만족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일까?

인류가 침략문화를 만들어내면서 , , 쇠’로 타 문화와 인류를 말살했다면 같은 방법으로 총과 쇠는 침략자를 지켜주지 못했어도 균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영화” War of the Worlds/2005”도 있었다.

 

영화의 상상은 공포에서 비롯되어 희망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거의 모든 S.F영화의 모습이지만

외계인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침략자가 지구의 자원을 빼가기 위하여 복제인간을 이용한다는 상상은 언뜻 흔하지만 그 복제인간의 기억을 조작한다는 상상은 이전에는 보지 못한 상상 같다. 그것은 기억의 문제에 있어서 최근 읽은 Sam Harris의 책 덕분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영화의 마지막을 의심하게 만든다.

외계침략 생물이 자신의 우주선 가득 복제인간을 만들어 배양하고 그 복제인간 중 1 ~ 100아니면 1000까지, 아니면 더 많은 수의 잭 하퍼와 빅토리야를 같은 환경의 같은 임무를 주어 같은 희망을 준다고 하여도 그 들의 경험하는 자아기억하는 자아의 충돌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미래를 예상하는 자아가 같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2000년도에 상영된 영화 “The 6th Days”에서 두 아담은 각기 다른 미래를 기억하는 자아때문에 협력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우주의 침략자가 잭과 비카에게 배양과정에서 현실에서 이미 생성된 복제인간에게 동시에 기억을 주입한다고 하여도 미래의 기억이 같을 수는 없어야 하며 흑백필름으로 간혹 나타나는 연관기억은 ‘49’번 잭에게만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의 희망일지 모르는 맑은 내가 흐르고 푸른 초목과 안락한 바람이 있는 오두막에서 수 십 년의 방사능을 견뎌낸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Procol Harum의 낡은 LP음반 속 “A white shade of pale” 음악을 찾아 온 복제인간 52번의 재 등장은 공포에서 끝나지 않고 희망을 주려는 모든 상상영화의 끝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줘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우주의 고도로 발전한 문명과의 싸움에서는 인간이 가진 각종 질병 바이러스와 뇌에 인자되어 있는 기억들의 시냅시스가 늘 이길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걱정해야 할 것은 외계인의 침략이 아니라 영화”2012”에서처럼 지구의 Pangaea 이동설의 실현이나 “Armageddon”처럼 난데없이 들이 닥치는 암석덩어리뿐이거나, 외계의 침략을 방어한다는 이유로 우주에 무기를 만들어 놓겠다는 “Star Wars Project” 따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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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의 법칙 - 사회는 모방이며 모방은 일종의 몽유 상태다
가브리엘 타르드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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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전 서울에 사업을 마련하려던 많은 개발사업자들이 눈길을 주었던 지역 중 한곳은 요즘 시끄러운 철도기지창 지역의 맞은편지역에 있었던 미군 군수기지창 자리였는데 그 지역은 아직도 3종일반주거지역으로 고시된 채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상태로 여전히 서류봉투를 든 브로커들의 한탕주의 희망사항지역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예전 기억으로 그 지역을 협의하기 위해서는 노조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 돌기도 했던 것으로……

타락한 과거 80년대의 서울시 지하철 노조를 생각나게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제 그 지역 건너편의 넓은 땅이 제시했던 휘황찬란한 빛이 꺼져버렸다고 한다.

 용산IBD 개발사업은 공공기관 자금이 전체 지분의 46.3%를 차지하는 범국가적인 프로젝트로서, 이의 성공적 개발을 위해 정부와 서울시는 3 6천억 원에 달하는 광역 교통망 집중화 계획은 물론 서울도시기본계획, U-Turn계획 등 다양한 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51 5483( 171,245)의 개발용지는 복합도시 개발의 대표적 사례인 일본 동경 롯본기 힐스의 다섯 배에 달하며, 투입자금은 31조 원으로 롯본기힐스(4조원), 영국 런던의 카나리워프(6조원), 독일 베를린의 포츠다머플라츠(3조원) 등 기존의 세계적 복합단지 프로젝트와 비교가 되지 않는 큰 규모입니다.

이를 통해 발생하는 부가가치 규모는 67조 원으로, 36만 명의 고용창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며, 외국인 관광객을 포함한 용산IBD의 유동인구는 연간 1 4,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라고 그들의 사업을 소개하는 사업개요의 규모 소개에 번쩍이는 조감도들과 함께 적혀있다.

 

그런데 장밋빛 꿈은 왜 망가졌을까?

자금 조달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였을 것이며, 그 이유로는 부동산경기침체가 한 몫을 하였으며, 세계 경기불황과 금융의 불안정이 어쩌고 저쩌고…….

세계적인 설계규모를 자랑하며 서울의 중심을 바꾸려던, 아시아 최고를 넘어 뉴욕보다 큰 도심을 만들려던 성공의 자신감과 우월감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2년전 이들의 사업개요가 처음으로 민간에 알려졌을 무렵 나의 생각은 웃기고 있네!”였다

건물들은 무슨 용도로 다 채우려나? 다 채우리라고 예상하여 계획하겠지.

나중에 그 당시의 사업성, 경제성운운 하며 아파트로 용도 변경하여 팔지는......않겠지?

초기 계획 당시에는 부동산 경기가 잘 나가던 때이라서 수익성이 충분하다고 여겨 놓고 준공이 가까워지는 시점이 되면 그 시기의 부동산 경기에 따라 국가경기 어쩌고 사업성이 떨어져서 용도대로 처분하지 못하니 사업의 결말을 위해서라도 아파트로 용도 변경해서 팔아야 한다.

이러지 않을 것이란 생각..  맞으려나?  틀리겠지.”

그랬는데,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고 말았는데 이제 무슨 이유로 그리 되었을까를 짚어보고자 사업개요를 들여다보니 모든 개발업자들의 망상이 다 그렇듯이 크고 화려하고 높고 넓으면 다 잘 팔릴 것이라는 망상의 집합체 같아 보인다.

전부 8블록으로 크게 구분 지어진 면적에 여지없이 주택부분이 들어있는데 모두 최고급 주거시설로 표기되어있다. 그 지역에 살던 무주택자들을 위한 배려는 임대아파트라는 블록으로 외진 곳에 ‘1~2세대 특화 주거시설로 되어있는데 이는 아마도 개요상의 표현이고 오피스텔로 전용하기 위한 눈가림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주거부분 계

883,582

68.86%

업무시설

75,167

5.86%

판매시설

272,873

21.26%

문화시설

15,668

1.22%

상업시설

35,953

2.80%

1,283,243

100.00%

 

대략적인 개요를 계산해보니 나의 2년전 우려는 바보 같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시아 경제의 허브니 뭐니 하는 말은 모조리 공염불 겉포장이고 그저 집장사치들의 그림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때 내가 그거 무엇으로 다 분양할 것이란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고 우겨도 별반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토지비용이 비싸니 원가를 회수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파트라고 생각하였을 것이고 40평에서 100평정도 규모의 대형 평형으로 분양하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평균 45평형의 아파트로 계산한다면 4~5천세대의 규모인데 그 규모에 나머지 시설은 분양가를 최고로 책정하기에 적절한 비율 같아 보인다. 그러니 그까짓 땅값에 대한 P.F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고 주민들을 위한 보상도 뻥튀기 계산으로 책정하여 지급한다고 해도 판매시설의 전부가 남는 장사라는 계산을 하였을 것 같다.

이런 계산은 아마 개발업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그만한 규모의 고급주택을 분양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계산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그리고 일정지역에 그만한 인구를 집중시킨다면 다른 어디에서인가 그만한 인구가 빠져나간다고는 생각 안 하였을까? 만약 분양 가격을 당시의 예상대로 평당 3~4천만원대로 분양하였을 경우 인구의 흐름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림대로만, 계획대로 착착 이루어져 건물이 완성되고 주변 교통과 국제적 도심으로서의 역할을 해내었다면 강남의 상권이 요동칠 수 있는 자극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됐다면 서울시의 부동산 흐름은 또 한번 요동치며 끝간 데를 모르고 치솟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볼 때 계획대로 무엇인가가 의지대로 되지 않았던 것은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흔히 마무리 짓는 사필귀정의 결론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Broken City”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내용은 뉴욕시의 낡은 슬럼화 주거지역인 Bolton Village를 재건축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운 시장과 철거업체와의 밀거래를 다룬 영화였다.

영화의 줄거리는 재선을 꿈꾸는 현 시장과 철거업자와의 부정한 거래를 위한 치밀한(? 내가 보기에는 설명이 부족한)작전이 권선징악의 결과로 시장은 구속되고 진보적인 시장이 당선된다는 것이지만 그 안에는 철거업체의 지분을 갖고자 하는 탐욕적 시장과 정직해서 탈인 아들을 둔 철거업자의 계획으로 소중한 보금자리를 잃게 될 수많은 가난하고 선한 사람들의 불안정한 미래를 그린 점이 우리의 재개발 지역에 부는 뉴-타운바람과 비슷한 내용이어서 다소 흥미가 있었던 영화였다.

영화의 내용상 업자의 입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대부분의 부정거래가 그렇듯이 계획이 승인도 되기 전에 축배를 먼저 드는데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찍 터뜨린 샴페인은 파티를 깨버리기 십상인 경우가 경험상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외국이나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몇몇 오래된 대도시들은 벌써 과거의 바빌론이나 로마처럼 비틀거리며 몰락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뉴욕 시민들의 걱정거리라면 노후한 사회 기반시설이다. 상수도관 파열과 가스 폭발은 유럽 어느 지역보다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며, 2007년에는 1924년에 설치된 지역난방 배관이 파열돼 끓는 물이 30미터 치솟으면서 30명이 다치고, 함몰된 구덩이에 화물차가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인간이력서/ 볼프 슈나이더 지음. 2013 을유문화사 <인류가 지은 콘크리트의 미래>)”고 한 것처럼 우리의 도시든 저들의 도시든 도심은 언젠가는 낡게 마련이다. 최근에 서울시에서 백 년 동안 지속 가능한 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반시설부분의 설계를 개혁하겠다고 발표하였는데 공동주택의 기반시설인 전기, 가스, 통신 케이블의 노후화를 예상하고 교체를 쉽게 하여 기존 구조는 오래가도록 하겠다는 의도인데 그것은 아쉽게도 이미 20여년전에 실시했어야 했던 정책이었다. 사람들이 싫증나거나 불만을 가질 수 있던 조건은 건축물의 콘크리트 구조가 아니라 그 콘크리트 DUCT속에 묻혀있던 배관과 기술의 발전을 따라 가지 못한 인프라시설의 변화에 따르지 못한 설계구조였음은 이미 다 알고 있었음에도 적극적으로 변하지 않으려는 일회성의 의식에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그런데 100년이 지나도 나라의 곳곳에 닭장 같은 건물들이 산과 강을 가리고 서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제 이 땅에 본격적인 아파트가 들어선지 30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사람들의 개념은 변화하고 있는데 시는 100년이 가는 아파트를 계획하겠단다. 이제라도 훌륭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는 생각이 가상하다고 해야 하는가?

 

도시는 교통과 기반시설의 편리함으로 사람이 모여들 수 밖에 없고 사람이 모여 듦으로써 살아있는 도시의 역할을 하지만 그것은 도시의 처음 개발 당시의 모습이지 낡아가는 도시를 재건축하고 재개발하고자 기존의 도심을 망가뜨리고 철거한다고 살아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도시가 문화를 포함하고 있는 그 시기의 역사라면 그것은 전통을 포함한 한 지역의 문화를 파괴하는 행위와 같으므로 자꾸 신상으로 옷을 바꿔 입힌다고 주위로부터 존중을 끌어내는 도시계획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같으면, 내 생각대로 할 수 있다면 나는 최근의 생각을 그 지역에 건설하고 싶다.

구체적인 안은 몇 날을 정리해야 나올 듯하지만 적어도 그렇게 도시와 도시의 흐름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1등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뉴욕의 어느 블록보다 보다 크고 도쿄의 롯본기 지역보다 큰 블록을 하나 만들어낸다고 하여 타

도시로부터의 유입이 없이 인구를 증가하게 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인구증가는 그리 바람

직한 정책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LOHAS(Lifestyles Of Health And Sustainability)는 단순한 소비와 생산의 균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사회적 정의 등을 고려하고 후대에게 물려줄 미래 소비 기반으로서 지구의 자연환경을 보호하려 한다는 뜻이 같이 있듯이 지구의 미래를 위하여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을 막아 쾌적한 환경을 후대에 물려주는 사회적 구호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구 동독의 몇몇 도시에서는 이미 제3세계의 도시 팽창과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곳에서는해체 작업즉 빈집을 철거해 녹지대로 만드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같은 책 같은 부분>

이것은 자국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지구의 지리적 사회적 공간을 좁혀 세계화 되어가는 과정에 인구의 자연스런 이동을 감안한 조치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지구의 자원을 생각할 때, 지구과학적 문명개발의 집중을 볼 때 제3세계의 인구 집중과 그로 인한 생산성의 저하나 에너지의 불균형을 생각한다면 인구의 이동은 불가피할 텐데 지금처럼 지구의 도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라고 이해한다. 

 

일개 개발업자였던 떡방업자가 참견하기에는 가당치 않은 생각이겠지만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요즘 책방에 가보면 인문학 코너에 노자와 장자의 책들이 인문학코너를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서양의 수렵인식 사고가 정착민인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한계를 드러내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관점이라면 몽골의 야율초제가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개혁이라면 새로운 사업이나 제도를 시작하여 백성을 번거롭게 만드는 것보다는 원래 있던 일 가운데서 해로운 일, 필요 없는 일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백성들을 위하는 결론을 피력하였던 '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 가지의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 는 뜻의 (興一利不 若除一害)'의 정치철학을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뭔가를 그것도 높게 크게 넓게 화려하게 지어야 한다는 생각은 도심의 미래나 국가의 지속을 위하여 필요한 정책이 아니라 개인집단의 탐욕에 불과함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대한민국의 인구를 모두 서울과 경기도에 집합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면 지금과 같은 방식은 자제하거나 포기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LOHAS‘를 위한 정책이며 삶의 질을 낫게 하는 ‘Well-Being’이 아닐까?

 

한 국가에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경제적 거래를 하는 시장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되며 보이지 않는 손이 자연스럽게 시장을 안정시키도록 해야 한다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주장한 대처리즘Thatcherism의 영국 마가렛 대처 전 수상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있는데 그의 업적은 역사적인 관점으로 보아 시간의 당위성이 보호해줄는지는 모르지만 그 시간이 흐르고 난 후의 평가에는 날카로운 잣대로 들이대어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시기가 지난 후에 그 모델을 본 받으려는 국가에게 힌트를 주고 있다고 본다. 내가 그의 주장이나 경제이념을 책에서 조금 보았다고 인용할 정도의 지식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진행자가 짤막하게 요약한 주제나 그 이념을 담은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까막눈은 아니므로 그의 경제정책을 현실의 시간에 적용하려 할 때에는 국가의 특이성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는 것쯤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영국에서 자유시장을 부활시키려 한 마가렛 대처의 시도는 그 전략과 성공뿐만이 아니라 그 몰락의 양태와 원인 때문에 교훈적이다.””또한 대처주의 정책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 전지구적 자본주의환상, 존 그레이 자유시장의 건설/ 45P ~66P 대처주의 실험>

 

1990년대에 대처를 계승한 존 메이저의 정부는 대처 정책을 완화하지 않았다, 대처의 정책을 더욱 기계적으로 적용했을 뿐이었다, 영국의 철도망은 80개의 민영화된 기업으로 분산되었는데, 그 조치는 철도회사 주식을 통해 이익을 얻은 소수의 불로소득자를 제외하고는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것은 결국 지난 번 선거에서 메이저 정부의 어려움을 가중시켰을 뿐이었다. 47P”

 

대처주의 정책은 영국의 사회와 제도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변화 가운데 일부는 비가역적인 것이었다. 그 가운데 수 차례 실시된 민영화 조치만 놓고 보면, 그것은 그다지 심오하고 지속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지는 않을 것이다. 최초의 민영화는 보수당에 의해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즉 전자통신업을 현대화하는데 필요한 자금의 부족에 직면한 영국 정부는 당시로서는 혁명적 조치였던 주요 공공사업의 민영화를 고려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그리고 그레이는 이 장에 앞서 이렇게 말한다.

 명확히 전지구적 자유시장으로 편성된 세계경제는 사회적 안정치를 희구하는 인류의 보편적 필요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디서나 정부의 존재이유는 불안정한 상태로부터 국민을 지켜내는 능력에 있다. 전지구적 자유방임주의 체제는 정부로 하여금 이러한 보호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훨씬 더 커다란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성의 조건을 만들어내고 있다. 세계시장이 각 국민에게 부과한 위험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풍부한 정책자원을 활용하면서 적절한 관리가 이루어지는 선진경제에서 찾아질 것이다. 더욱 빈곤한 국가에서 전지구적 방임주의는 근본주의적인 체제를 낳으며 근대국가의 해체를 위한 촉매로서 기능한다. 국민국가 차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지구적 차원에서도 자유시장은 안정성이냐 민주주의를 촉진하지 않는다, 전지구적 규모의 민주적 자본주의는 전세계적 규모의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실현 불가능하다. <거대한 전환으로부터 전지구적 자유시장으로. /

 

나는 지금의 부동산 정책이나 용산개발의 결과가 이렇게 되었음에도 정부는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면서 겉으로는 방임하는 같은 표정을 짖는 것은 염치없는 가식이라고 본다.

그러한 결과의 모든 이유는 그들이 만들어낸 정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므로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고 그것이 국가의 정책 외부요인에 있다고 한다거나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그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탐욕으로 물든 잘못된 계획을 수정하고, 정말로 필요한 시설로 마무리 되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한 과정에서 선거를 의식한다거나 보수의 시선을 의식하여 개입하지 않고 놓아둔다는 것은 영국의 경우처럼 결국은 보수를 돌아서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하지만 사회의 어느 편이 시류에 뒤처지는 것은 일시적으로 그럴 있다고 있지만 피해를 보는 쪽은 1% 보수가 아니라 99% 차지하는 서민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위험한 민영화를 중단하여야 한다고 본다.

 

부담 없는 코레일, 그러나 자본잠식-줄 소송 등 후 폭풍 불가피 = 일단 코레일은 큰 부담이 없다는 입장이다. 코레일은 우선 이달 말로 청구시한이 만료되는 협약이행보증금 2400억원을 드림허브에 청구하며출구 전략을 본격 실행하게 된다. 코레일은 총 24000억원에 달하는 토지대금 중 우선 반환하는 5400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9월 말까지 순차적으로 완납하고 사업부지를 되찾아올 방침이다. 코레일은 이 금액을 금융권 단기차입금을 조달해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땅값을 돌려주면 철도기치창 부지를 돌려 받으므로 나중에 재평가해 다시 팔면 되는 등 큰 피해는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드림허브 주도의 현 용산개발 사업이 막을 내리는 대신 코레일이새 판을 짜고 새로운 개발사업을 재추진 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는 이유다.

 

이렇게 예상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은 나와 같은 떡방업자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졸렬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내 생각은 너무 진보적이랄 수 있지만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실현불가능 한 것이 자유시장경제라면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차근차근 다시 시작해보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한다.

 

가령 도시 프레임을 구성하는 측면으로만 생각해본다면 전자산업이 몰려있는 그곳에 영국의 Letch worth마을과 이탈리아의 Bologna, 캐나다의 Quebec의 장점을 잘 섞은 시범도시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목표를 가지고 접근을 하는 것도 방법중의 하나가 아닐까 해본다. 단 여기에 정치색을 담은 좌파 운운하면 내 생각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나는 자꾸만 치솟는 토지가격의 성격을 조절하고 바꾸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으며,

가브리엘 타르드의 책에서 읽은 사회적 측면으로의 관점에 한하여만 개인 사유의 재산을 인정하자는 측면이 있다.

.

 

아마도 토지에 대한 개인 소유욕구에 대하여도 똑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드 라블레이E.L. de Laveleye(벨기에 경제학자)씨의 사상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음가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즉 무엇보다도 문명화의 촉진자였으며 일단의 농업 발명에서 생겨난 이 욕구는 공동 소유 욕구(북아메리카 푸에블로족, 인도의 원시공산제, 러시아의 미르Mir(제정러시아 촌락공동체)보다 나중에 생겨났으며, 아울러 아직도 미분할 상태로 있는 것, 예를 들면 프랑스 시골 공유지의 점차적인 분할이 증명하는 바처럼, 실제로 그 개인 소유 욕구가 공동 소유 욕구를 희생시키면서 오늘날까지 계속 성장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개인 소유 욕구는 더 이상 증대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 욕구가 더 좋은 음식과 일반적인 복지에 대한 욕구와 경쟁하게 되는 날, 우리는 그 개인 소유 욕구가 그 자신이 낳은 이 경쟁자 앞에서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모방의 법칙/ 가브리엘 타르드/문예출판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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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환상
존 그레이 지음, 김영진 옮김 / 창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10여년전 서울에 사업을 마련하려던 많은 개발사업자들이 눈길을 주었던 지역 중 한곳은 요즘 시끄러운 철도기지창 지역의 맞은편지역에 있었던 미군 군수기지창 자리였는데 그 지역은 아직도 3종일반주거지역으로 고시된 채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상태로 여전히 서류봉투를 든 브로커들의 한탕주의 희망사항지역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예전 기억으로 그 지역을 협의하기 위해서는 노조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 돌기도 했던 것으로……

타락한 과거 80년대의 서울시 지하철 노조를 생각나게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제 그 지역 건너편의 넓은 땅이 제시했던 휘황찬란한 빛이 꺼져버렸다고 한다.

 용산IBD 개발사업은 공공기관 자금이 전체 지분의 46.3%를 차지하는 범국가적인 프로젝트로서, 이의 성공적 개발을 위해 정부와 서울시는 3 6천억 원에 달하는 광역 교통망 집중화 계획은 물론 서울도시기본계획, U-Turn계획 등 다양한 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51 5483( 171,245)의 개발용지는 복합도시 개발의 대표적 사례인 일본 동경 롯본기 힐스의 다섯 배에 달하며, 투입자금은 31조 원으로 롯본기힐스(4조원), 영국 런던의 카나리워프(6조원), 독일 베를린의 포츠다머플라츠(3조원) 등 기존의 세계적 복합단지 프로젝트와 비교가 되지 않는 큰 규모입니다.

이를 통해 발생하는 부가가치 규모는 67조 원으로, 36만 명의 고용창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며, 외국인 관광객을 포함한 용산IBD의 유동인구는 연간 1 4,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라고 그들의 사업을 소개하는 사업개요의 규모 소개에 번쩍이는 조감도들과 함께 적혀있다.

 

그런데 장밋빛 꿈은 왜 망가졌을까?

자금 조달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였을 것이며, 그 이유로는 부동산경기침체가 한 몫을 하였으며, 세계 경기불황과 금융의 불안정이 어쩌고 저쩌고…….

세계적인 설계규모를 자랑하며 서울의 중심을 바꾸려던, 아시아 최고를 넘어 뉴욕보다 큰 도심을 만들려던 성공의 자신감과 우월감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2년전 이들의 사업개요가 처음으로 민간에 알려졌을 무렵 나의 생각은 웃기고 있네!”였다

건물들은 무슨 용도로 다 채우려나? 다 채우리라고 예상하여 계획하겠지.

나중에 그 당시의 사업성, 경제성운운 하며 아파트로 용도 변경하여 팔지는......않겠지?

초기 계획 당시에는 부동산 경기가 잘 나가던 때이라서 수익성이 충분하다고 여겨 놓고 준공이 가까워지는 시점이 되면 그 시기의 부동산 경기에 따라 국가경기 어쩌고 사업성이 떨어져서 용도대로 처분하지 못하니 사업의 결말을 위해서라도 아파트로 용도 변경해서 팔아야 한다.

이러지 않을 것이란 생각..  맞으려나?  틀리겠지.”

그랬는데,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고 말았는데 이제 무슨 이유로 그리 되었을까를 짚어보고자 사업개요를 들여다보니 모든 개발업자들의 망상이 다 그렇듯이 크고 화려하고 높고 넓으면 다 잘 팔릴 것이라는 망상의 집합체 같아 보인다.

전부 8블록으로 크게 구분 지어진 면적에 여지없이 주택부분이 들어있는데 모두 최고급 주거시설로 표기되어있다. 그 지역에 살던 무주택자들을 위한 배려는 임대아파트라는 블록으로 외진 곳에 ‘1~2세대 특화 주거시설로 되어있는데 이는 아마도 개요상의 표현이고 오피스텔로 전용하기 위한 눈가림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주거부분 계

883,582

68.86%

업무시설

75,167

5.86%

판매시설

272,873

21.26%

문화시설

15,668

1.22%

상업시설

35,953

2.80%

1,283,243

100.00%

 

대략적인 개요를 계산해보니 나의 2년전 우려는 바보 같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시아 경제의 허브니 뭐니 하는 말은 모조리 공염불 겉포장이고 그저 집장사치들의 그림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때 내가 그거 무엇으로 다 분양할 것이란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고 우겨도 별반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토지비용이 비싸니 원가를 회수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파트라고 생각하였을 것이고 40평에서 100평정도 규모의 대형 평형으로 분양하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평균 45평형의 아파트로 계산한다면 4~5천세대의 규모인데 그 규모에 나머지 시설은 분양가를 최고로 책정하기에 적절한 비율 같아 보인다. 그러니 그까짓 땅값에 대한 P.F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고 주민들을 위한 보상도 뻥튀기 계산으로 책정하여 지급한다고 해도 판매시설의 전부가 남는 장사라는 계산을 하였을 것 같다.

이런 계산은 아마 개발업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그만한 규모의 고급주택을 분양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계산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그리고 일정지역에 그만한 인구를 집중시킨다면 다른 어디에서인가 그만한 인구가 빠져나간다고는 생각 안 하였을까? 만약 분양 가격을 당시의 예상대로 평당 3~4천만원대로 분양하였을 경우 인구의 흐름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림대로만, 계획대로 착착 이루어져 건물이 완성되고 주변 교통과 국제적 도심으로서의 역할을 해내었다면 강남의 상권이 요동칠 수 있는 자극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됐다면 서울시의 부동산 흐름은 또 한번 요동치며 끝간 데를 모르고 치솟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볼 때 계획대로 무엇인가가 의지대로 되지 않았던 것은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흔히 마무리 짓는 사필귀정의 결론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Broken City”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내용은 뉴욕시의 낡은 슬럼화 주거지역인 Bolton Village를 재건축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운 시장과 철거업체와의 밀거래를 다룬 영화였다.

영화의 줄거리는 재선을 꿈꾸는 현 시장과 철거업자와의 부정한 거래를 위한 치밀한(? 내가 보기에는 설명이 부족한)작전이 권선징악의 결과로 시장은 구속되고 진보적인 시장이 당선된다는 것이지만 그 안에는 철거업체의 지분을 갖고자 하는 탐욕적 시장과 정직해서 탈인 아들을 둔 철거업자의 계획으로 소중한 보금자리를 잃게 될 수많은 가난하고 선한 사람들의 불안정한 미래를 그린 점이 우리의 재개발 지역에 부는 뉴-타운바람과 비슷한 내용이어서 다소 흥미가 있었던 영화였다.

영화의 내용상 업자의 입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대부분의 부정거래가 그렇듯이 계획이 승인도 되기 전에 축배를 먼저 드는데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찍 터뜨린 샴페인은 파티를 깨버리기 십상인 경우가 경험상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외국이나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몇몇 오래된 대도시들은 벌써 과거의 바빌론이나 로마처럼 비틀거리며 몰락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뉴욕 시민들의 걱정거리라면 노후한 사회 기반시설이다. 상수도관 파열과 가스 폭발은 유럽 어느 지역보다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며, 2007년에는 1924년에 설치된 지역난방 배관이 파열돼 끓는 물이 30미터 치솟으면서 30명이 다치고, 함몰된 구덩이에 화물차가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인간이력서/ 볼프 슈나이더 지음. 2013 을유문화사 <인류가 지은 콘크리트의 미래>)”고 한 것처럼 우리의 도시든 저들의 도시든 도심은 언젠가는 낡게 마련이다. 최근에 서울시에서 백 년 동안 지속 가능한 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반시설부분의 설계를 개혁하겠다고 발표하였는데 공동주택의 기반시설인 전기, 가스, 통신 케이블의 노후화를 예상하고 교체를 쉽게 하여 기존 구조는 오래가도록 하겠다는 의도인데 그것은 아쉽게도 이미 20여년전에 실시했어야 했던 정책이었다. 사람들이 싫증나거나 불만을 가질 수 있던 조건은 건축물의 콘크리트 구조가 아니라 그 콘크리트 DUCT속에 묻혀있던 배관과 기술의 발전을 따라 가지 못한 인프라시설의 변화에 따르지 못한 설계구조였음은 이미 다 알고 있었음에도 적극적으로 변하지 않으려는 일회성의 의식에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그런데 100년이 지나도 나라의 곳곳에 닭장 같은 건물들이 산과 강을 가리고 서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제 이 땅에 본격적인 아파트가 들어선지 30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사람들의 개념은 변화하고 있는데 시는 100년이 가는 아파트를 계획하겠단다. 이제라도 훌륭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는 생각이 가상하다고 해야 하는가?

 

도시는 교통과 기반시설의 편리함으로 사람이 모여들 수 밖에 없고 사람이 모여 듦으로써 살아있는 도시의 역할을 하지만 그것은 도시의 처음 개발 당시의 모습이지 낡아가는 도시를 재건축하고 재개발하고자 기존의 도심을 망가뜨리고 철거한다고 살아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도시가 문화를 포함하고 있는 그 시기의 역사라면 그것은 전통을 포함한 한 지역의 문화를 파괴하는 행위와 같으므로 자꾸 신상으로 옷을 바꿔 입힌다고 주위로부터 존중을 끌어내는 도시계획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같으면, 내 생각대로 할 수 있다면 나는 최근의 생각을 그 지역에 건설하고 싶다.

구체적인 안은 몇 날을 정리해야 나올 듯하지만 적어도 그렇게 도시와 도시의 흐름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1등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뉴욕의 어느 블록보다 보다 크고 도쿄의 롯본기 지역보다 큰 블록을 하나 만들어낸다고 하여 타

도시로부터의 유입이 없이 인구를 증가하게 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인구증가는 그리 바람

직한 정책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LOHAS(Lifestyles Of Health And Sustainability)는 단순한 소비와 생산의 균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사회적 정의 등을 고려하고 후대에게 물려줄 미래 소비 기반으로서 지구의 자연환경을 보호하려 한다는 뜻이 같이 있듯이 지구의 미래를 위하여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을 막아 쾌적한 환경을 후대에 물려주는 사회적 구호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구 동독의 몇몇 도시에서는 이미 제3세계의 도시 팽창과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곳에서는해체 작업즉 빈집을 철거해 녹지대로 만드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같은 책 같은 부분>

이것은 자국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지구의 지리적 사회적 공간을 좁혀 세계화 되어가는 과정에 인구의 자연스런 이동을 감안한 조치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지구의 자원을 생각할 때, 지구과학적 문명개발의 집중을 볼 때 제3세계의 인구 집중과 그로 인한 생산성의 저하나 에너지의 불균형을 생각한다면 인구의 이동은 불가피할 텐데 지금처럼 지구의 도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라고 이해한다. 

 

일개 개발업자였던 떡방업자가 참견하기에는 가당치 않은 생각이겠지만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요즘 책방에 가보면 인문학 코너에 노자와 장자의 책들이 인문학코너를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서양의 수렵인식 사고가 정착민인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한계를 드러내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관점이라면 몽골의 야율초제가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개혁이라면 새로운 사업이나 제도를 시작하여 백성을 번거롭게 만드는 것보다는 원래 있던 일 가운데서 해로운 일, 필요 없는 일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백성들을 위하는 결론을 피력하였던 '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 가지의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 는 뜻의 (興一利不 若除一害)'의 정치철학을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뭔가를 그것도 높게 크게 넓게 화려하게 지어야 한다는 생각은 도심의 미래나 국가의 지속을 위하여 필요한 정책이 아니라 개인집단의 탐욕에 불과함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대한민국의 인구를 모두 서울과 경기도에 집합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면 지금과 같은 방식은 자제하거나 포기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LOHAS‘를 위한 정책이며 삶의 질을 낫게 하는 ‘Well-Being’이 아닐까?

 

한 국가에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경제적 거래를 하는 시장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되며 보이지 않는 손이 자연스럽게 시장을 안정시키도록 해야 한다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주장한 대처리즘Thatcherism의 영국 마가렛 대처 전 수상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있는데 그의 업적은 역사적인 관점으로 보아 시간의 당위성이 보호해줄는지는 모르지만 그 시간이 흐르고 난 후의 평가에는 날카로운 잣대로 들이대어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시기가 지난 후에 그 모델을 본 받으려는 국가에게 힌트를 주고 있다고 본다. 내가 그의 주장이나 경제이념을 책에서 조금 보았다고 인용할 정도의 지식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진행자가 짤막하게 요약한 주제나 그 이념을 담은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까막눈은 아니므로 그의 경제정책을 현실의 시간에 적용하려 할 때에는 국가의 특이성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는 것쯤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영국에서 자유시장을 부활시키려 한 마가렛 대처의 시도는 그 전략과 성공뿐만이 아니라 그 몰락의 양태와 원인 때문에 교훈적이다.””또한 대처주의 정책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 전지구적 자본주의환상, 존 그레이 자유시장의 건설/ 45P ~66P 대처주의 실험>

 

1990년대에 대처를 계승한 존 메이저의 정부는 대처 정책을 완화하지 않았다, 대처의 정책을 더욱 기계적으로 적용했을 뿐이었다, 영국의 철도망은 80개의 민영화된 기업으로 분산되었는데, 그 조치는 철도회사 주식을 통해 이익을 얻은 소수의 불로소득자를 제외하고는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것은 결국 지난 번 선거에서 메이저 정부의 어려움을 가중시켰을 뿐이었다. 47P”

 

대처주의 정책은 영국의 사회와 제도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변화 가운데 일부는 비가역적인 것이었다. 그 가운데 수 차례 실시된 민영화 조치만 놓고 보면, 그것은 그다지 심오하고 지속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지는 않을 것이다. 최초의 민영화는 보수당에 의해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즉 전자통신업을 현대화하는데 필요한 자금의 부족에 직면한 영국 정부는 당시로서는 혁명적 조치였던 주요 공공사업의 민영화를 고려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그리고 그레이는 이 장에 앞서 이렇게 말한다.

 명확히 전지구적 자유시장으로 편성된 세계경제는 사회적 안정치를 희구하는 인류의 보편적 필요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디서나 정부의 존재이유는 불안정한 상태로부터 국민을 지켜내는 능력에 있다. 전지구적 자유방임주의 체제는 정부로 하여금 이러한 보호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훨씬 더 커다란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성의 조건을 만들어내고 있다. 세계시장이 각 국민에게 부과한 위험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풍부한 정책자원을 활용하면서 적절한 관리가 이루어지는 선진경제에서 찾아질 것이다. 더욱 빈곤한 국가에서 전지구적 방임주의는 근본주의적인 체제를 낳으며 근대국가의 해체를 위한 촉매로서 기능한다. 국민국가 차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지구적 차원에서도 자유시장은 안정성이냐 민주주의를 촉진하지 않는다, 전지구적 규모의 민주적 자본주의는 전세계적 규모의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실현 불가능하다. <거대한 전환으로부터 전지구적 자유시장으로. /

 

나는 지금의 부동산 정책이나 용산개발의 결과가 이렇게 되었음에도 정부는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면서 겉으로는 방임하는 같은 표정을 짖는 것은 염치없는 가식이라고 본다.

그러한 결과의 모든 이유는 그들이 만들어낸 정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므로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고 그것이 국가의 정책 외부요인에 있다고 한다거나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그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탐욕으로 물든 잘못된 계획을 수정하고, 정말로 필요한 시설로 마무리 되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한 과정에서 선거를 의식한다거나 보수의 시선을 의식하여 개입하지 않고 놓아둔다는 것은 영국의 경우처럼 결국은 보수를 돌아서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하지만 사회의 어느 편이 시류에 뒤처지는 것은 일시적으로 그럴 있다고 있지만 피해를 보는 쪽은 1% 보수가 아니라 99% 차지하는 서민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위험한 민영화를 중단하여야 한다고 본다.

 

부담 없는 코레일, 그러나 자본잠식-줄 소송 등 후 폭풍 불가피 = 일단 코레일은 큰 부담이 없다는 입장이다. 코레일은 우선 이달 말로 청구시한이 만료되는 협약이행보증금 2400억원을 드림허브에 청구하며출구 전략을 본격 실행하게 된다. 코레일은 총 24000억원에 달하는 토지대금 중 우선 반환하는 5400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9월 말까지 순차적으로 완납하고 사업부지를 되찾아올 방침이다. 코레일은 이 금액을 금융권 단기차입금을 조달해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땅값을 돌려주면 철도기치창 부지를 돌려 받으므로 나중에 재평가해 다시 팔면 되는 등 큰 피해는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드림허브 주도의 현 용산개발 사업이 막을 내리는 대신 코레일이새 판을 짜고 새로운 개발사업을 재추진 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는 이유다.

 

이렇게 예상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은 나와 같은 떡방업자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졸렬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내 생각은 너무 진보적이랄 수 있지만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실현불가능 한 것이 자유시장경제라면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차근차근 다시 시작해보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한다.

 

가령 도시 프레임을 구성하는 측면으로만 생각해본다면 전자산업이 몰려있는 그곳에 영국의 Letch worth마을과 이탈리아의 Bologna, 캐나다의 Quebec의 장점을 잘 섞은 시범도시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목표를 가지고 접근을 하는 것도 방법중의 하나가 아닐까 해본다. 단 여기에 정치색을 담은 좌파 운운하면 내 생각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나는 자꾸만 치솟는 토지가격의 성격을 조절하고 바꾸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으며,

가브리엘 타르드의 책에서 읽은 사회적 측면으로의 관점에 한하여만 개인 사유의 재산을 인정하자는 측면이 있다.

.

 

아마도 토지에 대한 개인 소유욕구에 대하여도 똑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드 라블레이E.L. de Laveleye(벨기에 경제학자)씨의 사상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음가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즉 무엇보다도 문명화의 촉진자였으며 일단의 농업 발명에서 생겨난 이 욕구는 공동 소유 욕구(북아메리카 푸에블로족, 인도의 원시공산제, 러시아의 미르Mir(제정러시아 촌락공동체)보다 나중에 생겨났으며, 아울러 아직도 미분할 상태로 있는 것, 예를 들면 프랑스 시골 공유지의 점차적인 분할이 증명하는 바처럼, 실제로 그 개인 소유 욕구가 공동 소유 욕구를 희생시키면서 오늘날까지 계속 성장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개인 소유 욕구는 더 이상 증대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 욕구가 더 좋은 음식과 일반적인 복지에 대한 욕구와 경쟁하게 되는 날, 우리는 그 개인 소유 욕구가 그 자신이 낳은 이 경쟁자 앞에서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모방의 법칙/ 가브리엘 타르드/문예출판사2012)

 

이탈리아의 협동조합은 1900년 초까지만 해도 반시장적인 사회주의 협동조합이었다고 한다. 이후 1900년 중반부터 자유시장경제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친시장적인 자유주의 협동조합이 생겨나면서 경쟁구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바뀐 것이다. 지금 이탈리아에선 자유주의 협동조합과 사회주의 협동조합이 양립한다. 친시장적 협동조합의 역사도 100년이 된 것이다. 지금은 이 두 세력이 균형을 유지하면서 경쟁하고 있다. 지난해 반기문 총장이한국도 선진국 진입을 위해 협동조합을 육성 발전시켜야 한다고 발언한 것처럼 협동조합은 미국, 캐나다 등 선진국에서도 경제위기의 완충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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